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화. 적융족을 쫓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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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융족의 공격에 한립은 어떤 보물도 꺼내지 않고 날개만 펄럭여 한 줄기 반짝이는 실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천명이 변한 불새는 가슴이 철렁해 즉시 입을 벌려 보라색 화염을 분출해 주변 십여 장을 불살랐다. 만일 한립이 주변으로 순간이동을 한다면 불길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한립은 하얀빛을 번뜩이며 쌍수 괴조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괴조는 방대한 몸을 지니고도 반응이 기가 막히게 빨랐다. 한립이 나타난 순간 교룡 머리가 고개를 돌려 남색 빛기둥을 토해낸 것이다. 빛기둥은 목표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츠츳 거리는 소리를 내며 얇은 얼음막을 만들어냈다.
남색 빛기둥은 뜻밖에도 극한의 성질을 지녔는데 한립이 이전에 지녔던 건람빙염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립은 피하지 않고 소매를 펄럭여 회색 기운을 분출했다.
남색 빛기둥이 회색 기운에 닿자마자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 그 틈에 한립은 다른 쪽 소매에서 새하얀 손을 움직여 다섯 가지 빛깔의 한염을 번뜩였다.
오랜 세월의 수련을 통해 한립은 두 손의 백맥련보결을 대성했다. 아무렇게나 손을 펴도 즉시 원자신산과 오자동심마의 위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었고, 심지어 본신의 수행으로 그 위력을 증가할 수도 있었다.
그의 수행이 늘어날수록 두 손의 위력도 증가하는 셈이었다.
남색 빛기둥이 조금 느리게 원자신광을 통과해 손바닥에 닿았다. 그러나 손바닥에 어린 오색 한염 때문에 남색 빛기둥이 흡수되어 전혀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크앙!
거대 괴조가 그것을 보고 주저 없이 투명한 음파를 분출했다. 그러나 이를 본 한립은 전신에서 금빛을 뿜어내며 영기의 빛으로 몸을 감싸고 그대로 음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쿠콰쾅!
금빛에 음파가 힘없이 깨져나갔다. 한립은 음파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몇 번 번뜩이다 거대 괴조 앞에 이르러 두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대 괴조도 겁먹지 않고 몸을 틀어 힘차게 발톱을 휘둘렀다. 이에 한립은 한쪽 주먹으로는 회색빛을 다른 쪽 주먹으로는 오색 화염을 반짝이며 거대한 발톱을 가격했다.
콱! 콰직!
괴조가 귀를 찌를 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공격을 가하던 발톱 한쪽이 기이한 빛 속에서 갈라져 핏덩이가 되어 버렸다. 잠시 후 빛이 번뜩이고 무표정한 얼굴의 한립이 나타났다.
쌍수 괴조는 사나운 눈빛으로 망가진 한쪽 발톱은 신경 쓰지 않고 두 머리를 돌려 거대한 입으로 한립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때 천명과 다른 적융족들도 공격을 가해 보라색 화염과 무수히 많은 불덩이들이 날아들었다.
불덩이들은 도중에 하나로 합쳐져 백여 장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불새들은 분분히 불바다로 뛰어들어 행적을 감추었다.
불바다는 십여 장 높이의 파도를 만들어내며 한립을 덮쳤다.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당할 한립이 아니었다. 그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자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이 나타났고 그중 두 팔이 모호해지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 괴조 위로 금빛이 번뜩이며 거대한 두 팔이 나타나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퍽!
피할 틈도 없이 날아든 금색 주먹에 거대 괴조가 비틀거렸다. 이어 한립은 불바다 쪽으로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검은 산이 나타나 빙글빙글 돌며 불바다를 끌어당겼다.
쿠르릉 콰릉!
불바다와 회색 기운이 섞여 일순 교전했다.
원자신광이 오행지력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있다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다수의 적융족들이 쏘아 보낸 화염 공격이 융합되었기에 일단은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한립의 목표는 불바다가 아니었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자 등 뒤에 금색 법상에서 나머지 네 개의 팔도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 괴조를 둘러싸고 네 개의 금색 팔뚝이 나타났다.
금색 팔뚝은 허공을 가르듯 괴이하게 움직였고 팔은 마치 그림자처럼 자유롭게 꺾여 거대 괴조의 두 목을 틀어 쥐려했다. 그러자 거대 괴조가 대경실색해 피하려는데 두 날개가 거대한 산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머지 두개의 금색 팔이 이미 날개를 하나씩 붙들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거대 괴조가 다른 신통을 써서 달아나려는데 목에 붙은 금색 팔에 힘이 가해지며 순간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뿌득.
튼튼한 몸을 지닌 괴조의 육체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고 두 목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비틀어져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한립은 두 손의 수결을 거두었고 등 뒤의 삼두육비도 소실되었다.
괴조의 두 머리와 몸뚱이가 힘없이 추락했다. 이에 눈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은 즉시 소매를 털어 세 개의 은빛 불덩이를 두 머리와 몸통을 향해 쏘아 보냈다.
촤록 촤르륵 촤륵
은색 화염은 떨어지는 괴조의 잔해를 재를 만들고 다시 뭉쳐져 은색 불새로 변해 돌아왔다.
“어서 돌아갑시다!”
한립이 순식간에 거대 괴조를 죽이는 것을 본 천명이 불바다 속에서 소리쳤다. 이에 파공음이 들리고 여덟아홉 개의 불새가 화염 속에서 튀어나와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천명! 이제 와서 돌아가겠다니 조금 늦은 것 같지 않소?”
갑자기 고공에서 천붕족 사내의 목소리가 울리고 은빛 뇌전이 번뜩이며 은색 불새 세 마리가 나타났다.
뜻밖의 구원자에 줄곧 숨어 있던 천붕족들이었다.
꽈광!
무수히 많은 은색 뇌전이 순식간에 거대한 뇌전 그물을 펼쳤다.
휘이이익!
천명이 변한 불새가 소리를 내지르자 그를 중심으로 다른 불새들이 모여 수십 장 크기의 초대형 불새가 되었다. 전신에 보라색 불길이 타오르는 초대형 불새는 두 날개를 펴고 단숨에 뇌전 그물을 뚫고 날아갔다.
은색 거대 새들은 흠칫 놀라 더는 그들을 막지 못했다.
보라색 불새는 몇 번 번뜩인 끝에 곤마망의 범위를 벗어나 백여 장 밖에 나타났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놀라울 정도였다.
한립은 가만히 허공에 떠서 지켜볼 뿐 그들을 쫓지 않았고, 은색 거대 새도 머뭇거리다 추격을 포기했다. 이어 그들은 은빛 뇌전을 번뜩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바다 밖에서 폐관 수련을 하시다 오신 족인(族人)이십니까?”
우두머리 격인 천붕족 사내가 적융족들을 혼쭐내준 한립을 보고 멀리서 포권을 했다.
“천붕족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저는 조금 특수한 출신으로 줄곧 홀로 바다 밖에서 수련해왔습니다. 풍원대륙에 돌아온 것도 처음이지요. 그러나 외모로 보니 당신들과 꽤 비슷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융족들을 쫓아 보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한립이 겉으로는 담담하게 답했다.
“하하, 헛갈려 하실 것 없을 듯합니다. 귀하께서는 분명 저희 천붕족의 후인이 맞으실 테니까요. 외양은 몰라도 몸에서 느껴지는 천붕의 기운은 절대 꾸며낼 수 없지요. 게다가 그렇게 짙은 기운이라니, 직계 후손일 가능성도 크겠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말벌들이 귀하만 쫓을 까닭이 없었겠지요.”
풍소라 불린 천붕족이 빙긋 웃었다.
“바다 밖에서 홀로 수련하셨다면 당연히 부리는 신통도 저희와는 다르겠습니다.”
아름다운 용모의 천붕족 여인도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말을 걸었다.
“그렇겠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천붕의 기운만은 진짜입니다. 오광족(五光族) 등 몇몇 비령족들이 비슷한 용모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기운 때문이니까요.”
젊은 천붕족 사내도 웃음을 머금고 거들었다.
한립은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보아하니 곤붕의 깃털이 확실히 그의 신분을 위장해 주는 것 같았다. 괜히 힘만 뺀 것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여러분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는 아마 천붕족이 맞나 봅니다. 그런데 조금 전 적융족들의 말을 들으니 요즘 천붕족이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건 알 수 없지요. 천명, 그 간사한 놈이 거짓으로 저희 사기를 떨어트리려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사실 저희 천붕족이 비령족 72개 종족 중 가장 약소한 축에 든다 해도 이렇게 대놓고 관할지에 침입해 강도짓을 할 리는 없기는 합니다.”
한립의 말에 풍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서둘러 족 내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적융족들이 이번에 습격했다는 것은 언제든 다시 습격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귀하께서는 실력이 강하시니 가는 동안 저희에게 힘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한립이 천붕족이라는 판단이 서자 풍소는 더는 경계하지 않고 도움을 청했다. 다른 두 천붕족들도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립이 함께해 준다면 앞으로의 여정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좋습니다. 제가 십중팔구 천붕족이라 하시니, 본 족을 위해 어느 정도 힘을 보태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잠시 침음하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붕족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형! 돌아가는 대로 장로님들께 오늘의 공로를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풍소가 크게 기뻐하며 감사를 표하자 다른 두 천붕족도 좋아했다. 그러나 한립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신 주변의 남색 그물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니 어서 벗어나시죠. 곤마망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그물을 가리키자 은색 불새가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가 화염으로 변했다.
촤륵.
은색 화염이 남색 그물에 닿자마자 커다란 구멍이 뚫리더니 불길이 그물을 타고 퍼져나갔다. 곧 거대한 남색 그물이 순식간에 재로 변해 흩날렸다.
천붕족 셋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됐습니다. 출발하시죠!”
곤마망이 재가 되자 한립은 수결을 맺어 은색 화염을 소매 속으로 불러 들였다. 이제 그들은 네 명이 되어 먼 하늘 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립이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어서인지 천붕족 셋도 거대 새로 변하지 않고 은색 광채에 휩싸여 나아갔다.
한립은 비령인들의 변신술에 관심이 갔으나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바다 밖에서 홀로 수련해 왔다는 핑계를 대며 주변 비령족들과 천붕족에 관련한 정보만을 수집했다.
이에 풍소 등 천붕족들도 숨김없이 대답해주었다. 이렇게 한립은 비령족과 천붕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천붕족 젊은 남녀가 오누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오라버니 쪽이 백뢰, 누이 쪽이 백응이었다.
당연히 천붕족들도 한립에게 이런 저런 일을 물어왔지만 그는 줄곧 수련하느라 다른 인물들과 친분을 쌓은 적이 없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한립이 자신에 대해 밝히기를 꺼려하자 풍소 등도 눈치 있게 캐묻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가 천붕족이라는 것만으로 족했던 것이다.
이어 풍소는 한립과 함께 초원과 몇몇 삼림 지대를 지나 끝없이 펼쳐진 커다란 산맥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그동안 적융족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가끔 저계 천붕족들만 마주쳤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도 족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덕에 풍소 등은 조급해하면서도 남몰래 안심하기도 했다. 적융족이 거짓말을 했거나 천붕족 고위층이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 놓은 듯했는데 어찌 되었든 천붕족이 동요하지 않고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선 다행이었다.
산맥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천붕족들과 더 많이 마주쳤다. 대부분 거대 새의 형태로 비행했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유유자적 지나는 이들도 상당했다.
한립이 주의 깊게 지켜본 결과 천붕족들은 날개 모양은 유사했지만 색깔에서 차이가 있었다.
푸른색과 하얀색을 지닌 이들이 가장 많았고, 풍소 등과 같이 은색 날개를 가진 이들이 그다음으로 많았다.
그밖에 금색과 검은색 날개도 있었지만 극히 적었고, 그들을 마주쳤을 때의 풍소 일행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딱 한 번 금색 날개를 지닌 천붕족을 만났을 때는 그들보다 수행이 떨어졌음에도 먼저 다가가 공손히 예를 올렸지만, 검은 날개를 지닌 천붕족 두 명을 마주쳤을 때는 무뚝뚝하게 지나쳤다. 그들이 풍소 일행보다 수행이 낮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한립은 이런 사실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분명 천붕족 내부의 사정과 긴밀한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해 캐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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