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31화 (588/2,000)

831화. 주춧돌

*

허공을 가르며 기다란 흔적을 남기던 한립은 영기의 빛이 번뜩이자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미 영보가 된 풍뢰시를 발동하면 동급의 수사보다 몇 배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립은 지금 이틀 만에 거대한 반도를 벗어났고 수만 리 밖의 해역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산호 군락들이 있어 큰 것은 작은 섬만 했고, 작은 것은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정도였다. 한립은 수 묘(畝, 1묘는 약30 평) 가량의 산호 군락 위에 멈춰 눈을 빛냈다.

그곳은 추혼술을 통해 알아낸 보광 존자의 거처였다.

존자(尊者)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기껏해야 막 화형기를 이룬 8급 요수에 불과했다. 2백 년 전 이곳을 지나다 주변의 7, 8마리 중계 바다 요수들을 굴복시키고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섬의 요수들은 보광존자와 영약 등을 거래하며 안면을 텄고 이번에 한립의 동부를 치는데 도움을 구하는 대신 금수정충을 바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한립은 곧바로 손바닥을 뒤집어 검은빛을 그의 거처를 향해 뻗었다.

쿠르릉.

그의 손바닥에서 나타난 작은 산이 회색 기운 속에서 불어나더니 서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원자신산이 원자신광을 방출하며 수 묘 크기의 산호 군락을 뒤덮였다.

거대한 산은 산호에 닿기도 전부터 굉장한 압력을 뿜어냈다. 회색빛이 어른거린 곳의 암초들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주변 바닷물은 거세게 일어나 백 장 높이의 파도가 되어 돌아왔다.

한립이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니 산호 군락 아래에서 모를 리 없었다. 잠시 후, 해수면이 갈라지며 붉은색과 남색 요기 덩어리가 튀어 올라왔다.

“누군데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이곳이 보광존자 대인의 거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더냐?”

그들이 소리치는 것을 들은 한립은 대답 대신 거대한 산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거산에서 회색 기운이 흘러나와 두 요기 덩어리를 휘감았다. 참혹한 비명이 들리며 회색 기운 안에서 요물들이 폭발해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한립은 겨우 6급 바다 요수 두 마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거산이 해수면에 떨어졌고 동시에 직경 1리에 달하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고, 원자신광의 힘으로 주변 바닷물이 왜곡되어 악귀의 포효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이에 바다 깊은 곳에 있던 수많은 어류들이 빠르게 도망쳤는데 그중에는 몸집이 한 장이 넘는 바다 요수들도 있었다.

크와악!

한립이 원자신광의 위력을 뽐내자 드디어 바다 속에서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려오며 소용돌이 옆에서 다섯 개의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중 검은 기운 하나가 체구가 우람한 거한으로 변했는데 남색 갑옷을 입고 양손에는 커다란 골타(骨朶)를 들고 있었다.

한립은 그저 냉소하고는 그대로 원자신광을 움직이자 거산이 몸을 떨며 사라져 순식간에 거한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러나 상대가 그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새까만 거산이 흉흉한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다. 거한은 거산이 떨어지는 바람의 압력만으로도 몸을 가누지 못했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그는 한립은 쳐다보지도 않고 서둘러 양손의 골타를 집어던지고 열댓 장 크기의 남색 교룡으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퍼퍽.

검은 골타가 날아가며 크기가 불어났지만 원자신산에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그저 회색 기운에 휩싸여 통제를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 이에 교룡도 달아나지 못하고 겨우 서른 장을 날아가다 회색 기운에 휩싸여 꼼짝하지 못했다.

그때 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거산을 향해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거산이 회전하며 무형의 기운을 만들었고 회색 기운 속의 남색 교룡은 겁에 질려 괴성을 지르다 머리만을 남기고 엄청난 압력에 눌려 버렸다.

교룡류의 요수들이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은 맞지만 원자신산의 위력을 막아낼 리 만무했다. 이렇게 교룡은 한립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몸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요행이 교룡의 머리에 남아 있던 원신이 사력을 다해 비술을 펼쳐 남색빛으로 변해 빠져나가려 들었다. 이에 은색 불새가 빠른 속도로 날아들어 교룡의 머리와 충돌했다.

화륵!

크학!

머리를 빠져나오던 작은 교룡이 이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불길 속에 사라졌고 허공에는 교룡의 머리만 둥실 떠 있었다. 한립이 고의로 서령천화를 조종해 머리만 남겨놓은 탓이다.

그리고 다른 네 개의 검은 기운은 거산이 회전하는 순간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혼백이 달아나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단숨에 요수 다섯을 죽인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교룡 머리를 향해 손을 뻗어 가만히 살피다 저물탁에 넣었다. 그리고 검은 손바닥으로 거산이 있는 곳을 치자 원자신산이 모호해지며 허상으로 변해 사라졌다.

‘흠.’

거산을 회수한 한립은 즉시 자리를 뜨려다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푸른 빛줄기로 변해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가 지나는 곳마다 물길이 스스로 열렸고 곧 한립은 산호 군락 아래의 작은 해저산을 찾아낼 수 있었다.

쉭!

손을 튕기자 금색 검빛이 튀어나갔다. 금색과 남색빛이 교전하더니 남색 기운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해저산 중턱이 부서지며 새하얀 산호 대문이 나타났다.

‘이곳이 보광존자의 동부겠지.’

다시 검빛을 날려 은색 산호 대문을 가루로 만들자 푸른 통로가 드러났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의 신형이 그 안으로 움직였다.

통로는 꽤 길어 백여 장은 되는 듯했다. 통로를 벗어나 대청에 이르자 눈앞이 밝아졌다.

오륙십 장 규모의 대청은 화려하기가 황성과도 맞먹었다. 백옥을 깎아 만든 가구며, 사방에는 커다란 야명주가 반짝이며 박혀 있었다. 또한 대청 천장에 새빨간 산호가 걸려 있어 온화한 기운을 발산하며 온도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립의 시선은 대청 구석에 놓인 회백색 주춧돌로 향했다. 투박한 것이 평범한 암석처럼 보였는데 옥 탁자에 놓여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대청의 모든 것이 화려한데 오로지 그 주춧돌만이 그렇지 않아 더욱 눈길을 끌었다. 고개를 꺾은 한립이 손을 뻗어 그것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수행에도 주춧돌이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한립이 멈칫하며 다가가 다시 주춧돌 위에 손끝을 댔다.

처음에는 차가운 기운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오다가 손을 떼기도 전에 뜨거운 기운이 몰아쳤다. 깜짝 놀란 그가 이번에는 아예 손바닥을 가져다 댔는데 차가움과 뜨거움이 쉼 없이 교차하며 편안하고 따뜻한 기운으로 변했다.

의식으로 팔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팔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온몸에서 금빛을 발산하며 다섯 손가락에 힘을 줘 수 척 높이의 돌을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러나 강한 금빛에도 여전히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한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에 다른 손바닥도 주춧돌에 올리자 기이한 기운이 몰려드는 것을 감지했다. 곧 그의 한 손이 검게 빛났고 다른 손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가 어깨를 움찔하자 온몸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고 불가사의한 괴력이 돌에 가해졌다.

쿠쿵!

대청 전체가 흔들릴 만큼 강한 힘이었는데도 주춧돌은 잠시 진동하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주춧돌을 중심으로 대청의 지반에 균열이 생겼는데 한립이 자세히 살피니 잘게 부서진 돌가루 아래로 거무튀튀한 땅이 있었다.

“현철정(玄鐵精)!”

바로 검은 땅의 정체를 알아챈 한립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다시 눈앞의 평평한 돌을 바라보았는데 주춧돌의 절반이 검은 땅에 박혀 있었다.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절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무게만으로도 그가 본 어떤 물질보다 무거웠다.

범성진마공을 극성으로 펼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근력과 백맥련보결을 이용한 두 손의 힘으로도 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중량이 십여만 근 이상이라는 소리였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진귀한 재료 중 가장 무거운 것은 현천중금(玄天重金) 밖에 없었다. 겨우 손톱만한 현천중금으로도 건장한 사내를 꼼짝도 못하게 눌러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돌은 크기로 보아 중량이 현천중금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이번에는 금빛 검기를 쏘아 보냈다.

펑.

검기는 주춧돌 표면에 부딪혀 사라졌고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한립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돌덩이가 검기에 쉽게 갈라졌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작은 검을 꺼내자 금빛이 방출되며 한 장 크기의 장검으로 변했다. 그러자 한립이 한 손에 검을 쥐고 주춧돌을 갈랐다.

펑!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수많은 금빛이 튀었다. 그러나 주춧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날카로운 청죽봉운검으로 직접 내리쳤는데도 전혀 손상을 줄 수 없었다.

눈을 빛낸 한립이 이번에는 은색 불덩이를 날렸다. 은색 화염이 주춧돌을 감싸 안에서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주춧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건!’

그런데 의식을 이용해 주춧돌을 살펴보던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결을 맺으며 서령천화의 기운을 북돋았다. 그러자 양손 사이에서 정순한 푸른 영력이 나타나 은색 화염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하루가 지나갔다.

한립이 낮게 일갈하자 은색 화염이 원형인 불새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돌아왔다.

대충 보기에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지만 남색빛이 일렁이는 한립의 눈에는 표면에 약간 녹은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하루 종일 서령천화로 달구었음에도 미세한 흔적만 남았다는 것은 이것을 완전히 녹이려면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립은 근심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수련을 하는 자에게 수십 년이란 시간은 별것도 아니었다. 특히 눈앞의 물체처럼 기이한 보물이라면 더더욱 공을 들일만 했다.

보광존자가 이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신통에 주춧돌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중심으로 동부를 만들고 이곳에 눌러앉았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앞으로 수행이 늘거나 다른 방법을 찾은 후에 처리할 생각이었을 터!’

한립은 남색 교룡의 행적과 주춧돌을 살펴보며 대략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도 주춧돌을 들고 가는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무거운 걸 저물탁에 무턱대고 넣어다가는 중량의 압력으로 저물탁 내의 공간이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가 몸에 지니고 떠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범성진마공을 전력으로 펼쳐도 한 번에 3분의 1밖에는 들 수 없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속도도 굉장히 느려질 것이다. 돌덩이를 내려다보며 한립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웽!

그가 돌연 소매를 펄럭이자 금빛 꽃잎 같은 것이 날아올랐고, 허공을 선회해 손가락만 한 금색 딱정벌레로 변했다. 바로 성체가 된 서금충이었다.

웨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서금충 두 마리가 즉시 돌덩이로 달려들어 갉아대기 시작했다. 한립은 조용히 서금충의 행동을 관찰했다. 서금충이 갉아먹을 수 없는 물건이 없다지만 눈앞의 주춧돌은 너무 기이해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홈이 파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립은 크게 기뻐했다.

퍽! 퍽!

그런데 잠시 후 서금충들이 날개를 파닥이더니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엄청나 커다란 물체가 떨어지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한참 후 그가 손을 뻗어 서금충 한 마리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손바닥 위로 빨려 들어온 딱정벌레의 무게가 엄청났다.

미간을 좁힌 한립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무게가 굉장히 무거워진 것을 빼면 서금충이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날아오르고 싶어 날개를 파닥이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주춧돌의 재료가 기이해서 서금충도 곧바로 소화하지 못하고 제한된 중량을 초과해 몸을 가눌 수 없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평소대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