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38화 (595/2,000)

838화. 대장로

*

할 말을 잃은 한립이 한참 만에 다시 물었다.

“봉령탑에 봉인된 것은 무엇이며 성자와 곤붕진혈은 또 무엇입니까?”

“봉령탑에는 본족이 가장 융성했을 때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찾아낸 곤붕진성(鲲鵬眞聖)의 혼백 절반이 봉인되어 있다. 그 성스러운 혼백의 힘에 기대 우리 천붕족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성자(聖子)의 경우는 간단하다. 비령족들이 각 종족의 진성의 피를 계승할 족인들을 부리는 통칭이야. 성자가 각 종족의 진성의 피를 계승한 후 시험을 통과하면 일족의 성주(聖主)가 될 수 있다.”

소녀가 일일이 성의껏 설명했다. 이번에는 한립이 예상한 대로였다. 심지어 성주가 무엇인지 물을 필요도 없어서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른 질문은 없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내 차례겠지? 등 뒤의 날개는 어떤 보물이며, 어떤 곤붕의 물건을 연화시켰기에 성령이 봉령탑의 봉인을 빠져나오려 한 것이냐? 탑을 세운 후 이런 일은 극히 드물어서 말이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손상된 곤붕의 깃털 하나를 제련하여 섞었을 뿐입니다.”

“곤붕의 깃털을? 그럴 리가. 온전한 곤붕의 깃털이라고 해도 성령이 이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몰랐기에 한립도 고개만 저었다.

“……날개 보물을 보여 보거라!”

한립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녀의 유리알 같은 눈을 마주치자 어쩔 수 없이 어깨를 털었다. 그러자 등 뒤로 하안 날개가 나타났다 소리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는 손에 수정 같은 작은 날개 한 쌍이 들려 있었다. 한립은 손을 뻗어 그것을 건넸다. 한립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천붕족 대장로는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다 날개를 받았다. 한립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작 완벽하게 풍뢰시 연화를 마치지 않았다면 절대 이렇게 귀한 보물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강력한 의식을 남겨 놓아 6, 7할의 영력으로 보물의 공간신통을 활용해 순식간에 다시 소환할 수 있었다.

소녀가 풍뢰시를 들고 찬찬히 살피다 잠시 후 묘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가볍게 손짓해 날개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한립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풍뢰시가 하얀빛을 반짝이며 사라졌다가 다시 그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것을 본 소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곤붕진성의 깃털뿐만 아니라 천붕의 깃털까지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구나. 대충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곤붕의 깃털은 어찌 얻은 것이더냐?”

의외의 질문이었지만 숨길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인계에서 곤붕과 라후가 차원을 넘나들며 전투를 벌였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소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그가 어안이 벙벙해질 만한 말을 했다.

“한 수사, 우리 천붕족에 들어와 본족의 성자가 될 생각이 있는가?”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선배님께서는 제가 귀 족에 들어오기를 바라신단 말입니까?”

“그래, 그랬으면 싶은데? 물론 사안이 중대한 만큼 다른 장로들과 상의를 해보아야겠지만 말이야.”

“저는 인족입니다. 천붕족이 아니고요.”

“수사가 잘 모르는 것이 있네. 보통 곤붕의 깃털이나 다른 곤붕의 물품들은 전부 죽은 곤붕에게서 얻은 것이지. 그런데 한 수사가 지닌 곤붕의 깃털은 멀쩡히 살아있는 곤붕 진성의 몸에서 떨어진 것이야! 그 기운이 평범한 깃털의 몇 배는 되지. 게다가 자네는 모르겠지만 깃털에 약간의 정혈(精血)이 함유된 것이 느껴지네. 본디 천붕족은 곤붕진왕(鲲鵬眞王)의 후인들을 일컫는 것이니 곤붕의 깃털을 몸에 연화해 이미 약간의 곤붕의 피를 지니고 있는 자네도 어찌 보면 천붕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소녀가 유유히 하는 말에 한립이 눈을 부릅떴다. 잠시 후 평정을 되찾은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녀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천붕족 성주가 이미 사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귀 족은 현재 곤붕진혈을 계승할 인물이 없어 곧 비령족 72개 지파에서 쫓겨날 지경에 처해 있고요. 제 말이 맞습니까?”

“그것을 어찌 알았더냐!”

드디어 소녀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고 등 뒤로 금색의 커다란 붕새 허상이 떠올랐다.

퍼퍽!

허상이 날개를 펼쳤을 뿐인데 한립의 어깨에 거대한 압력이 쏟아져 전신에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두 다리가 청석 지반에 반 척 정도 가라앉았을 정도였다.

이에 한립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때 소녀가 인상을 펴자 커다란 붕새의 환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잠시 비밀로 해주게. 수사도 본 성이 혼란스러워지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곤붕진혈을 계승할 곤붕성자를 둘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네. 문제는 그 둘의 수행이 낮아 계승에 성공한다 해도 시련에 통과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한 수사를 본 족에 영입하려고 하는 것이야.”

별안간 소녀의 표정이 이전처럼 유유자적하게 돌아왔다.

“대장로님의 말씀은 두 성자 분들을 지켜달라는 뜻입니까?”

한립은 대장로의 말뜻을 알아듣고 웃음을 머금었다.

“바로 그게 내가 의도한 것이네. 수사가 천붕족에 들어올 자격은 된다지만 어찌 되었든 인족이니 시련을 통과한다고 해도 본 족의 성주가 될 수는 없지. 하지만 곤붕성자의 신분으로 다른 두 성자들을 도와 시련을 무사히 치르게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지불할 것이네. 곤붕진혈 약간과 큰 보상을 내리도록 하지!”

“…….”

소녀는 부인하지 않고 차분히 원하는 바를 말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이라니 당장 수락할 만도 하건만 한립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소녀도 그를 재촉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조용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일다경이 지났을 때 한립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 성자들을 위해 저 같은 외부인을 귀 족에 들일 결심을 하신 것은 그만큼 시련이 위험하다는 뜻이겠지요. 그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시련(試鍊)은 굉장히 위험하네. 일반적으로 참가하는 각 종족의 성자들 중 사망자가 대략 6, 7할은 되니까 말이야. 또한 보통 성자들은 비령장(飛靈將)으로 인족의 화신급 존재와 비슷한데, 이번에 본 족의 성주께서 뜻밖의 사고를 당하시는 바람에 이번에 참가할 성자들은 초계 비령장의 실력을 지녔을 뿐이라네. 그대로 시련에 참가했다가는 십중팔구 통과하지 못할 테지! 내 비록 수사의 신통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인족 영역에서 홀로 풍원대륙 태반을 지나 이곳까지 올 실력이면 약하지는 않겠지. 시련 내용이 위험하기는 해도 수사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야.”

“다른 이들은 전부 비령장급이라는 것입니까?”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신중하게 확인했다.

“본 장로가 허언을 하겠는가? 안심하시게.”

“고려해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사안이니 그래야겠지! 이렇게 하지. 3일의 시간을 주겠네. 사흘 후, 이곳에서 자네의 대답을 기다리도록 하지. 그동안 성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해도 좋네. 아, 나는 금열이라 불리니 기억해 두게.”

소녀는 한립의 대답을 예상했는지 너그럽게 허락했다. 이에 한립은 감사 인사를 하고 즉시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금열이 미소를 머금고 탁자에서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대장로님, 저 자를 이렇게 보내도 되겠습니까?”

벽 한쪽에서 회색빛이 반짝이며 천붕족 남녀 두 명이 나타났다.

“그럼 내가 저 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금열이 붉은 수염 노인을 힐끗 보고 물었다.

“저 날개에 곤붕의 깃털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족인에게 성자를 사칭하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빼앗아 또 다른 이를 선발해 곤붕의 피를 계승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으면 내가 굳이 저 이족인과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눴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죽여 날개를 빼앗아 왔겠지요.”

“대장로님의 말씀은…….”

아담한 체구의 부인은 노인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대장로의 의중을 물었다.

“인족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천붕족은 없을 겁니다. 인족은 우리 비령족들과는 달라요. 그들 본연의 실력은 평범하지만 엄청난 위력의 신통과 수많은 보물들을 지니고 있지요. 그들은 보물을 오랜 세월 제련해 완전히 연화시킵니다. 강제로 빼앗을 수도 있지만 원주인의 흔적을 단시간 내로 지우기도 어렵고, 보물의 위력도 훨씬 떨어집니다. 저 자의 날개를 확인해보니 바로 그런 류의 보물이더군요.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성자들의 지연시련(地淵試鍊)이 곧 시작된다고 합니다. 보물을 빼앗아 다른 이가 제련할 동안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금열이 곰곰이 생각하다 몇 마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것이었군요. 하지만 곤붕의 피가 바깥으로 유출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서 장로, 정신 차리세요. 본 족 성자들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해 비령족에서 쫓겨나는 것과 진성의 피를 조금 내주는 것 중 무엇이 더 심각한 일입니까? 또한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할 방책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붉은 노인의 말에 소녀가 눈을 빛냈다.

“하하, 대장로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겨우 비령장급 이족인이야 이번 위기만 넘기면 죽이든 살리든 저희 뜻대로 되겠지요.”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죽여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이족인이라 하나 일단 곤붕진혈을 융합하면 절반은 본 족인이라 할 수 있어요. 똑같이 ‘천붕의 서약’의 제한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본 족의 위기를 넘기게 도와준 은인에게 불필요한 위해를 가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 성을 떠나지만 못하게 하면 될 일입니다.”

금열이 냉랭히 여인을 쳐다보며 감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그럼 수사들을 파견해 이족인의 뒤를 감시하라 할까요? 며칠 사이 달아나면 어찌합니까?”

“서 장로 불필요한 근심입니다. 날개에 손을 써두었으니 본 성을 떠나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저희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대장로님께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신 것을요.”

대장로의 말에 미부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닙니다. 본 족 5대 장로 중 우리 셋 만이 남아 있으니 당연히 함께 상의해야지요. 이 일은 본 족의 존망이 걸린 일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두 장로에게 소식을 전해 돌아오라 이르지도 않았을 테지요. 두 분은 이 일에 또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금열이 두 사람을 응시했다.

“없습니다.”

“대장로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미부인과 노인이 단번에 동의했다. 세 천붕족 장로들은 시종일관 한립이 거절할 경우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겨우 화신급 이족이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 거라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소녀와 있던 곳에서 수백 리를 벗어난 한립은 날개를 펄럭이며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평하게 주변 건물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까 고민 중이었다.

이번에 얼떨결에 정체가 탄로 나는 바람에 처지가 곤란해졌다. 이전의 풍부한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금열의 요구를 들어주든 그렇지 않든 결말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절하고 떠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의식으로 등 뒤의 풍뢰시를 훑은 한립은 쓴웃음이 절로 났다. 천붕족 대장로는 일부러 티 나게 날개에 표식을 심어 놓았다. 일정 구역 내에서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이었다.

그의 수행에 강제로 표식을 지우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며칠은 걸릴 텐데, 그동안 대장로가 그를 죽여도 골백 번은 더 죽일 수 있다.

보아하니 유일한 방법은 절묘한 조건을 내거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목숨을 걸고 달아나는 일이 있더라도 성자 따위는 절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조건을 걸지는 일단 천붕족의 상황을 파악한 후에 숙고해 봐야겠어.’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위기를 겪어 진퇴양난의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립은 서서히 날아가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남은 시간 동안 그는 성성의 장서각과 비슷한 건물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새워 장서를 읽고는 피곤한 얼굴로 거처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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