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3화. 천붕족
*
5년 후, 한립은 금수정충이 토해낸 금수를 온몸에 발라 피부에 입혔고 금모산호사를 다른 약재와 배합해 즙으로 만들어 혀와 살에 녹여 체내에 흡수시켰다.
그렇게 금수정충 다섯 쌍이 사라지고 검은 호리병 세 개를 가득 채웠던 금모산호사도 떨어졌다. 그러나 한립은 아직도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분명 금수정충과 금모산호사 덕에 훨씬 몸이 강해졌는데, 이번에도 고비를 넘어서는데 실패했구나. 아직 때가 아니란 말인가.”
그가 탄식하며 울적한 마음으로 눈을 감으려는데 밀실 벽에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두 번째 원영이 흘러들어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
“깜빡 잊을 뻔했구나. 천붕족들이 곧 섬에 올 텐데 말이야. 어디 이종족 구경이나 해볼까?”
두 번째 원영의 말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밀실을 나섰다.
그동안 그는 두 번째 원영을 이용해 네 마리 요물들을 감시하게 했다. 그러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천붕족 사자들이 곧 섬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보광존자를 곧바로 죽인 것이 약간 후회가 되었다. 8급 화형기 요수면 주변 해역에 대해 아는 바가 많았을 텐데 추혼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추혼술을 쓴 금색 어류 요수는 주변 해역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는 바도 별로 없었다. 그저 이 주변 해역이 적마해(赤魔海)라는 것과 한립이 머무는 섬이 흑명도(黑冥島)라 불린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섬의 8, 9할은 흑명무라 불리는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다행히 반도의 끝이 연결되어 있는 땅은 아직 풍원대륙(風元大陸)이었다.
낯선 두 개의 대륙으로 전송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립은 한시름을 놓았다. 풍원대륙에 있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인족이 사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인근 해역과 반도의 넓은 육지는 비령족(飛靈族)이라 불리는 날개 달린 이족 무리들이 통치하는 구역이었다. 그중 천붕족은 비령족의 일종으로 수십 개의 세력 중 가장 약소한 세력에 속했다.
비령족들이 인근의 적잖은 요수들을 몰아내는 통에 육지에서 밀려나 바다 쪽으로 거주지를 옮기지 않았다면 어류 요수는 이마저도 몰랐을 것이다.
어류 요족의 희미한 기억 속에 천붕족은 날개가 달리고 전투 중 거대한 붕새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인족과 다를 바 없었다. 이에 한립은 공물을 거두러 온다는 천붕족 사자들에게 관심이 생겨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빛줄기로 변한 한립이 수백 리 고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는 반 척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얼마 전 잠에서 깨어난 서금충을 쓰다듬었다. 겉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무게가 엄청 무거워졌다. 심지어 기괴한 돌을 갉아먹었을 때 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또한 변이 서금충들의 힘이 굉장히 세져 지금은 거의 천 근에 달하는 물체도 갉아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특이점은 아직 찾지 못했다.
이에 한립은 특수한 돌 세 개의 용도를 정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다음 날, 푸른 빛줄기가 야트막한 산 인근에 내려섰다. 신통을 발휘해 둔광을 숨긴 다음 속도를 줄였기 때문에 푸른 둔광은 점점 모호해지며 결국에는 사라져버렸다.
작은 호수를 지나자 대나무가 가득한 숲에 소머리에 호랑이의 몸을 지닌 수천마리의 호수(皓獸)들이 노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짐승 무리가 아닌 산중턱을 향해 있었다.
그곳은 하얀 안개로 가득했는데 명청령안의 신통을 발휘하니 안개 속에 둥그런 녹색 돌문이 있었다. 바로 소머리 짐승의 거처였다.
미소를 지은 한립이 바로 아래로 하강해 수천 장의 높이에서 둔광을 멈추었다. 이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다양한 색의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주변에 안개가 몰려들어 구름처럼 변해 그를 가려주었다.
웽!
한립이 살짝 어깨를 털자 서금충이 콩알만 하게 작아져 날개를 팔락이며 구름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갔다.
일각 후, 하늘 끝에서 빛이 반짝이자 두 개의 요풍덩이와 은색 거대 새 세 마리가 날아들었다. 한립은 눈을 늘게 뜨며 거대 새들을 관찰했다.
세 장 길이에 거대한 매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조류 요수는 온몸의 깃털을 은으로 주조한 것처럼 반짝였고 보라색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거대 새는 속도를 조절해 날아오다 대나무 산을 발견하고 날개를 펼쳐 하얀 뇌광으로 변해 튀어나갔다.
콰쾅!
은은한 천둥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거대 새 세 마리가 뇌전에 감싸여 하얀 안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날개를 접은 거대 새는 은빛을 반짝이고 사내 둘과 여인 하나로 변했다.
‘저들이 천붕족?’
한립이 이채를 띠고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전부 화신급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는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화신 중기, 젊은 남녀는 화신 초기였다.
세 명 모두 소박한 하얀 장포를 입고 있었고 사내 둘은 은색 머리띠를 하고 여인은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트렸다.
세 천붕족들의 실력을 확인한 한립이 소리 없이 주술을 외워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세 천붕족들은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까맣게 모른 채 작은 산 앞에 떠서 요수들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두 요풍도 그곳에 도착했다. 요기를 거두자 거대한 멧돼지와 머리 셋 달린 거대 구렁이가 나타났다.
“존자(尊者) 대인들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취 수사와 금 수사가 안에서 공물과 연회를 준비하며 세 분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대 구렁이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거라. 우리는 공물만 회수해 바로 갈 것이니.”
나이가 많은 사내가 차분히 답했다. 그들은 섬에서 나는 공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직접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쿠릉.
그때 하얀 안개가 갈라지고 숨겨진 녹색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리자 소머리 짐승과 금색 털 원숭이가 나와 천붕족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머지 두 요물도 물론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대문이 닫히는 순간, 보일 듯 말 듯 한 바람 한줄기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네 요물들이 빠르게 세 천붕족들을 대청으로 안내했다. 요물들은 아직 화형기에 이르지 못해 인간의 형상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돌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천붕족들이 거침없이 상석에 앉자 요물들이 예의 바르게 그 옆으로 가서 섰다.
“이번 공물은 준비가 되었느냐?”
서른 살의 천붕족 사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급히 물었다.
“대부분 준비를 마쳤습니다만 그중 몇 가지는 이미 멸종되어 찾지 못했습니다.”
소머리 짐승이 움찔하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흥, 공물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공물도 마련하지 못한다면 너희를 이 섬에 살려두는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젊은 사내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존자 대인, 화를 푸시지요! 비록 공물을 전부 구하지는 못했지만 이 번에는 목령화를 50송이나 모아왔습니다. 그 점을 보아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뭐라? 목령화 50송이!”
천붕족 셋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희색을 드러냈다.
“연분이 부족한 어린 목령화로 대충 수량만 채운 것은 아니겠지?”
서른 살의 천붕족 사내가 눈을 굴리며 엄히 물었다.
“저희가 어찌 감히 그리하겠습니까. 대인들께서 직접 확인하시지요.”
작은 짐승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으며 목령화가 담긴 옥갑 두 개를 바쳤다. 젊은 천붕족 사내가 반신반의하며 그것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금빛이 빛나며 향기로운 화초 향이 물씬 풍겨왔다.
세 천붕족들이 눈을 크게 뜨고 미소 지었다.
“모두 천년 이상 된 목령화들입니다. 품질도 좋고요!”
천붕족 젊은 여인이 목령화 한 송이를 들어 올려 확인하고는 흥분해 소리쳤다.
“맞구나. 이렇게 품질 좋은 꽃들을 많이도 준비했어. 다른 공물들은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들어나 보자꾸나.”
서른 살 천붕족 사내가 훨씬 너그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요물들은 한시름을 놓고 품에서 다른 공물들을 꺼내 놓았다.
“음, 금수정충과 금모산호사가 조금 부족하고, 청광목(靑光木) 수량도 절반뿐이라…….”
젊은 천붕족 사내가 수량을 비교하며 부족한 공물의 내역을 중얼거렸다.
“그만하면 됐다. 목령화 수량이 많아 대충 부족한 다른 공물을 대체할 만하다. 이번에는 공물을 다 채운 셈 쳐 주고 노흔을 억제할 단약을 내려주마. 다음번에도 목령화의 수량을 가득 채우거라.”
서른 살 천붕족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펄럭여 네 개의 푸른 옥병을 요물들에게 던졌다. 그러자 요물들은 작은 병을 받아들고 연달아 감사를 표했다.
세 천붕족들은 공물을 회수한 다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소머리 짐승의 동부를 떠났다.
요물들은 공손히 천붕족들을 배웅하면서 그들이 거대 새로 변해 멀리 날아간 후에야 안심하고 거처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대청 구석에 언제부터인가 금색 딱정벌레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같은 시각, 한립은 기운을 숨기고 거대 새들을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 공물을 회수했으니 분명 천붕족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저들의 뒤를 따라 천원대륙으로 가는 안전한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거대한 해역에서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녔다가는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게다가 비령족이 인족과 별 차이가 없다면 천붕족에 몰래 들어가 필요한 정보나 재료들을 구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이종족들은 인족이 구하기 어려운 금수정충 같은 진귀한 보물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비령족과 인족은 완전히 다른 종족이니 인족에게 가치 있는 보물이 비령족에는 평범한 물건일 수도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흐뭇한 마음으로 세 천붕족들을 뒤쫓았다. 그의 신통에 거대 새들이 백 리 밖으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놓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천붕족 수사들과 한립은 반도의 해안가를 따라 족히 두 달여를 날아갔다. 한립은 드디어 하늘 저편에서 검은 선을 발견했다.
반도와 이어진 천원대륙의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해안가는 크고 작은 언덕이 이어지는 복잡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에서 날고 있던 천붕족들이 먼저 육지로 진입했다.
한립은 속도를 조금 높여 거대 새들과의 거리를 절반으로 좁혔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천붕족들 전방에 머리 둘 달린 거대 조류와 다른 일고여덟 명의 날개 달린 이족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로 즉시 천붕족들을 에워쌌다.
‘무슨 일이…….’
한립은 멈칫했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들과 2백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둔광을 멈추었다.
머리 둘 달린 거대 조류는 흉포하게 생겼고 몸집은 열 장은 되어 보였고, 깃털이 무척 화려했다. 나머지 이족들 역시 흉측한 외모를 지녔고 날개를 지니고 있었는데 천붕족들보다 훨씬 크고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붉었다.
천붕족은 인간 형태로 돌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천명,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곳은 우리 천붕족의 관할 지역입니다. 어째서 적융족이 나타나 우리의 길을 막는 것입니까? 십계(十成)에 따라 징벌을 받을 것이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서른 살의 천붕족 사내가 그들을 에워싼 무리 중 거한을 향해 호통을 쳤다. 붉은 장포를 입은 거한은 대머리였다.
“하하,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면 십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풍소 형, 얌전히 지닌 물건을 내놓고 우리 적융족에 귀순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습니다.”
천명이라 불린 대머리 거한이 웃음을 흘렸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풍소의 안색이 순간 달라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