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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39화 (596/2,000)

839화. 청라과(靑羅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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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처에 돌아온 한립은 쭉 그곳에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일찍 교역대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별 탈 없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은 천 장 높이의 절벽에 지어져 있어 산허리 광장에 커다란 문이 있었다. 거대한 문의 양측에 열댓 명의 무장 병사들이 일렬로 서있었는데 그 사이로 천붕족들이 드나들었다.

한립은 멀리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관찰하다 날개를 펄럭여 떨어져 내렸다. 문 앞 병사 한 명이 한립을 훑고는 안색이 달라져 급히 예를 올렸다.

이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자연스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광활한 공간이 나타났다. 문밖과는 딴 세상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측에 전당처럼 생긴 높은 건물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각각이 10층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각 층이 서른 장 높이에 층 사이가 백여 장 떨어져 있어 각각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었다.

수많은 천붕족들이 그 사이를 왔다 갔다 날아다니며 거래를 했는데 한립도 그들을 따라 가까운 2층의 어떤 문으로 들어갔다.

귓가에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그의 시선도 바삐 움직였다. 수백 장 규모의 소형 광장에는 크고 작은 점포들이 사방에 있었고 수백 명의 천붕족들이 점포를 드나들었다.

그리고 광장 중앙에는 열댓 장 높이의 뭔가가 적힌 청석 기둥이 있었고 돌기둥 아래서 열댓 명이 기둥을 쳐다보며 무언가에 대해 논의를 하는 듯했다.

한립은 그 모습이 신기해 조용히 다가갔다.

빼곡하게 문자가 새겨진 돌기둥 표면은 중간에서 둘로 갈려 한쪽은 붉은 색 다른 한쪽은 비취색을 띠었다. 읽어보니 전부 물품의 이름으로 익숙한 것도 있었고 낯선 것도 꽤 많았다.

이 문자들은 나타났다가 곧 사라져서 마치 돌기둥 표면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돌기둥 아래에는 경비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리를 지켰다.

‘이건……?’

한립이 문자와 돌기둥 아래 사내를 보며 의아해했다. 바로 그때 모여 있던 무리의 사내 중 하나가 경비에게 영석 몇 개를 건넸다.

그러자 중년 경비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다란 소매 속에서 짧은 붉은색 몽둥이를 꺼내 영석과 교환했다.

몽둥이를 받은 사내가 그것을 돌기둥 어딘가의 빈자리에 휘둘렀다. 아주 빠른 동작이었지만 명청령안을 일으킨 한립은 확실히 보았다. 몽둥이를 휘두른 순간 몇 개의 붉은 글자가 나타나 돌기둥 속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붉은 글자가 돌기둥 표면에 떠올랐다.

한립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조금 더 기다리자 또 한 명이 나섰다. 이번에는 중년 경비에게 영석을 지불하지 않고 날개를 펄럭여 몇 장 떠오른 다음 돌기둥 표면의 녹색 문자 몇 개를 가리켰다.

파앗.

동시에 문자에서 비취색 빛이 나와 그의 손끝으로 흘러 들어갔고 상대의 몸은 영기의 빛으로 반짝였다. 손을 뻗은 천붕족은 무슨 정보를 얻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손가락을 거두고 문 쪽으로 날아갔다.

아래쪽에 모여 있는 이들은 앞선 두 사람처럼 돌기둥에 무언가를 적어 넣거나 아니면 날아올라 붉은색이나 초록색 문자를 건드렸다.

이를 지켜본 한립은 대충 파악하고는 곧바로 앞으로 나가 돌기둥 하단의 녹색 글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문자에서 비취색 빛이 번뜩이고 그의 뇌리에 정보가 전달되었다.

‘품질 좋은 류광목 판매. 수량 제한 없음. 개당 영석 3만. 4층 5전각 31호!’

입 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이 또 다른 붉은 글자를 가리켰다.

‘봉미금(鳳尾禽) 유골 한 벌 구매. 가격상의. 9층 2전각 10호!’

한립의 표정은 묘했다. 천붕족이 이런 방식으로 물품을 거래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돌기둥 표면의 물건들은 급히 거래를 요하거나 진귀한 것들뿐이었지만 탁월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되면 필요한 사람들이 소식을 알기 쉬워 거래가 이루어질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보아하니 구현하기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라서 인족 시장에서도 적용해 볼만한 방법이었다.

잠시 후 한립은 몇 걸음 물러나 이번엔 녹색 글자들을 위주로 살폈다.

대부분의 물건은 각 종족들마다 부르는 명칭이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진귀한 물품일수록 대부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특히 각 종족들이 중시하는 재료들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것은 비령족 언어를 처음 접하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한립은 묵묵히 돌기둥의 목록을 확인하다 돌연 새롭게 떠오른 글자를 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청라과(靑羅果)! 이런 물건을 판단 말인가!’

한립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며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열망이 떠올랐다. 청라과는 전설 속의 성약 청라단(靑羅丹)의 주재료로 한립이 세상에서 가장 얻고 싶어 하는 영과 중 하나였다.

청라단이 흑염단처럼 화신 후기 수사가 고비를 넘길 확률을 높여주는 역천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고계 수사들 심지어 합체기 이상에게도 흑염단 이상의 가치를 지닌 단약이었다.

이 단약을 복용하면 약간이나마 화신기 수사들이 고비를 넘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사들은 이렇게 활용하지 않고 다른 재료와 배합해 복용했다.

청라단은 약효가 매우 특이해서 대부분의 영약과 완벽하게 융합되었고 약효가 충돌하지 않았다.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다른 성분의 단약과 같이 복용하면 일정한 확률로 다른 단약의 효과를 3할에서 5할 정도 증폭시켜주는 역천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알만 먹으면 10년을 늘려주는 영단을 청라단과 같이 복용하면 13년에서 15년의 수행을 늘려주었다. 게다가 이런 효과는 선단 묘약이라 불리는 몇몇 단약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의 단약에 효과가 있었다.

이러다 보니 인족 수사들은 희귀한 단약을 구할수록 청라단이 간절했다. 안 그래도 굉장한 약효를 더욱 늘릴 수 있다니 누구나 오매불망할 일이었다.

다만 이런 효과가 무작위라 실제로 그 덕을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연달아 3, 4알을 복용 했는데 영단의 효과가 크게 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전 재산을 다 털어 청라단 7, 8알을 구매해 사용했지만 전부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청라단이 일단 세상에 나오면 수많은 수사들이 그것을 구하려 혈안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인족 인근의 청라과가 전부 멸종되다시피 한 이유였다.

애석한 일은 청라과는 5, 6천년이 지나야 숙성이 되고 청라과 나무는 과실을 단 하나만 맺는데 그 마저도 열매를 따면 영성을 잃고 평범한 나무로 돌아갔다.

거대 종파나 세력에서 공을 들여 대량으로 키워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간혹 만황 세계에서 누군가 이 열매를 발견해 청라단이 세상에 나오면 고계 수사들이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물론 대부분 합체 이상의 노괴들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한립은 천연성에서 이런 영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구미가 당겼다. 녹색 액체를 이용해 청라과를 대량 생산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안타까운 일은 청라과 과실 그 자체가 종자이자 영약이라 오래 보전되지 못했다. 천연성처럼 삼경칠지의 온갖 물품이 몰려드는 곳에서도 청라과 종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청라과가 거래된다니 그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한립은 다른 물품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날아올라 돌기둥 표면의 청라과 글자에 손을 댔다. 역시 비취색 빛이 번뜩이고 정보가 전달되었다.

“가격을 상의하자니 조금 성가시겠는데.”

내용을 살펴보고는 그는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라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곧바로 글자가 알려준 곳으로 날아갔다.

전각을 나선 한립은 높게 날아올라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잠시 후 전각 위 숫자를 확인한 그가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이전 전각과 똑같았다. 그저 이곳의 천붕족들은 2, 30명이 전부였다.

조용히 주위를 살핀 한립이 대전의 한쪽 구석에 있는 2층의 중형 점포로 향했다. 1층에는 푸른빛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어 안을 볼 수 없는 대신 문 앞에 ‘만뢰방(萬雷坊)’이라고 적힌 붉은 옥패가 걸려 있었다.

한립은 옥패를 보고 조금 의아했으나 곧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빛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눈앞이 밝아지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나무 탁자와 누런 의자,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있는 선반이 전부였다. 그리고 탁자 옆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와 천붕족 둘이 있었다.

한립은 그들을 조심스레 살펴보더니 얼굴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손님으로 보이는 중년 남녀는 부부 같았는데 주인과 뭔가를 의논하고 있는 듯했다. 둘 중 한 명은 연허 초기, 다른 한 명은 연허 중기의 수행을 지녔다. 심지어 주인은 놀랍게도 연허 후기의 수행을 지닌 존재였다.

‘저런 수행을 지닌 자가 어찌 이런 곳에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단 말인가?’

한립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립이 점포 안으로 들어가자 천붕족 남녀가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잠시 그의 수행과 낯선 외모에 의외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점포 주인은 힐끗 그를 보더니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계속해서 중년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흡령석(吸靈石)을 가져오지 못하신다면 자선목(紫仙木)도 얻지 못하실 겁니다. 고계 영석이야, 내게도 필요한 만큼은 있습니다.”

수척한 얼굴의 주인장의 말투가 아주 대담했다.

“어 형, 흡령석과 자선목을 거래하자니 조건이 너무 까다롭지 않습니까? 그것은 오직 지연(地淵) 심처에서만 자라는데 연허기 수사가 아니라 몇몇 장로 분들도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인이 불평을 했다.

“노부는 그런 것은 모르겠고! 내 자선목을 원하면 흡령석을 가지고 오시던지 아니면 꿈도 꾸지 마십쇼.”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손님 부부도 난색을 표했다. 이후 그들은 어떻게든 다른 조건으로 거래를 성사시키려 했으나 주인은 딱 잘라 거절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중년 부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점포를 떠났다. 그들은 시종일관 한립에게는 말 한 마디 붙이지 않았다.

“녀석아, 여기는 무슨 일이더냐?”

연허기 부부가 대문을 나서자 성가시다는 듯 물었다.

“선배님께서 청라과를 판매하신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청라과? 본 점의 가장 진귀한 물품 중 하나이지. 겨우 비령장인 네가 거래하지 못할 물건이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썩 나가거라.”

주인이 한립의 말에 멈칫하다 그를 자세히 살피고 콧방귀를 뀌었다.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거래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찌 아십니까?”

“홍, 꼭 쓴맛을 봐야겠느냐?”

마른 중년인이 화를 버럭 내며 등 뒤로 날개를 폈고 한립이 있는 방향으로 펄럭였다.

펑.

둔탁한 울림이 들리고 무형의 거대한 압력이 한립에게 날아들어 공기가 다 윙윙거렸다. 그러나 한립은 눈꼬리를 끌어올리며 피하지 않고 한 손을 들어 검처럼 가볍게 그었다.

쿠콰쾅.

금빛이 번뜩이고 거대한 압력이 둘로 갈라져 한립을 피해 양쪽으로 흩어졌다.

“흠? 의욕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실력도 제법이구나.”

“이제 선배님과 거래할 자격은 있겠습니까?”

“그래, 대충 그렇다고 치자. 허나 청라과를 얻어가려는 것은 허튼 바람일 것이야.”

“무엇으로 거래할 수 있을지 알려주셔야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드릴 것 아닙니까?”

주인이 차분해지자 한립이 웃는 듯 마는 듯한 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자신이 넘친다니, 어차피 다른 손님도 없으니 말해주마! 청라과가 얼마나 진귀한 물건인지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야. 세 가지 선택지를 주지. 이 중 어느 것이라도 만족시킨다면 청라과는 네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인이 한결 너그러운 어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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