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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27화 (584/2,000)
  • 827화. 돼지 요수와 어린 짐승

    *

    무수히 많은 핏빛 실들이 괴물의 몸을 감싸고 빠른 속도로 돌았다. 그러자 금실들이 핏빛 그림자를 막지 못하고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경검진으로는 두 창노를 가둬둘 수 없을 듯했다. 그가 소매를 털자 열댓 개의 금은색 구슬들이 손에 들렸다. 소매 속으로 뇌문 구슬을 쥔 한립이 검진 내부의 상황을 주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줄곧 웅얼거리던 여인의 목소리가 그쳤다. 한립이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 여인이 법결을 발동하자 진법 원반에서 엄청난 금빛이 방출되었고 그녀 주위로 은색 주술 문자가 빼곡하게 몰려들어 주변의 하늘마저 어두워졌다.

    갑자기 불어 닥친 음산한 바람에 소름이 돋았다. 여인은 뜻밖에도 천지원기를 동원해 술법을 펼치고 있었다. 한립은 여인의 진법 법기에서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조금 전 두 야차왕에게 느꼈던 만큼이나 섬뜩한 감정이었다. 깜짝 놀라 소 여인의 수중에 있는 진법 원반을 바라보았으나 빛이 너무 강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명청령안을 극성으로 발동했다.

    “금전문(金篆文)!”

    진법 원반 표면에 나타난 금색 주술 문자를 한 글자도 해석할 수 없었지만 하나하나가 엄청난 영기를 함유하고 있었다. 분명 이야기로만 들은 은과문보다 더욱 신비로운 금전문이었다.

    금전문을 알고 있는 것은 영계라 해도 극소수의 고계 수사들뿐일 것이다. 한립의 시선을 느낀 소 여인이 싱긋 웃고는 진법 원반을 높이 들어올렸다.

    바로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났다.

    금빛에 휩싸인 진법 원반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주먹 크기의 금색 빛구슬을 형성했다.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하늘을 찌르자 주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광풍이 몰아쳤다.

    이에 반응하듯 36개의 거대 깃발들이 용울음과 범의 포효소리를 내며 다양한 색의 영기의 빛이 몰려들었다.

    우웅!

    별안간 모든 깃발이 부르르 몸을 떨며 36줄기의 빛기둥을 분출해 고공으로 쏘아 올렸다. 동시에 먹구름 속에서 귀청을 때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백여 장 크기의 거대한 빛의 진법이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빛으로 만들어진 진법의 중심부가 허공에 떠 있는 진법 원반과 일직선을 이루었고 돌연 가느다란 금실이 내려와 둘을 연결시켰다. 이에 진법 원반이 만들어낸 금색 빛구슬이 서서히 떠올라 빛의 진법 가운데로 이동했다.

    한립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소 여인은 깃발로 만든 진법의 자세한 위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저 시간만 끌어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 보니 진법의 위력은 대경 검진 이상이었다.

    진법 원반을 지탱하는 소 여인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금색 빛구슬이 결국 빛의 진법 중심부로 흡수되어 융합되었다.

    우웅!

    안 그래도 굉장한 빛을 내뿜던 빛의 진법이 몇 배로 불어나자 이제는 거의 하늘을 가렸다.

    *     *     *

    같은 시각.

    수 천리 밖의 야차왕들은 흠칫 놀라 시선을 마주쳤다. 곧 그들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졌고 거목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아후우우! 아우우!

    두 마리의 창노가 길게 울부짖으며 대경검진을 벗어나 핏빛으로 변해 한립과 소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한립이 손에 들고 있던 뇌문 구슬들을 던지려고 할 때 갑자기 빛의 진법이 두 줄기의 우윷빛 빛기둥을 분출해 두 마리의 창노를 맞추었다.

    푹! 푹!

    강력한 적수였던 창노들이 하얀빛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송 진법!”

    예리한 한립은 조금 전 창노들이 공격당한 것이 아니라 하얀빛 속에 갇혀 어딘가로 전송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소 여인이 만족스럽게 웃고 그를 향해 무어라 일러주려다 돌연 안색이 굳어 빛의 진법으로 쇄도했다.

    그러자 한립은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눈치 빠르게 푸른 빛줄기로 변해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 때 백여 장 밖 허공에 파문이 일며 거대한 인영 둘이 나타났다.

    “어딜 가려느냐!”

    노호성을 터트린 야차왕 중 하나가 멀리서 주먹을 휘둘렀고 나머지 야차왕은 핏빛이 번뜩이는 손날로 허공을 갈랐다.

    소 여인이 거대 광진(光陣)에 진입한 순간 진법 전체가 웅웅 울어대며 몇 배로 커져 공간의 파문을 일으켰다. 빛의 진법 주변으로 공간이 왜곡되는 것이 전송이 시작된 것이 틀림없었다.

    대경검진을 펼쳤던 비검들은 창노들이 검진을 탈출하는 순간 72개의 작은 검으로 돌아가 한립의 몸속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주변 공간이 왜곡된 탓에 한립의 푸른 둔광이 어쩔 수 없이 느려지고 말았다.

    표정이 달라진 그가 새로 제련한 풍뢰시의 위력을 펼치려는데 야차왕들의 공격이 들이닥쳤다. 그 중 멀리서 주먹질을 한 야차왕의 공격이 짙푸른 거대 손으로 변해 한립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공격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서는 더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한립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열댓 개의 금은색 구슬을 쏘아 보냈다. 그리고 등 뒤의 날개를 펄럭여 진법 중앙에 도착해 그대로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야차왕이 날린 핏빛 기운은 거대한 빛의 진법 한구석을 강타하고 있었다. 금은색 구슬이 거대 손과 부딪쳐 폭발했고 핏빛 기운이 하얀빛의 진법을 때려 출렁이게 만든 것이다.

    쿠쿠쿵! 텅! 꽈과과광!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금은색 뇌전의 운해가 백여 장을 뒤덮었다. 야차왕의 신형이 흐릿해지고 뇌전의 운해 가장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당장 순간이동을 해 한립과 소 여인을 전송 진법 속에서 끄집어 내려 했지만 열댓 개의 뇌문 구슬의 폭발에 잠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뇌문 구슬은 각각이 연허기 수사의 일격에 맞먹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파앗!

    그 순간 빛의 진법은 하얀빛을 내뿜었고 그대로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두 야차왕이 금은색 뇌전의 운해를 강제로 밀어내고 진법이 있던 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금이 간 하얀  진법 원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야차왕 중 하나가 그것을 끌어와 살피고는 다른 야차왕에게 넘겼다.

    “속에서 진령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보아하니 우리가 인족 수사들을 얕보았군요. 허공에 원거리 전송진을 펼치다니!”

    진법 원반을 넘겨받은 전륜왕이 탄식했다.

    “본 왕도 예측하지 못한 일입니다. 허나 마지막 일격에 전송진이 요동 쳤으니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갔을 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도중에 공간균열에라도 휘말려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지요.”

    불사왕이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

    “그러기를 바라야겠습니다. 그런데 창노들도 어디로 전송되었는지……. 찾으려면 애 좀 먹겠습니다.”

    전륜왕은 고개를 끄덕이다 창노를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별 것 아닙니다. 지능이 없는 것들도 아니고 다른 대륙으로 전송된 것만 아니면 알아서 찾아올 것 아닙니까. 그보다는 일단 연합군에 대한 이야기나 계속합시다. 그러니까 그게…….”

    야차왕들은 한립과 소 여인이 달아난 것을 의외라 여겼을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곳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야차족 대군이 인족이 위치한 천연성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     *

    ‘으으…….’

    한립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뿌연 눈을 깜빡였다. 요수보다 더 단단한 지금의 육체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고 얼마나 멀리 전송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곳은 회백색의 크고 작은 암석들이 쌓여 있는 돌무지였는데 주위로 회색 안개가 끼어 있어 먼 곳은 육안으로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어떤 금제가 펼쳐져 있는지 머리가 울리고 전송 후유증에서 회복된 후에도 의식을 몸 밖으로 분출할 수 없었다. 미간을 좁힌 그가 눈에 남색 빛을 머금었다.

    ‘흠?’

    표정이 달라진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푸른 빛줄기로 변한 다음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일다경 후, 그는 뒷짐을 쥐고 개천 옆에 서서 흘러가는 맑은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공을 쥐니 개천의 물이 물 구슬의 형태로 빨려 들어왔다.

    이상한 점이 없자 그가 입을 벌려 물 구슬을 삼켰다. 맑고 상쾌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개천의 물을 조금 더 취하려던 그가 눈썹을 끌어올리더니 등 뒤로 주먹을 날렸다.

    쿵!

    등 뒤에서 충돌소리가 들리고 쿵쿵 거리며 물러나는 기척과 씩씩거리는 콧김이 느껴졌다. 이에 재빨리 몸을 돌린 한립이 소매를 털었다.

    그러자 광풍이 일고 주변 수십 장의 회색 안개가 흩어지더니 한 장 크기의 괴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견문이 넓은 한립도 괴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만큼 괴물의 모습이 특이했는데 작은 눈에 큰 입, 돼지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졌고 상반신에 푸른거북 껍데기를 걸치고 있었다.

    네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뒤집어진 괴물은 한립의 일격에 쓰러진 것인지 끙끙거리고 있었다. 돼지 요수는 등의 등딱지가 불룩 튀어나오고 사지가 짧아 뒤집어진 거북처럼 바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왕팔저요(王八猪妖).”

    한립은 문득 뇌리를 스치는 단어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돼지 요수의 미약한 기운은 아마 인족 연기기 수준 정도 될 것이다.

    허약한 상대의 기운에 안심하던 한립은 왕팔저요가 방금 그의 일격을 막은 것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시선을 돌리자 돼지 요수의 거북 껍데기에 과연 주먹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놀란 그가 허공을 쥐었고 푸른 거대 손이 거북 껍데기를 잡아 돼지 요수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한립이 거북 껍데기를 자세히 관찰하기도 전에 왕팔저요가 기민하게 몸을 축소해 그 안에서 빠져 나왔다. 보통의 아기 돼지처럼 변한 요수는 연기로 변해 회색 안개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제 푸른 거대 손은 텅 빈 거북 껍데기만 쥐고 있었다. 한립은 어이가 없어 입꼬리를 꿈틀했다. 조금 전 뒤집어져 버둥대던 모습은 그를 속이기 위한 연기였던 것이다.

    왕팔저요가 보기에는 멍청해 보여도 교활하고 지능이 높은 요수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겨우 연기기 수준의 저계 요수에게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추격하지 않았고 거북 껍데기만 끌어와 살펴보았다.

    “겨우 수백 년 된 거북 껍데기가 내 주먹을 막다니. 어떤 거북 요수의 껍데기인지 신묘하구나.”

    그가 조금 생각하다 그것을 저물탁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무턱대고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고 개천 옆에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개천가가 조용해지자 주변의 안개가 흩어지며 짐승들이 물을 마시러 다가왔다. 혀를 내밀어 개천의 물을 홀짝이는 짐승들 중에는 한 척이 되지 않는 어린 짐승들도 있었다. 그 것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땅을 구르며 장난을 쳐댔다.

    한립은 기운을 숨기고 있어 마치 돌멩이처럼 짐승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그때 어린 짐승 한 마리가 그에게 몸을 부딪쳐왔다. 어린 짐승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름다운 남색 눈을 반짝이며 그 주위를 맴돌았다. 털이 복슬복슬한 머리를 들이 밀어 한립의 얼굴에 대고 킁킁거리더니 분홍색 혀를 내밀어 뺨을 핥기도 했다.

    그 순간 한립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화들짝 놀란 작은 짐승이 펄쩍 뛰어올라 달아나려는데 녹색 빛이 번뜩이며 향기로운 단약 하나가 한립의 소매 속에서 튕겨 나와 어린 짐승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차분한 한립의 목소리가 어린 짐승의 귓가에 울렸다.

    “너와 내가 인연이 있는 듯하니 개령단(開靈丹)을 선물하마. 이후 정말 영성이 생길지는 너의 조화(造化)에 달렸다.”

    메에에에에!

    낯선 목소리를 들은 작은 짐승이 큰 소리를 내며 울어댔다. 그러자 짐승들이 한립을 존재를 발견하고 몰려들어 머리 위의 뿔을 들이밀며 경계했다.

    그러나 한립은 꼼짝하지 않고 담담히 단약을 준 어린 짐승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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