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7화. 천붕성자(天鵬聖子)와 곤붕진혈(鯤鵬眞血)
*
‘흑명무’
머릿속에 번뜩하고 익숙한 단어가 떠올랐다. 탑의 표면에 흐르는 검은 안개는 그가 거주하던 반도에서 보았던 괴이한 안개와 똑같았다.
그저 이번에는 조금 기운이 희박하고 엄중하게 갇혀 있을 뿐이었다.
한립은 의아했지만 천붕족들이 엄히 금하는 곳이었기에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
다른 이들처럼 그곳을 피해 빙글 돌아 지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립이 거탑 수백 장 밖에서 둔광을 꺾는데 탑 안에서 소름끼치는 기운이 폭발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한립은 등줄기가 서늘해져 우뚝 멈추었다.
‘이게 무슨……!’
둔광을 멈춘 그가 고개를 돌려 거탑을 바라보았다.
멀리 거탑에서 희미하던 흑명무가 먹처럼 농밀해져 있었다. 표면의 주술문자들이 번뜩였지만 검은 기운을 막기에는 힘이 부치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탑 꼭대기에서 발산된 일곱 빛깔의 빛이 여전히 검은 기운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잠시 후 검은 안개가 일곱 빛깔의 장막을 가득 채워 빛의 장막이 부들부들 진동하며 언제라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인근을 지나던 천붕족들이 깜짝 놀라 멈춰 서서 봉령탑의 변화를 관찰했다.
한립은 자신의 날개가 돌연 극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고 등 부위가 타는 것처럼 아파왔다.
‘…….’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바로 그때 극히 고조된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주변의 천붕족들이 눈을 감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한립은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불편해졌고 등 뒤의 날개가 돌연 효력을 잃고 신형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풍뢰시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몸을 띄우고서야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몸에서 푸른빛을 불러낸 그가 경악한 눈으로 거탑을 바라보았다.
쿵!
굉음이 울리고 거탑 꼭대기의 수정 돌들이 빛을 발산하며 일곱 빛깔의 장막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거기다 난해한 주술들이 탑에서 울려 마치 백여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주술을 읊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추락하던 천붕족들이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일곱 빛깔 보호막에 감싸여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탑에서 곧바로 스산한 울음소리가 뒤따르고 검은 기운이 요동치며 수백 장 크기의 거대 새의 환영이 나타났다. 환영은 전신이 새까맣고 두 날개를 펼쳐 거탑의 아래쪽을 휘감았다.
거대 새가 길게 울자 검은 안개가 몇 배로 치솟아 일곱 빛깔 기운을 엄청난 기세로 밀어붙였다. 이를 보고 천붕족들은 부들부들 떨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한립도 그들처럼 달아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거대한 새의 환영이 나타난 순간 등 뒤의 날개가 떨리며 푸른 거대 새의 환영이 나타나 맑은 소리로 길게 울부짖었다. 마치 검은 새와 서로 호응하는 것 같았다.
한립은 주변 공기가 수축되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
‘뭐야?’
크게 놀란 한립이 금빛을 발산해 강력한 힘으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변 공기가 강철로 변한 것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는데 거탑의 주술 소리가 일순간 달라지며 희미하게 바람이 불고 천둥이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기괴한 주술 문자들이 흩날려 검은 새 환영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동시에 거탑 꼭대기의 거대 수정 돌 하나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일곱 빛깔 기운이 일곱 개의 태양처럼 떠올라 엄청난 빛을 폭발적으로 발산했고 검은 거대 새 환영은 주술 문자와 일곱 빛깔 기운의 이중 제약을 받으며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같은 시각, 멀리 한립의 등 뒤에서도 푸른 거대 새의 환영이 저절로 사라졌다.
주변이 다시 안정을 찾아가고 한립도 자유를 찾았지만 가슴이 떨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크기만 달랐지 석탑에 나타난 환영과 등 뒤의 푸른 새 그림자가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설 속의 곤붕 모양이라는 것인데 설마 저 봉령탑 안에 곤붕이 봉인되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머릿속에 달아날 방법을 백 가지 넘게 떠올리며 자리를 뜨려다 전방을 둘러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거탑 안에서 이미 열댓 개의 영기의 빛이 날아와 그와 멀지 않은 거리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빛덩이 속의 천붕족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는 없는 거리였기에 괜히 달아나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고 일단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한 다음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가장 선두에 선 이는 화신 후기였고 나머지는 화신 초, 중기였다. 한립은 가만히 서서 그들이 다가오기 만을 기다렸다.
쉬쉬쉭!
파공음이 들리고 십여 명이 날개를 펄럭이며 한립을 포위했다. 열댓 명의 시선이 오로지 한립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하얀 날개를 다른 하나는 금빛 날개를 달고 있었다. 각각 자비로운 얼굴과 엄한 표정을 하고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주시했다.
딱히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한립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저를 에워싸신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귀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성에 진입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분 같습니다.”
그의 예상과 달리 새하얀 날개의 노인이 굉장히 공손하게 물었다.
“저는 한 가로 바다 멀리서 수련하다 오늘에야 처음 본 성에 들어왔습니다.”
“해외에서 오늘 오셨다고요?”
그의 대답에 두 노인이 멍해지더니 만면에 희색을 드러냈다.
“반가운 일입니다. 한 형의 출신은 모르겠으나 탑의 곤붕(鯤鵬)의 영(靈)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천붕의 기운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본 족 성자의 칭호와 곤붕진혈을 계승할 자격을 갖춘 것이지요!”
또 다른 노인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곤붕진혈!’
한립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전에는 그게 뭔지 잘 몰랐겠지만 저물탁에 진룡과 천붕의 진혈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그 진귀함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런데 그것을 준다니 호박이 넝쿨 째 떨어진 격이었다. 하지만 한립은 걱정이 먼저 앞섰다.
그는 진짜 천붕족도 아닌데 소위 성자라는 것이 되려면 엄중한 절차를 거쳐야 할 것 아닌가. 곤붕진혈을 계승받기 전에 신분이 폭로되면 천붕족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다.
“잘못 아셨겠지요. 저는 아주 평범한 출신으로 무슨 진혈을 계승할 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탑의 이상도 제가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고요.”
한립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부인하실 것 없습니다. 탑에서 진령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을 모두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저희와 어서 장로님들을 뵈러 가시지요.”
금색 날개 노인이 한립의 말을 믿지 않고 빙긋 웃었다. 한립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했지만 다들 흥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는 정말 무슨 성자가 아닙니다.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급해진 한립이 서둘러 인사를 하고 신형이 모호해져 천붕족들의 포위를 빠져나갔다. 그가 날개가 펄럭이고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리려는데 귓가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다리거라, 이족인! 이곳이 오고 싶다고 오고,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더냐? 가려거든 천붕족의 날개를 두고 가거라.”
온화한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한립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난색을 표하고 있는 한립의 머리 위에 파문이 일더니 호리호리한 신영이 나타났다.
금색 날개가 달린 하얀 장포의 소녀였다.
한립은 신중히 그녀를 살피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평범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과 달리 신비로운 빛이 감돌며 도저히 수행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뜻 밖에도 소녀는 합체 중기 이상의 존재가 분명했다.
“대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천붕족들이 소녀를 보고 공손히 대례를 올렸다. 달아나려다 잡힌 한립은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자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희는 바로 돌아가 탑의 금제를 안정시키거라. 곤붕성령(鲲鵬聖靈)을 다시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하다.”
소녀가 차분히 분부했다.
“존명!”
천붕족 내에서 그녀의 위엄이 대단한지 다들 주저하지 않고 바로 탑으로 날아갔다. 이제야 그녀의 눈길이 한립에게 닿았다.
“이곳은 대화를 나눌만한 곳이 아니니 나를 따라 오거라.”
소녀가 맑은 눈을 빛내고 뜻밖에도 담담히 말했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어두운 얼굴로 서서히 날아가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합체 중기 이상의 존재와 이종족 본성 안에서 마주쳤는데 도망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태도로 보아 당장 그를 죽이지는 않을 것 같으니 일단 명을 따르는 게 옳았다.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속도는 엄청났다. 이에 한립은 거의 7, 8할의 영력을 끌어올려 겨우 그 뒤를 따랐고 어떻게든 틈을 보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 * *
한식경 후, 소녀는 한립을 데리고 수십 장 높이의 원추형 건물 앞에 도착했다.
“대장로님을 뵙습니다.”
입구에 있던 천붕족 소녀들이 예를 취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한립도 따라 들어갔다. 하지만 건물 안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돌로 만든 의자와 탁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가 손을 저어 그곳에 있던 시녀들을 물리고는 먼저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앉지. 몇 가지 물을 것이 있다.”
“선배님과 어찌 동석을 하겠습니까. 어떤 것이든 물어보시지요.”
“편할 대로. 너는 인족의 수사겠지?”
뜸을 들이던 소녀가 한립이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인족에 다녀가신 적이 있으신지요?”
한립의 어조가 조심스러웠다.
“당연히 가본 적이 있다. 심지어 귀 족의 1대 삼황 중 영황(靈皇)을 방문한 일도 있었지. 괴뢰비술이 절묘한 경지에 이르러 감탄을 금치 못 했었다. 나뿐 아니라 비령족의 몇몇 강대한 이들도 인족 영역을 가본 일이 있다. 그때의 정을 생각해 너에게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볼 기회를 주마! 내가 아는 한 대답을 해줄 것이다. 물론 내가 묻는 말에도 실망시키지 않아야겠지만.”
소녀는 능숙하게 인족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한립은 위협이 가미된 상대의 언사에 잠깐 멈칫하다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선배님께서는 제 신분을 어찌 알아보신 것입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저의 풍뢰시는 완전히 제련되어 있고 비술을 이용해 기운도 이족의 것과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선배님과 같은 존재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겠지요.”
한립이 소녀를 주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너의 술법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심지어 본성의 보호 대진(大陣)마저 곤붕의 기운으로 속여 넘겼으니 말이야. 다른 장로들 역시 직접 검사하지 않고는 너의 진정한 신분을 간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나는 대장로로 전문적으로 본족의 성물(聖物)을 관장한다. 천붕족의 성물은 일체의 변신술과 환술을 꿰뚫고 목표의 진원(眞元)을 보게 하는 신통을 지녔거든.”
소녀가 가볍게 웃으며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한립은 이해가 가면서도 굉장히 울적해졌다.
“그렇다면 제가 만일 귀 종족이 아니라 다른 종족의 근거지에 들어갔다면 들키지 않았겠군요.”
“비령족 72개의 성물 중 유수족(幽水族) 성물도 유사한 신통을 지니고 있다.”
소녀가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 나머지 70개 종족은 아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