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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28화 (585/2,000)
  • 828화. 검은 운해(雲海)

    *

    짐승 떼는 한립이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새끼들을 보호하며 천천히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짐승들은 고지대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한립은 조용히 개천가에 앉아 안개가 완전히 흩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하늘 높이 떠올랐다.

    이제 의식과 법력을 거의 회복했지만 여전히 의식을 멀리까지 방출할 수 없었다. 무언가 제약이 걸린 것처럼 기껏해야 주변 십여 리를 살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예 명청령안으로 둘러보기 위해 높이 떠오른 것이다. 천 장 높이까지 솟아오른 한립은 주위를 살폈다.

    동쪽과 서쪽은 회백색이 이어지는 것이 여전히 돌무지였다. 남쪽은 삼십 리 밖으로 녹지가 있었고 더 멀리로 산맥 같은 것도 보였다. 북쪽은 대량의 물 속성 영기가 느껴지는 것이 거대한 강이나 바다가 있는 듯 했다.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북쪽으로 날아갔다.

    눈앞이 밝아지고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러나 조금 괴이한 것은 물색깔이 적홍색이었고 해변에는 천 마리도 넘는 거북들이 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중 커다란 거북은 크기가 서너 장은 되었고 작은 것은 몇 척 밖에 되지 않기도 했다. 다들 해변에 반쯤 몸을 묻고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해수면 위로 뾰족하고 긴 주둥이를 가진 적홍색 괴조 떼가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가끔 그들 중 몇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거대한 물고기를 잡아 올리면 다른 괴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것을 나눠먹었다.

    한참동안 풍경을 바라보다 한립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에는 여전히 일곱 개의 작열하는 태양이 떠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태양들의 크기가 작고 조금 더 어두워보였다.

    ‘멀리도 전송되어 왔구나. 그렇지 않다면 태양이 이렇게 달라 보일 리 없겠지.’

    전송 후 후유증에 시달리며 이미 예상한 바였기에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해변으로 돌리니 그곳에 거북 외에도 수천 개의 빈 거북 껍데기들이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래에 묻힌 것까지 생각하면 헤아릴 수 없는 양이었다.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한 장 크기의 푸른 거북 껍데기를 꺼냈다. 그는 거북 껍데기를 들고 해변에 있는 것과 비교해 보았다. 놀랍게도 아래쪽에 쌓인 거북 껍데기와 비슷했고 그보다 훨씬 큰 것도 많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차이를 알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는 거북 껍데기는 크기는 작았지만 문양에 희미하게 은색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해변을 뒹구는 것들은 하얀 문양뿐이었다.

    그가 허공에 손을 뻗어 두 장 크기의 거북 껍데기 하나를 끌어왔다.

    펑!

    그의 손짓에 거북껍데기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큰 소리에 놀란 거북들이 소란해지며 적잖은 거북들이 검은 머리를 빼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한립이 별 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자 대부분이 다시 머리를 집어넣고 평정을 되찾았다.

    “역시 평범한 거북 껍데기에 불과 해! 그렇다고 해도 이 거북 껍데기의 출처가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말이지.”

    푸른빛을 번뜩이며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간 그는 강제로 의식을 방출해 주변 몇 리를 탐색했다.

    한참 후 눈을 번뜩인 그가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해변을 빠르게 몇 바퀴 돌았다. 그런데 세 개의 거대한 거북 껍데기들이 눈에 띄었다.

    가장 큰 것은 네다섯 장 크기였고 중간 것은 한 장, 마지막 것은 수 척 크기였다. 세 개의 거북 껍데기도 모두 은빛 문양을 지녔지만 색의 농도가 달랐다.

    가장 작은 것의 등딱지는 완전히 은색으로 반짝였고 한 장 크기의 것은 한립이 갖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가장 큰 거북 껍데기는 희미하게 은색을 머금었을 뿐이었다.

    세 개 다 모래사장 깊숙이 묻혀 있어 의식으로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립이 허공에 멈춰 손짓하자 세 개의 거북 껍데기들이 눈앞에 나란히 늘어섰다.

    퍼펑!

    손가락을 튕겨 날아간 푸른 검기들은 각각의 껍데기에 깊이가 제각각인 구멍을 남겼다. 가장 큰 껍데기는 검기가 관통해 뚫려버렸고 가장 작은 껍데기는 겨우 반 촌 가량의 흔적이 남았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이번엔 소매를 털어 푸른빛을 보냈다.

    세 거북 껍데기들이 푸른 기운 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작아지더니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파앗.

    영기의 빛이 반짝이자 거북 껍데기들은 한립의 저물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저 멀리 해수면 위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또 무슨…….’

    급히 고개를 든 한립은 흠칫 놀랐다.

    전방의 해수면 위에 언제 부터인가 열 장 크기의 거대한 요물이 떠 있었던 것이다. 상반신은 새까만 피부를 가진 흉측한 사내의 모습이었고 두 팔에 뼈로 만든 작살을 들고 있었고, 하반신은 거대한 갑오징어처럼 굵은 다리들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요물은 입을 벌려 검은 기운을 뿜어냈고 수백 마리의 적홍색 괴조들이 그것에 휘말려 요물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만찬을 즐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괴조 무리는 검은 기운에 저항하려 필사적으로 퍼덕거렸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해변의 거북들은 얌전히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거대 요물도 거북 무리를 건드릴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한립은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8급 요수의 기운을 지닌 거대 요물을 두려워할 까닭은 없었다. 그는 그저 제 자리에 떠서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괴조들을 잔뜩 잡아먹고 신나서 촉수를 흔들던 요물이 고개를 돌리다 한립을 발견했다. 그가 줄곧 기운을 숨기고 있었기에 지금 까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 생겼다.

    첨벙!

    요물이 한립을 보자마자 겁을 집어 먹더니 낮게 그르렁 거리며 검은 기운으로 변해 바다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바다 속에서 검은 안개가 솟아올라 요물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한립은 이내 남색 빛을 일렁이며 아래쪽을 살폈다. 오징어 요물은 심해를 헤엄치며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한립은 피식 웃고는 풍뢰시를 이용해 쫓으려했다. 그런데 심해 속에서 알 수 없는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십여 리 밖의 심해 속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요기는 인족의 화신기 수사 못지않았다. 한립은 멈칫했다.

    잠시 후 강력한 요기와 만난 오징어 요물은 주저 없이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숨어버렸다. 고개를 저은 한립이 등 뒤의 날개를 없앴다. 화신급 요수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낯선 땅에서 갑자기 동급의 존재와 싸우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푸른 빛줄기로 변한 한립이 이번에는 녹음이 푸른 산맥 방향으로 날아갔다. 산맥 근처에서 둔광이 가시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바라보니 험준한 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아직 산맥에 도달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험악한 기세가 느껴졌다.

    산맥의 영기도 인근의 다른 지형에 비해 농염했기 때문에 한립은 큰 고민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둔광의 속도를 늦추고 산허리쯤 높이로 산봉우리들을 지나쳤다.

    둔광 속의 그는 의식을 방출해 수십 리 안을 꼼꼼하게 살폈다. 천 리 쯤 산맥 안으로 들어간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에도 산맥에 영초와 영목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던 것이다. 험준한 산맥에서 저계 영약들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이곳처럼 엄청난 양은 없었다.

    한립의 눈이 반짝였다. 대충 지나며 살폈는데도 이 정도면 샅샅이 뒤지면 더 큰 수확이 있을 지도 몰랐다.

    ‘고계 영초들도 꽤 있을 것 같은데.’

    영초들 뿐 아니라 산맥에 거주하는 짐승 무리도 그의 예상을 초월했다.

    그가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 사이의 평지를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원숭이 울음소리와 맹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하얀 털의 거대 원숭이들이 전신이 금빛인 거대 원숭이의 명령을 받아 나무 방망이나 돌 방망이 같은 무기를 들고 거대한 산에서 나타났다가 그 옆 산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 옆의 산에서 소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한 맹수들이 몸집이 커다란 우두머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두 짐승 무리는 산 중간에 있는 평지에서 거침없이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 원숭이들은 날렵한 몸에 괴력을 지녔고, 소머리의 흉수들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녔으며 피부가 두꺼워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한립이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거대 원숭이는 한 손으로 돌을 투척했고, 소머리 흉수는 입에서 노란 빛을 쏘아댄다는 것이었다. 대략 3, 4급의 요수의 수준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금색 털을 가진 원숭이가 민첩한 몸놀림으로 약간 우세해 보였지만 소머리 흉수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두 무리는 반 시진 정도 격렬히 싸우다 결국에는 두 우두머리의 긴 휘파람 소리와 낮은 포효에 각자의 산봉우리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들이 싸웠던 곳에는 요수들의 사체만이 남았는데 곧 추악하게 생긴 조류들이 날아와 사체들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고공에 숨어 흥미진진하게 전투를 지켜보던 한립은 거대 원숭이들의 행동이 마치 인간 병사들처럼 질서정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밖에도 산맥 깊숙이 들어가면서 그는 연달아 기이한 짐승들을 발견했다. 그 중 영기가 가장 농염한 산꼭대기에 사는 것들은 6, 7급 요수 정도의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짐승들을 지나쳐 계속해서 산맥의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산맥의 크기가 엄청나 두 달 동안을 날아가는 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립이 다시 되돌아가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전방에 끝없는 검은 운해가 펼쳐져 무수히 많은 산봉우리를 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립이 명청령안의 힘을 빌려 안쪽을 살피자 검은 안개 밑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고 심지어 바위도 새까맣게 변해 갈라져 있었다.

    괴이한 현상에 한립은 천천히 아래쪽의 작은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나무가 뽑혀 올라와 그의 손에 잡혔고 그 나무를 검은 안개를 향해 던졌다.

    쉬익!

    눈의 법력을 끌어 모아 명청령안을 강화한 한립은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그런데 작은 나무가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간 순간 나무의 푸른 잎과 갈색 줄기들이 말라비틀어지며 순식간에 먼지로 변했다.

    이에 한립도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를 살핀 그는 침음하다 한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검은 안개 주변을 탐색해볼 생각이었다.

    *     *     *

    반나절 후 한립은 검은 안개와 인접한 곳에서 신중한 눈빛으로 한쪽의 절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겨우 수백 장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은 마치 누군가 엄청난 신통으로 잘라놓은 듯 보였다. 그리고 매끄러운 절벽 면에 놀랍게도 몇 장 크기의 새빨간 글자가 3개 적혀 있었다.

    한립은 천연성에서 인족과 요족이 연구해놓은 인근의 이종족 문자를 연구했었는데 이 괴상한 글자들은 아주 낯선 것으로 보아 인요 양족과 교류가 전혀 없는 이종족의 문자 같았다.

    비록 뭐라 쓰여 있는지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글자의 획이 마치 검처럼 매섭고 흉흉한 기세를 발산했다. 아마 수행이 낮은 수사였다면 이 기운만으로도 절벽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한립은 겨우 이런 살기(煞氣)에 구애받을 리 없었고 자세히 살펴 본 결과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글자이며 풍화작용으로 많이 흐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립은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검은 안개를 빙 둘러 날아갔다. 그리고 몇날 며칠을 날아가서야 겨우 산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또!’

    그러나 기쁨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머지않은 곳에 또 다른 적홍색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턱을 매만지며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가 방향을 틀어 검은 안개의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전속력으로 날아갔기에 겨우 보름 만에 해안 절벽에 이를 수 있었다.

    “섬이란 말인가?”

    그곳은 평생 처음 보는 거대한 섬으로 기다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절반은 검은 운해로 뒤덮여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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