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화.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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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산으로 다가갈수록 뼈가 시린 삭풍이 칼날처럼 몰아쳤지만 보호막을 친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나아갔다.
그가 산 속으로 진입하자 얼음으로 뒤덮인 산 어딘가에서 두 개의 빛줄기가 날아올라 한립과 서른 장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한립이 먼저 둔광을 흩어버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한 수사가 오셨습니다. 수사의 신통이면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전방의 빛줄기도 빛이 가시자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한립을 알아보고 미소 지었다. 백발의 노인은 한립이 천연성 비령전에서 만난 류 수사였다.
그 곁에 병색이 짙은 유생이 역시 살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류 형과 구양 형이셨군요. 두 분께서는 저보다 먼저 도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두 분의 임무는 꽤나 순조롭게 풀렸나 봅니다.”
“저희 임무야, 한 수사의 것과 비교할 수 있나요. 노부는 금위 대인들께서 이족 소탕하는 것을 도왔지요. 신중하게 움직이면 목숨을 잃은 걱정은 없는 임무였지요.”
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분들은 아직 입니까?”
“당연히 더 있습니다. 이번 일에는 꽤 많은 인원이 필요하니까요. 처음부터 절반 정도는 제 시간에 모이지 못할 거라 여기고 넉넉히 모집했기에 필요한 인원이 거의 찬 상황입니다. 저희와 같이 가시지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류 노인이 빙긋 웃으며 설명하자 한립이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두 수사의 안내를 받아 한립은 빙산으로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류 노인이 품에서 옥패를 꺼내 허공을 비추었고 하얀빛이 뻗어나가 허공에 하얀 연꽃을 피워냈다.
류 노인은 속도를 높여 먼저 하얀 연꽃 속으로 사라졌고 한립은 눈을 반짝이며 그 뒤를 쫓았다. 놀랍게도 이곳에 상당한 수준의 환영진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고대 짐승들은 이곳을 지나면서도 아무런 이상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세 빛줄기가 산 정상을 빙글 돌아 얼음으로 만든 정자 앞에 내려섰다. 그 옆으로 얼음으로 지은 건물이 있었는데 안에 사내 한 명과 여인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 사람의 등장에 모두의 이목이 한립에게 집중되었다. 사내는 회색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체구가 건장해보였고 구레나룻이 풍성해 얼굴 절반이 털로 덮여 있었다.
여인 하나는 평범한 용모에 푸른 치마를 입은 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청록색 의복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젊은 여인이었다.
한립은 면사 여인을 보고 바로 알아보았다.
“옥 선자께서도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수사께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이번 회합을 주최한 사람 중에 하나라서요.”
면사 여인이 한립을 향해 싱긋 웃었다. 비승 수사 모임에서 그에게 같이 임무를 수행하자고 제안했던 옥 선자였다.
“그러셨군요.”
한립이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의 시선이 다른 두 수사에게로 향했다. 비승 수사 모임에서 몇 번 지나가듯 본적이 있어 얼굴은 낯이 익었지만 이렇다 할 친분은 없었다.
모두 화신 중기 이상의 수행이었고, 푸른 치마 부인은 후기 수사였다. 한립이 먼저 그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고 거한과 부인도 예를 취했다.
옥 선자가 그에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지만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임무를 수행하며 작은 부상을 입은 데가 급히 이곳으로 오느라 법력을 소모해 일단 휴식을 취해야겠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출발 예정일이 아직 보름 넘게 남아 있지요?”
“허허, 저희가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오느라 고생하셨을 테니 일단 휴식을 취하시지요. 저기 방들 중 아무 곳이나 골라 쉬시면 됩니다. 물론 만족스럽지 않으시다면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하셔도 됩니다.”
한립의 말에 류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럼 쉬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은 시간 끌지 않고 수사들에게 인사를 한 후 신형을 번뜩이며 빈 방을 골라 사라졌다.
“저리 급하게 쉬러 가는 것이, 큰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겠죠?”
“아닐 겁니다. 법력을 소모해 어서 보충하려는 것이겠지요.”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자 회색 장포 거한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한 수사의 실력에, 비술을 써서 안색을 좋게 만들어도 저희가 알아낼 방법은 없으니까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정해진 시간까지 이곳에 도착한 것만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니지 않나요?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이번 일에 걸림돌이 될 수사는 아니란 얘기죠. 그리고 먼저 온 원 수사와 정원 대사도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고요.”
옥 선자는 한립의 실력을 꽤 높게 쳐주는 듯했다.
“옥 선자의 말씀대로입니다. 한 수사의 수행이 비록 화신 중기이지만 제가 알기론 그의 실력은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거예요.”
병약한 유생이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과장하시는 것 아닙니까, 구양 수사? 화신 중기의 수사가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요?”
“조 수사께서는 그간 천연성에서 수련에만 매진하시느라 저희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못하셨지요. 그러니 한 형에 대해 모르실 만합니다. 한 수사는 최근 수차례 동급 이족을 사살하거나 생포한 일로 비승 수사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합니다. 게다가 특수한 신통을 익혀 영족(影族)과는 아주 상극이고요. 그것이 이번에 한 수사를 초청한 이유입니다.”
구양 수사 대신 옥 선자가 유유히 설명했다.
“옥 수사의 말씀은……. 영충수(影蟲獸) 때문이란 말입니까?”
조 부인도 문뜩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예, 그러합니다. 영충수가 꽤나 상대하기 곤란해 한 수사를 초청한 것 입니다.”
류 노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에 조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후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한립은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꼼짝하지 않았다.
* * *
휘이이이익!!
십여 일 후, 얼음 건물 바깥에서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한립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눈을 뜬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얼음 건물 앞의 공터에는 어느새 백 장 크기의 얼음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두꺼운 얼음 기둥들이 조금 조악해 보이기는 했으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그럭저럭 봐줄 만 했다.
전각 내부에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 은발에 빼어난 외모를 지닌 젊은이와 검은 머리를 높게 올리고 풍만한 몸매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신기하게도 여인은 빙산의 추위 속에도 팔과 새하얀 발을 내놓고 서 있었다.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은발의 사내로 연허 중기였고, 여인 역시 연허기 수사였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 수사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안간 산 정상에 스무 명이 넘는 수사들이 모여들었다.
전부 화신기 이상의 수행을 지닌 이들로 다양한 표정을 하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고 얼음 단 위에 서 있는 남녀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축 선배님과 청 선배님을 뵙습니다.”
“선배님들께서 오셨습니까?”
“축 선배님, 청 선배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마친 한립도 별로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남녀는 당초 그를 찾아와 이번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던 천연성 금위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것이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나쁘지 않았고 그들도 하계에서 올라온 비승 수사였다.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아무리 귀한 것이 걸렸더라도 무턱 대고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 씨 성의 사내는 휘파람을 멈추고 미소로 수사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대부분 모인 것 같으니 다들 앉게. 어떻게 벽안진섬의 소굴을 소탕해야할 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테니.”
사내의 말에 곁에 선 아름다운 여자가 얼음 단 아래로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얼음 전각 양측으로 하얀 빛이 반짝이고 옥 의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신기 수사들이 가까운 의자에 앉아 얼음 단 위의 연허기 부부를 올려다보았다. 은발 사내가 다들 자리에 앉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부부의 예상대로 요청한 수사들 중 4할 정도가 모였구만! 다른 수사들은 임무 때문에 제 시각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어찌 되었든 이곳에 모인 수사들이 전부 온 힘을 다해 협력해야 벽안진섬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네. 일을 마치면 모인 수사들에게는 벽안진섬의 피가 돌아가고 우리 부부는 고대 짐승 무리가 지키고 있는 천심화(千心花) 몇 송이를 얻게 될 것이네. 이것에 대해 이견이 있지는 않겠지? 물론 벽안진섬의 피는 각자가 얼마나 훌륭히 일을 해주는 가에 따라 차등하여 나누어 줄 것이네. 모두 이 점에 유의하여 시간만 낭비하고 원하던 것은 얻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축 선배는 당부의 말을 마치며 연허기 수사의 영기의 압력을 노출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고 이에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알아들은 것 같으니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세. 먼저 벽안진섬 무리는 옥 선자가 먼저 발견한 것이니 발언하게.”
축 선배가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 고개를 돌려 옥 선자를 보았다. 옥 선자가 싱긋 웃으며 일어나 다른 이들을 찬찬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벽안진섬의 소굴을 발견했는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벽안진섬이 거의 열 마리는 되고, 그 중 암수 한 쌍의 성체 벽안진섬은 연허 중기의 수행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어린 두꺼비들은 원영기 수사와 맞먹는 수행을 지녔고요.
벽안진섬 무리는 평소 땅 속 깊은 곳에 머물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만일 그 소굴로 쳐들어가 소탕해야 한다면 주변 환경이 우리에게 불리해 녹록치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옥 선자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물론 겨우 이 정도로 끝난다면 이렇게 많은 수사들을 청하지도 않았겠지요. 관건은 벽안진섬 소굴 주위로 두 종류의 강력한 짐승들이 서식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흑혈의(黑血蟻)이고 다른 종류로는 영충수(影蟲獸)가 있습니다.”
“흑혈의!”
“영충수…….”
“이런, 그런 것들이.”
동시에 양측에 앉은 수사들이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몇몇은 참지 못하고 주변 수사와 속닥대기까지 했다.
확실히 두 영수는 그럴 만한 존재들이었다.
영충 떼에 포위라도 당하면 연허기 수사도 무사히 벗어난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옥 선자가 축 선배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들 걱정할 것 없네. 여러 수사들을 불러 모았을 때는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두지 않았겠나?”
축 선배는 태연했다.
“축 선배님! 저희가 선배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흑혈의와 영충수의 흉악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삿갓을 쓴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노인은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몇 안 되는 화신 후기 수사 중 하나였다.
“유 수사, 그만 자리에 앉아도 되네. 수사가 묻지 않았더라도 설명하려던 참이었으니 말이야.”
영준하게 생긴 청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노인이 포권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두 영충들이 골치 아프기는 하지만 우리 부부가 이미 단학향(檀鶴香)을 구해 놓았네. 이 향은 흑혈의들을 끌어들이는 효과가 뛰어나니 쉽게 흑혈의들을 지면 위로 유인해 척살할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친우에게 현청천뢰기(玄淸天雷旗) 한 벌을 빌려 두었네. 까다로운 영충수는 이 보물을 이용해 천도환뢰진(天都環雷陣)을 유지하면 영충수를 가둬두기에는 충분할 것이야. 그밖에도 전문적으로 영충수를 상대하기 위해 한 수사와 소 선자를 청했네. 두 수사가 진법을 보조해주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네. 나머지 수사들은 우리 부부와 힘을 합쳐 벽안진섬들을 상대하면 되겠지. 어떤가?”
축 수사가 낭랑한 목소리로 긴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전각 안에 모인 이들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한립은 자신과 같이 거론된 이름을 들은 후 전각을 둘러보다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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