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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42화 (599/2,000)
  • 842화. 경칩(驚蟄)

    *

    허공의 거대 붕새가 날개를 접고 푸른빛 속에서 작아졌다. 곧 청아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눈부신 빛 속에서 윗옷을 벗은 사내의 모습이 나타나 푸른빛에 휩싸여 천천히 내려왔다.

    금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푸른 대붕의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어려 반짝이고 있었다. 사내는 바로 곤붕진혈을 융합하고 사리를 연화한 한립 이었다.

    ‘진성법상(眞聖法相)! 진성의 피를 지니고 있는 것이 확실하구나. 게다가 그 표식을 불러일으키다니, 대부분 성자의 몸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진성법상이 몸에 나타났으니 다른 종족들이 한립이 진정한 천붕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도 시련에 참가하지 못할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할 것이다.

    금열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표정을 바로 했다. 하지만 서 노인과 미부인은 한립의 가슴에 나타난 문양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부분의 천붕족 고위층들도 지니지 못한 진성법상을 이족인이 지니다니 어찌 울적하지 않겠는가!

    금빛이 반짝이고 그의 몸에 금은색 장포가 나타나자 한립은 단정한 태도로 세 장로 앞에 나아가 포권을 했다.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천붕 변신술을 거의 익히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놀라운 성과에 비해 겸손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자네의 변신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라 우리도 더는 지도할 부분이 없네. 이만 돌아가도 되겠어. 두 달 후 시련에 참가하기 전까지 천붕의 서약 부권에 이름을 올려 주겠네. 그동안은 성성을 떠나지 말고 자유롭게 지내면 되네. 그리고 비록 자네를 도와 곤붕사리를 연화해 주기는 했지만 사리 안에 포함된 살기(煞氣) 등이 깨끗이 제거되지 않았어. 체내에 잠복해 있겠지만 단시일 내로는 발작하지 않을 것이니 시련에서 돌아오면 제거해 주겠네.”

    금열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으나 이내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예. 두 달 후에 시련에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공손히 세 장로를 향해 예를 취하고 푸른 빛덩이로 변해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세 장로의 표정이 다 제각각이었다. 금열은 무표정했지만 서 노인과 미부인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    *    *

    반나절 후, 다시 귀빈관으로 돌아온 한립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수결을 맺자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깜빡거렸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서 고통스런 기색이 어리며 굵은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한립은 한숨을 쉬며 푸른빛을 거두고 눈을 떴다.

    “흥미롭구나. 홍운이라는 천붕족 장로의 의식이 이리 흉포하다니. 대연결이 아니었으면 후환이 엄청났을 것이야. 다행히 자의식이 없으니 일단 억눌러 놓고 천천히 연화시켜야겠구나.”

    아무리 의식의 일부라도 합체 수사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립의 수행으로도 수백 년은 지나야 완전히 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화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본연의 의식을 훨씬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사리에 섞인 약간의 살기 같은 혼잡한 기운은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범성진마공이 그런 종류의 사기와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입고 있는 뇌포를 문질렀다.

    꽈광!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며 무수히 많은 금은색 뇌전이 체내로 흡수되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가슴의 푸른 붕새 도안을 바라보았다.

    “흥, 천붕법상(天鵬法相)? 그보다는 경칩법상(驚蟄法相)이라고 말해야겠지.”

    한립은 손끝으로 그것을 가볍게 가리켰다. 그러자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났다.

    희미하던 대붕 도안이 오색으로 빛나며 오색 공작으로 변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포효하는 금색 원숭이 무늬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얀빛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만일 금열 등 천붕족 장로들이 이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을 것이다. 진성법상은 수시로 모양이 변하거나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수 없었다.

    일단 피부에 진성법상의 무늬가 나타나면 보통 일생을 주인과 같이하며 변화하지도 않았다. 한립은 가슴을 살피며 무척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경칩의 12가지 변화 중 이미 세 종류 구결을 터득했다. 비록 오색공작(五色孔雀)과 산악거원(山岳巨猿)의 진혈이 없어 진령화신으로 변화하지는 못하지만 그 위력은 두말할 나위 없어.”

    이것은 홍운의 의식의 힘을 연화하며 우연히 얻게 된 공법으로 이론상으로는 이제 12종류의 진령의 형태로 변할 수 있었다. 그가 만약 12가지 진령법상 전부를 지녀 그들의 신통을 익힌다면 천상의 진선(眞仙)이라 해도 그와 싸우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치스런 꿈에 불과했고 경칩결(驚蟄決)을 극성으로 익혀도 기껏해야 각종 진령의 극히 일부의 신통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영계 진령 중 위명이 자자한 진룡과 천붕도 열두 변화에 포함되어 있지만 구결이 아직 연화하지 못한 홍운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얼마나 지나야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룡과 천붕의 피가 수중에 있어 화신으로 변화할 수 있었을 텐데.’

    한립은 약간 아쉬웠다. 다만 곤붕 변화는 원래 열두 변화 중 기초였고, 천붕족 대장로였던 홍운이 가장 정통했었다. 그래서 천붕 변신술의 정수를 가볍게 익혀낸 것이다.

    금열이 강력한 힘으로 보조한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 홍운의 의식을 약간이나마 연화해냈고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천붕족 대장로 홍운은 수만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한 천재로 천신만고 끝에 천붕법신의 변신술을 다른 진령들의 변화술로 확장해 경칩결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그가 합체 후기였고 심혈을 기울여 다른 진령의 피를 모았음에도 의식과 육체의 힘이 따라주지 못해 결국에는 온갖 진혈들의 반서를 당해 미쳐 날뛰다 죽은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천붕족 대장로는 미치기 전에 천붕족에 경칩결의 수련 구결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 점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립은 몰랐지만, 당시 홍운이 대장로 직을 맡았을 때 천붕족은 가장 세력이 컸을 때였다. 그는 엄청난 재능과 수행으로 일대를 지배했고 경칩결을 대성해 세상을 놀라게 할 마음으로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족의 다른 장로들조차 홍운이 경칩결이라는 신통을 창조해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다. 결국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경칩결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남긴 사리 속에 그 구결이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하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홍운이 죽기 직전 잠깐이나마 정신이 돌아와 구결을 사리에 남겨 놓아 후사를 도모했던 것이리라.

    한립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왕 경칩결 구결이 그의 손에 들어왔으니 다시 천붕족에 돌려줄 마음은 없었다.

    천붕족 장로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제일 먼저 살인멸구를 해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궁리할 것이 분명했다.

    세세하게 현재 상황을 돌이켜본 한립의 입꼬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이번에 곤붕진혈과 사리를 융합하며 경칩결 외에도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두 번의 강력한 자극을 받아 그의 경지가 특별한 이유 없이 오른 것이다.

    이제 그는 화신 후기의 경지였고 진섬수의 보조가 있으니 앞으로의 수련에도 걸림돌이 없을 것이다.

    천붕족 장로들은 그가 천붕 변신술을 익힌 것에만 놀랐고 수행이 늘어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합체기 존재들이 신경 쓸 만한 변화가 아닌 것인지 아니면 경황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립이 한 손을 뒤집어 비취색 옥병을 꺼내 단약 몇 개를 입에 털어놓고는 눈을 감고 수련을 시작했다.

    후기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지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루가 지나 맑은 정신으로 거처를 떠난 한립은 다시 교역 대전으로 향했다.

    바로 만뢰방 주인과 약속한 날이었다. 청라과가 꼭 필요한 그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무사히 교역대전의 9층 점포에 이른 그는 야윈 중년 사내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찌된 일입니까? 저들은 또 누구고요. 저와 약속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말을 한 사람은 한립이 아니라 얼굴에 흑갑을 입은 체격 좋은 거한이었다.

    점포 안에는 한립 외에도 다른 이들이 셋이나 더 있었다. 야윈 얼굴의 주인장과 화가 잔뜩 난 거한 외에도 유순하게 생긴 청년이 역시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빠르게 훑어 두 인물이 연허 초기의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언제 한 명만 데리고 영수를 굴복시키러 간다고 했습니까? 누구든 원치 않으면 지금이라도 떠나세요. 전혀 막을 생각 없으니까. 허나 빙심정(水心晶), 자광철(紫光鐵) 그리고 청라과는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주인이 눈을 부릅뜨며 코웃음을 쳤다. 청년과 거한이 그 말에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한립은 그저 미간을 좁혔다.

    “알겠습니다. 세 명이 가죠. 하지만 누군가 먼저 영수를 굴복시키면 다음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하, 그건 안심해도 됩니다. 노부는 아예 누구든 홀로 나서기를 원치 않으니까 말입니다. 셋이 함께 뇌전의 신통을 부려야 합니다.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안 그러면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요. 요수를 굴복시키는데 성공만 하면 당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약속대로 전부 지급할 것입니다.”

    청년의 말에 주인장은 냉소하며 말했다.

    물건을 내준다는 말에 거한과 청년의 표정이 풀렸고 더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주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한립에게 돌리며 혀를 찼다.

    “한 형제는 겨우 며칠 못 본 사이에 중계에서 고계로 수행이 올랐군!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야. 아무튼 축하하네! 뇌전의 신통도 더욱 강력해졌을 테니까.”

    “운이 좋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뇌전의 힘은 확실히 이전보다 강해졌습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대충 둘러댔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갑 거한과 청년도 한립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았다.

    “좋습니다. 다들 더 할 말이 없는 듯하니 이제 노부를 따라가시죠. 영수가 있는 곳은 아주 은밀한 곳이라 노부와 함께 가야 합니다.”

    “어 형을 따라가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으나 그 전에 저희에게 물건은 보여주셔야지요?”

    온화한 얼굴의 청년이 눈을 굴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흑갑 거한도 눈을 번쩍 뜨고 동의했다.

    한립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찬성하는 기색이었다.

    “물건을 먼저 확인하고 일을 하겠다! 그러시지요. 물건은 준비되었으니 찬찬히 살펴보세요.”

    이미 예상했던 일인지 주인장은 고민 없이 곧장 답했다. 이전의 인색한 태도와 너무 달라 오히려 말을 꺼낸 청년이 조금 당황했을 정도였다.

    쉬쉬쉭!

    파공음이 세 번 울리고 크기가 다른 목함 세 개가 날아갔다. 이에 청년과 거한이 희색이 만연해 기운을 보내 목함을 끌어왔다.

    한립도 내심 놀랐지만 손을 뻗어 목함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그러자 진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목함 안에는 마치 비취로 만든 것 같은 주먹 크기의 과실이 담겨 있었는데 아래쪽에는 심지어 괴이한 생김새의 붉은 이파리도 붙어 있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며 손끝으로 과실을 건드리려 했다. 흑갑 거한과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주인장이 불쑥 소리쳤다.

    “나라면 목함 속 물건은 만지지 않을 겁니다. 약한 것이지만 금제가 걸려 있어 만일 물건이 상하면 세 분 모두 가산을 전부 털어도 배상하지 못할 테니까요.”

    “어 형, 무슨 뜻입니까? 만져보지 않고 어떻게 진짜인지 알 수 있습니까?”

    거한이 깜짝 놀라 손을 거두고 화를 냈다.

    “눈으로 보고 의식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세 분의 수행이면 7, 8 할 정도는 진위를 가릴 수 있을 텐데요. 정말 목함 속의 물건을 만지고 싶다면 일이 끝난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어차피 실패하면 진짜인지 알아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또한 본 족에서 노부의 체면이 있는데 설마 세 분을 데리고 장난이라도 친단 말입니까.”

    야윈 사내는 상대가 화를 내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믿어드리죠. 저도 어 형께서 스스로 자신의 체면에 먹칠할 거라 여기지는 않습니다.”

    온화한 청년이 목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던져 주었고, 거한도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목함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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