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화. 창노(猖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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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과 붉은색 돌풍이 부는 주변 공간이 모호하게 왜곡되는 것만 봐도 그 위력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돌풍이 야차족 무리를 뚫으려 할 때, 갑자기 거대한 검은 그림자 두 개가 각각의 돌풍 위에 나타났다.
쿠쿠쿠쿵!
굉음이 울리고 네 개의 무형의 압력이 돌풍으로 몰아쳤다. 돌풍이 크게 휘청거리며 공격을 버텨냈다.
주위에 포진해 있던 야차족 무리 중 키가 오륙십 장에 이르는 거인 야차 두 마리가 괴이하게 이동해 각자 두 주먹을 날린 것이다.
휘이이잉!
돌풍 속의 축 씨 청년과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미친 듯이 법력을 불어넣었다. 이대로 공격과 포위를 뚫고 탈출을 강행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거인 야차들이 눈에서 붉은빛을 번뜩이며 두 팔을 휘둘렀다.
무수히 많은 주먹들이 돌풍의 양쪽에서 나타났다. 이에 인근의 인족 수사들이 기겁해 달아나려는데 사방팔방에서 무수히 많은 도검류의 빛이 쏟아졌다.
포위하고 있던 야차족 백여 명이 두 번째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렇게 달아나려던 수사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고 돌풍 속 축 씨 청년 부부도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쿠쿠쿠쿠쾅! 콰쾅쾅! 콰쾅!
경천동지할 굉음 속에 인족 수사들은 완전히 파묻혔다.
* * *
지하 깊은 곳.
한립이 주위에 회색 기운을 반짝이며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이상한 것은 회색 기운 주위로 쉼 없이 은색 기운이 다가와 부딪힌다는 것이었다.
조금 전 대부분의 수사들이 땅 위로 튀어나간 후 굉음이 연달아 들렸다. 땅속 깊은 곳에 위치한 그도 진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설마 밖으로 나간 수사들은 전부 죽은 것인가.’
섬뜩한 가정이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지하 동굴이 붕괴하고 수로가 터져 물이 밀려들 때 다른 수사들은 영자석맥이 두려워 토둔술을 펼치지 못하고 분분히 지면 위로 달아났다.
그러나 원자신광을 지닌 그는 천하의 오행기운과 상당수의 자력(磁力) 금제에서 자유로웠다. 게다가 일이 터진 순간 강대한 의식을 퍼트려 살피니 위쪽에는 강력한 이족들이 대량으로 몰려와 있었다.
이에 한립은 감히 구경할 생각도 못하고 즉시 원자신광을 펼쳐 땅속 깊숙이 잠입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땅속으로 파고들기 직전 상처 입은 벽안진섬 한 마리가 그가 있는 곳으로 돌진해 와 부딪혔다.
호박이 넝쿨 째 떨어진 격이라 그는 법력과 신통을 아낌없이 쏟아 단번에 벽안진섬을 죽인 다음 시체를 거두었다.
영자석맥의 강력함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지만 원자신광도 만만치 않아 원자신산의 힘을 끌어오니 땅속 깊은 곳에서도 밀려드는 거대한 흡인력에 대항할 만했다.
바깥의 이족들이 아무리 강력해도 영자석맥이 흐르는 곳에서 함부로 토둔술을 펼쳐 그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한립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자석맥 때문에 그도 의식을 방출해 인근을 수색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열심히 나아가 원래 있던 동굴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다다랐고 주변의 은색 기운도 차츰 옅어져 갔다. 은색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겨우 안색을 풀었다.
‘이쯤이면 안전하겠지.’
의식으로 땅 위를 훑으니 낯선 산 골짜기였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녹음이 무성했지만 하나있는 출구 쪽에 강력한 고대 짐승이나 이 종족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반복해서 꼼꼼하게 탐색을 마친 한립이 안심하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땅 위로 솟아올랐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던 한립은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굳어갔다.
백여 장 밖 거목 위에 체형이 큰 악귀 같은 인물들이 마주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놀란 것은 두 야차에게서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식으로 자세히 훑어도 거목만 감지되었지 그 위는 허공 같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두 야차의 수행이 그를 월등히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저들은 야차족의 야차왕(夜叉王)일지도 모른다.
그는 소름이 돋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야차들을 보며 속을 태우고 있는데 수백 장 밖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오색 둔광이 솟아올랐다.
한립은 새로 나타난 인물을 쳐다보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작은 체구의 호리호리한 인영이 옥으로 만든 오색 배를 밟고 서 있었다. 소 씨 여인이었다. 여인은 한립을 발견하고 반갑게 말을 걸려다 머지않은 곳에 선 고계 야차를 보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이상하군요! 저 둘의 기운이 본 왕이 얼마 전 발견한 인족 수사들의 것과 같습니다. 쓸모없는 것들,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야.”
야차 중 한 명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입을 뗐다. 그는 조금 전 거산을 갈라버린 ‘몽상’이라 불리는 야차들의 우두머리였다.
“불사왕(不死王)! 주변 지하에 영자석맥이 흐릅니다. 저 둘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아 땅속으로 달아난 것이니 수하들을 탓할 일만은 아니지요.”
다른 야차가 미소 지으며 한눈에 한립과 소 여인의 도주 경로를 파악했다.
“그게 저 둘을 달아나게 놔둔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본 왕이 그들을 잘 단속해야겠습니다. 너희가 이곳까지 달아난 것을 보니 꽤 실력이 있구나. 하지만 여기까지다!”
불사왕이 코웃음을 치고 한 손을 들자 붉은 기운이 맺혔다.
이에 한립과 소 여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한립은 바람과 천둥소리를 내며 오색 봉황의 그림자와 뇌전 속 푸른 거대 새의 허상을 불러냈다. 허상들이 사라지자 날개 한 쌍으로 변했다.
그리고 소 여인은 발밑의 작은 배를 십여 장 길이의 머리가 다섯 개 달린 괴이한 교룡으로 변신시켰다.
다섯 가지 색깔의 머리들이 하나의 몸뚱이에 연결된 모습이 굉장히 험악해 보였다.
“불사왕, 잠시만요! 저 둘은 일반적인 인족 수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자의 등 뒤에서 천봉과 곤붕의 진영(眞影)이 어른거렸고 또 다른 자의 발밑에서는 진룡족의 변종인 오색규교(五色虯蛟)의 혼백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려!”
또 다른 야차가 한립과 소 여인을 훑으며 눈을 빛냈다.
“전륜왕(轉輪王),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본 왕더러 저들을 풀어주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또한 본 왕은 다른 이들이 존호(尊號)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름으로 부르십시오.”
“허허, 제가 그것을 깜빡했습니다. 몽상 대인, 저희가 아직 그 일로 논쟁하던 중 아닙니까. 이번에 저 둘을 이용해 내기를 하면 어떻습니까?”
“내기요?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저희 두 사람이 각각 저 둘을 죽이는데 내기를 거는 것입니다. 먼저 성공하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지요.”
“흥, 겨우 화신기 수사들인데 죽이는데 한순간 아닙니까? 이래서야 공정하게 승부를 볼 수 있겠습니까?”
“저 둘은 일반적인 화신기 수사가 아니래도요. 게다가 저희 둘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창노(猖奴)를 한 마리씩 보내 승부를 가르는 것입니다.”
전륜왕이 생각해둔 바를 설명했다.
“창노라…….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내가 질 일은 없을 겁니다.”
불사왕이 잠시 고민하다 이번 내기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여겼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허허, 아주 잘 되었습니다! 너희 둘도 우리 대화를 들었겠지? 너희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너희가 일단 천 리를 이동한 후에 우리가 창노를 풀어 추격할 것이야. 주의할 점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단 너희 둘의 거리가 백 리 이상 벌어지면 우리가 직접 나설 테니까.”
전륜왕이 밝게 웃다가 고개를 돌려 한립과 소 여인에게 음산히 경고했다.
“천 리요?”
한립은 턱을 쓰다듬으며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래 물론 일다경이 지나면 너희가 천 리를 벗어났든 벗어나지 못했든 똑같이 창노를 풀 것이다.”
전륜왕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말하는 내용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한립이 입꼬리를 씰룩하며 힐끗 소 여인을 보았다. 그녀도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아담한 몸집과 창백한 안색이 그녀를 더욱 가련해 보이게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소 수사! 갑시다.”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돌연 등 뒤의 날개를 움직여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의 백 장 거리를 두고 머리 다섯 달린 교룡이 나타났고 소 여인이 그 교룡의 몸 위에 올라섰다.
그의 귀신같은 신통에 두 야차가 눈을 마주쳤지만 곧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소 여인은 잠시 놀라다 희색을 보였다.
어차피 둘이 같은 방향으로 달아나야 하는 거라면 한립의 실력이 뛰어날수록 살아날 승산이 높았다. 여인은 한립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발로 오수(五首) 교룡을 내리쳤다.
교룡의 머리 다섯 개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더니 즉시 다섯 가지 기운으로 변해 두 사람을 에워싸 날아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몇 번 번뜩인 후에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두 야차왕은 제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냉랭한 눈으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했다. 창노라는 것을 믿고 있는 듯했다.
사실 소 여인이 부리는 오색 기운이 천여 리를 지나는데 잠깐이면 충분했지만 야차왕들이 조건을 달았으니 충분히 활용해야 했다. 그녀는 백여 리를 날아가다 속도를 늦추고 허리춤을 스쳐 새하얀 옥패를 방출해 보호막을 만들었다.
“극한의 양기를 응결해 만들어낸 백광패(白光佩)라 합체기를 대성한 야차왕이라도 해도 몰래 의식을 침투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소 여인이 빠르게 설명하며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까?”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사께서 보시기에 두 야차왕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 것 같습니까?”
“적어도 인족 합체기 수사 이상입니다. 그들의 실력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최근 마주쳤던 목족 은계 목령보다 더 큰 위압감이 느껴졌으니까요. 저 둘은 야차왕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럼 저들이 대야차왕(大夜叉王)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건 아니라고 해도 버금가는 존재일 겁니다.”
한립의 확신에 여인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다.
“소 수사께서는 저들이 말하는 창노가 어떤 존재인지 아시는지요?”
“저도 사문의 선배들께 몇 마디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야차족의 왕들은 반귀반요(半鬼半妖)의 물체를 기르는데 평소에는 야차왕의 몸에 기생해 피를 빨아먹고 살지요. 야차왕의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 창노도 강해진다고 합니다. 품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야차왕 본인 실력의 10분의 1에서 3까지 내니 강력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저 둘이 정말 대야차왕이라면 가장 떨어지는 수준의 창노라 해도 저희가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소 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한립도 눈빛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서로의 신통과 실력을 공유하죠. 그래야 힘을 합쳐 적과 싸울 때 유리할 테니까요.”
소 여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소 선자께서는 창노들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인 것입니까?”
“그들을 격퇴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두 야차왕에게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창노를 죽인다고 칩시다. 그들이 저희를 가만히 놔둘 것 같습니까? 저들은 저희를 살려 보내준다고 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깊게 한숨을 쉰 한립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소 여인도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최악의 경우를 생각지 않으려고 회피했던 것이다.
“그럼 좋은 방책이 있으신가요?”
“이 상황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사정을 보아가며 그때그때 대처해야겠지요. 만일 창노들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라면 협공을 해도 승산이 없을 테고, 달아난다면 야차왕들의 추적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의 수행이 갑자기 합체기 수준이 된다거나, 주변에서 전송진을 찾아 수만 리 밖으로 전송되지 않는 한 화를 피하기 어렵겠지요.”
그의 말을 들은 소 여인의 표정이 묘해졌지만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허나 서로 신통을 교류하고 협공하자는 제안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최소한 살아날 가능성을 조금은 더 높여줄 테니까요.”
한숨을 내쉰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 여인도 어쩔 수 없었기에 먼저 자신의 공법과 지니고 있는 보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다경이 지나 둘은 속도를 줄였음에도 천 리를 벗어났다. 바로 그때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처량한 울부짖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아후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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