소설리스트

학사신공-843화 (600/2,000)

843화. 뇌수(雷獸)

*

두 목함을 받아 든 어 씨 성의 주인이 시선을 한립에게 돌렸다. 그 때 한립의 눈동자가 남색 빛으로 일렁이며 푸른 과실을 응시했다.

“한 형제, 청라과에 문제라도 있는가?”

주인이 그의 표정에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히 물었다.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한립이 목함을 닫아 던져주었다. 야원 사내는 목함을 회수하고 한립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다가 말없이 대문을 나섰다. 한립과 청년 그리고 거한이 그의 뒤를 따랐다.

주인의 비행 속도는 극도로 빨랐지만 한립과 다른 이들도 이에 못지않아 어렵지 않게 교역대전을 빠져나가 성성 어딘가로 향했다.

장장 한 시진 넘게 날아가고서야 그들은 성성에서 굉장히 외진 곳에 도착했다. 건물도 거의 없었고 지나는 천붕인도 많지 않아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주인은 그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2층 건물 앞에 내려섰다. 야윈 사내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대문이 저절로 열렸고 안에서 젊은 사내 둘이 나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사조님, 돌아오셨습니까!”

“너희는 바깥을 지키고, 내 분부가 없는 한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존명!”

두 사내가 즉시 답하고 대문의 좌우로 나뉘어 섰다. 그리고 주인이 먼저 건물로 들어가자 한립을 비롯한 청년과 거한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건물은 그리 크지 않았고 내부 장식도 평범했다. 네모난 나무 탁자 세 개 그리고 열댓 개의 나무 의자가 전부였다.

벽에는 몇몇 낡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요수가 노니는 산수화일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어 형, 이런 곳에 영수가 있단 말입니까?”

거한이 한 번 둘러보고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렇게 협소한 공간에 강력한 영수가 갇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를 여기까지 모셔와 속이기라도 하겠습니까. 따라 오시지요.”

주인이 거한을 한 번 쳐다보더니 산수화가 걸린 벽 쪽으로 걸어가 소매를 털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날아올랐다. 두루마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펼쳐졌는데 뜻밖에도 벽에 걸린 그림과 똑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거한과 한립은 뭔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청년이 안색이 달라지며 소리 높였다.

“수미동천도(須彌洞天圖)! 놀랍게도 오광족의 지보(至寶)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수미도? 말도 안 됩니다. 그런 보물은 오광족도 일곱 벌이나 가지고 있을까 말까인데 어 형께서 어찌 구한단 말입니까.”

그 말에 거한이 화들짝 놀라 불신을 표했다. 한립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수미(須彌)’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동해 벽에 걸린 화폭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세월이 흘러 누르스름하게 변해 버린 종이 위로 암녹색의 작은 산과 건물이 그려져 있었다. 달빛처럼 흐릿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이었다.

“안목이 있으십니다. 이게 바로 수미동천도입니다. 오광족이 보물로 여기는 그 일곱 벌 중 하나가 아니라 하자가 있는 수미도에 불과하지만요.”

주인이 피식 웃었다.

“모조품이란 뜻입니까?”

청년과 거한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맞습니다. 이건 오광족에서도 아는 사람이 드문 사실입니다만, 당시 오광족이 오색공작의 뼈를 이용해 제련해낸 수미동천도는 7벌이 아니라 총 10벌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중 3벌은 하자가 있었죠. 효과가 크게 떨어져 그 3벌은 숨기고 바깥으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양한 이유로 오광족 밖으로 유출되어 지금은 다른 종족의 손에 들어갔지요.”

“아무리 하자가 있는 물건이라도 어 형께서 수미지물(須彌之物)을 얻으신 데는 기연이 따랐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거한과 청년이 부럽다는 티를 냈다. 한립 역시 탐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미지물’은 그가 영계에 온 후 가장 얻고 싶은 보물 중 하나였다. 인계에서 공간균열을 이용해 만들었던 가짜 수미공간과 달리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언제든 갖고 다닐 수 있는 진정한 공간 보물이었다.

“됐으니 출발합시다. 영수는 동천(洞天) 안에 있습니다.”

주인장이 미소를 거두고 손에 들고 있던 화폭을 털었다. 그러자 두루마리 화폭에서 오색 영기의 빛이 뿜어져 나와 대량의 기운이 벽에 걸린 그림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에 주인장이 주술을 읊으며 한 손을 들어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자 그림에서도 영기의 빛이 반짝이며 대량의 기운이 분출되었다.

오색 기운은 주인장의 조종을 받아 순식간에 사람들을 집어삼켰고,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다 그 기운에 몸을 맡겼다.

눈부신 빛이 가시고 눈을 뜬 한립은 자신이 청석으로 만들어진 광장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머지않은 곳에 눈에 익은 건물들이 보였다.

이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눈앞에 펼쳐진 것이 놀랍게도 수미동천도에서 보았던 작은 산에 세워진 건물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립은 주위를 둘러보며 탄성을 질렀다. 어느새 한립은 수미동천도 그림과 똑같은 공간에 들어와 있게 된 것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도처에 오색 빛의 장막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한과 청년 그리고 주인장이 서 있었다. 거한과 청년도 주위를 둘러보며 호기심을 드러냈고 주인장은 거침없이 건물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 형, 수미공간이 보기에는 완벽한데 어떤 하자가 있다는 것입니까?”

청년이 주인을 따라가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허허, 그걸 내가 말해 줄 것 같습니까? 수미동천도에 어떤 하자가 있는지는 이번 거래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만.”

주인장이 눈을 흘기며 냉랭히 답했다.

“하하, 그리 예민하게 구실 게 무엇입니까? 저는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상대의 냉랭한 말투에 청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했다. 이에 주인장도 콧방귀를 뀌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도움을 청할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백여 장 밖의 누각에 나타나 뒷짐을 쥐고 허공에 멈추었다. 3층으로 이루어진 누각은 고풍스런 양식에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식을 띄고 있었다.

“영수는 이곳에 가둬두었습니다. 일단 같이 가서 보고 이야기하시죠.”

주인장이 그들에게 차분히 설명하고 먼저 내려가자 다른 이들도 시선을 교환하고 그 뒤를 쫓았다. 주인장은 1층 입구까지 가지 않고 2 층의 반원형 창문 앞에 떠서 멈추었다. 다른 이들은 의아했지만 똑 같이 2층 높이에 떠 있었다.

창문에 은빛의 장막이 비추는 것이 미리 금제로 봉인을 해둔 것 같았다.

콰르릉!

청년이 눈을 빛내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돌연 굉음이 울리고 눈앞의 은색 빛의 장막이 흔들렸다. 누각이 흔들릴 정도였다.

콰르릉 콰콰쾅! 꽈꽝! 쿠릉!

그리고 벼락 소리가 끝없이 이어져 네 인물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마치 갑자기 벼락으로 가득 찬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런.’

이에 한립은 깜짝 놀라 대연결을 운용해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주인장과 거한 그리고 청년도 각종 방법을 동원해 곧 평정을 회복했다.

“이게 어 형께서 굴복시키고 싶다는 영수입니까?”

흑갑 거한이 뚫어져라 창문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금제에 갇혀 있어 술법으로 꺼내주지 않는 한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니까요.”

주인장의 두 눈에서 흥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어 그가 한 손을 뒤집어 두루마리 그림을 꺼내 들었다. 바로 수미동천도 화폭이었다.

이번에는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고 한쪽 끝을 잡아 다른 쪽 끝으로 빛의 장막을 가리켰는데 창문의 빛이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그리고 주인장이 날개를 펄럭여 누각 안으로 사라졌다. 이에 거한과 청년도 곧바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한립은 잠시 생각하다가 서서히 창문 안으로 날아갔다.

쿵!

굉음이 울리고 또다시 누각이 흔들렸다. 벼락 속성 영기의 압력이 마치 실체를 지닌 것처럼 밀려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한립은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져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빠져나올 뻔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회색 기운으로 그것을 막아냈고 그제야 눈앞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누각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는데 2, 3백 장 면적의 작은 광장을 보는 것 같았다. 또한 중심부에는 각양각색의 요물과 괴수들이 조각된 81개의 굵은 기둥들이 누런빛을 내며 서 있었다.

꽈광 콰콰쾅!

쿠르릉 콰쾅! 콰릉!

기둥들을 에워싼 공간에서 괴이한 검은 뇌전이 번뜩였다. 커다란 벼락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곳은 무언가를 가두기 위한 커다란 우리 같았다.

검은 안개 속에서 쉼 없이 은백색 뇌전이 튕기며 주변의 검은 뇌전 그물을 공격했지만 마치 천적이라도 만난 듯 연기로 변할 뿐이었다.

“저 안에 있는 것이 그 벼락 속성 영수입니까?”

흑갑 거한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검은 안개를 보고 멈칫했다.

“지금 저 영수를 얕잡아 보는 것 입니까? 하긴 뇌수(雷獣)의 무서움을 쉽게 상상하기는 어렵겠지요.”

주인장이 거한을 힐끔 보고는 냉소했다.

“뇌수?”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렇네. 그게 바로 이 영수의 이름이지! 뇌수의 내력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건 없네만 천지간에 오직 이것 한 마리뿐이지.”

주인장이 뚫어져라 검은 안개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광기를 드러냈다.

“과장이 조금 심하신 것 아닙니까? 공격력이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데요.”

“공격이요? 저 뇌수는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 뇌전들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에요. 뇌수의 진면목과 공격능력이 어떤 지는 직접 보시면 압니다.”

온화한 청년의 말에 주인장이 별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비웃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매 속에서 하얀 빛이 빠져나와 가장 굵은 기둥의 꼭대기로 날아갔다. 그것은 새하얀 몸에 날개가 달린 작은 짐승이었다. 전신에 몇 촌 가량의 날카로운 비늘이 달려있어 날개달린 고슴도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인장이 영수에 어떤 금제를 걸어 놓았는지 허물어지듯 구리 기둥에 떨어진 작은 짐승은 사지를 뻗고 엎어져 벌벌 떨었다.

“호망수(毫芒獸)!”

흑갑 거한과 청년은 비령족에서 흉악하기로 유명한 요수를 단번에 알아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저 조그만 짐승의 포악함은 연허급 존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구리 기둥에 묶인 것만으로 저렇게 약해지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은 기운 속에서 푸른 거대 손이 나타나 호망수를 잡아채려 했다. 다섯 손가락이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은색 뇌전이 마구 튀었다.

쾅!

작은 짐승은 도망갈 힘이 없어 보였지만 다행히 그물 밖에 있었기에 무사했다.

그러나 곧 괴이한 소리가 검은 안개 속에서 울려 퍼졌다. 노기가 느껴지는 천둥소리가 울리고 눈부신 은색빛이 안개 속에서 터져 나왔다. 은색 뇌전의 빛은 무언가를 품고 빠르게 팽창해 검은 기운을 밀어냈고 인간 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한 요물이 나타났다.

요물은 비둘기 머리에 푸른 피부, 남색 날개를 지니고 있었고 하반신은 조류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양팔이 쇠망치와 송곳처럼 생긴 괴이한 모양이었다.

반인반조(半人半鳥)의 황금색 눈동자가 음산하게 번뜩였다.

뇌수의 모습을 본 순간 한립 일행은 너무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뇌수의 비둘기 머리가 괴성을 질렀고 입안에서 하얀빛을 번뜩이며 무수히 많은 하얀 뇌전 구슬을 뿜어냈다.

그리고 동시에 날개가 펄럭이며 수백 개의 깃털이 쏘아져 나와 반 척 크기의 푸른 화살로 변해 빼곡하게 허공을 채웠다.

콰쾅!

뇌수의 쇠망치 손과 송곳 손이 충돌해 이번에는 굵직한 금색 뇌전이 송곳 끝에서 튀어나갔고 곧 금색 뇌전 교룡으로 변해 흉흉한 기세로 나아갔다. 찰나의 순간 놀랍게도 세 가지 각기 다른 벼락 속성 신통을 발휘한 것이다.

그 모습에 세 사람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렇게 강력한 공격을 검은 뇌전 그물이 막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 씨 성의 사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