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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20화 (577/2,000)

820화. 세 번째 제련

*

한립은 천리 밖의 돌무지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가부좌를 하고 서금충 무리를 조종하고 있었다. 의식의 소모가 심각했다.

그는 금색 서금충 떼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녹초가 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엄청난 고통에 끙끙거리던 한립은 족히 일각은 지나서야 겨우 몸을 바로 했다.

‘위험했어. 의식을 흡수당할 뻔하다니! 의식에 약간이나마 손상이 가겠구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무리해서 서금충을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금충이 고계 목령을 멀리 쫓아버리지 않았다면 반격 당했을 지도 모른다.

목서는 원래도 중상을 입은 데다 서금충에 크게 당했으니 감히 다시 그를 찾아 나설 생각은 못할 것이다. 한립은 소매를 걷어 서금충이 담긴 영수환을 매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수만 리 밖의 밀림.

목서가 변한 녹색 거인이 거대한 나무 아래 앉아있었다. 팔 한쪽과 몸통 절반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지만 주변의 나무들 속에서 무수히 많은 초록빛 점들이 날아들어 구멍을 메우는 중이었다.

거인의 사라진 몸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일다경 후, 초록빛의 점들이 흩어지고 거인이 눈을 떴다. 이전에 비해 훨씬 어둡고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두 손으로 수결을 맺자 거인의 몸에서 허상이 빠져나와 청백한 얼굴의 목족으로 변했다.

그리고 인수합일의 거인은 거대한 고목으로 변해 흩어졌다. 본 모습으로 돌아온 목서가 한립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가 서금충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수백 마리를! 몸이 온전했다면 상대를 죽여 영충들이 지시를 받지 못하게 했겠지만 지금은 두 번이나 중상을 입었으니 본명영수도 손상됐겠지. 또 다시 서금충 떼를 마주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상대가 떠나도록 놔둬야겠어.”

목서는 어두운 얼굴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은색 빛줄기로 변해 흑엽삼림 방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정도 의식을 회복한 한립도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끔찍한 두통을 참으며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가 향한 곳은 일선천 쪽이었다.

두 달 후, 한립은 황량한 고원지대에 도착했다. 그는 구석진 흙산을 찾아 노란빛을 반짝이며 땅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곤 그곳에 열댓 장 크기의 밀실을 파 모든 일을 미루고 여러 단약을 입에 넣고는 요양에 들어갔다.

한 달이 훌쩍 지나 그가 생기 가득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 소매를 펄럭여 푸른 고리를 손에 들었다. 바로 흑봉족 소홍의 저물탁이었다. 의식으로 저물탁을 살핀 한립의 얼굴이 밝아졌다.

‘진귀한 물품이 적지 않구나!’

다른 건 몰라도 저물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요수의 재료들은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칠대요족 다운 소지품이었다.

그리고 저물탁 구석에는 다양한 색의 극품영석이 일고여덟 개나 놓여 있었다.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인계에서처럼 귀한 보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대충 쓰고 버리는 소모품은 아니었다. 고계 수사라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극품영석이었다.

특히 그 중 하나는 하얀색으로 보기 드문 바람 속성 영석이라 한립을 기쁘게 했다. 그는 천연성에서부터 바람 속성 극품영석을 구하려고 했으나 지금까지도 구하지 못했었다.

이 외에도 다른 법기와 고보들이 있었지만 눈에 차는 것은 없었다. 위력 면에서는 그가 지닌 원자신산이나 허천정 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것뿐이었다.

다만 저물탁 안에는 온갖 영약과 영단들도 꽤 많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이 요상을 위한 약이었지만 몇 가지는 수행이 느는데 도움을 주는 단약과 진귀한 연단 재료도 있었다.

나눠가진 지룡과 역시 목갑에 잘 담겨 있었다. 한립은 주저 없이 물건들을 챙겼다.

그러던 중 그의 손에 검은 불 봉황이 새겨진 이상한 은색 병이 들렸다. 금빛의 금제 부적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꼼꼼하게 봉해 놓은 듯했다. 한립은 주저 없이 부적을 뜯어내고 은색 병을 열었다.

“헛!”

한립은 깜짝 놀랐지만 즉시 회색 기운을 뿜어 세 마리의 작은 봉황들을 휘감았다. 흑봉 세 마리가 회색 기운 속에서 몇 바퀴 돌더니 다시 새까만 환약 형태로 돌아갔다.

회색 기운은 단약들을 얌전히 한립의 손 위에 올려두었고 그는 두 손가락으로 단약을 집어 천천히 살펴보았다.

단약이 스스로 화형(化形)할 수준이라면 평범한 물건은 아니란 소리였다. 신중한 얼굴로 단약을 살펴보던 한립은 자신이 알고 있는 단약들과 하나씩 비교해보았다.

“흑염단(黑炎丹)!”

순식간에 정체를 알아낸 한립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천하 요족 중 흑봉족만이 본명화염(本命火焰)으로 제련해낸 흑염단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영단을 제련하기는 무리였다.

흑봉 일족의 고계 수사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흑염단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인요 양족에서 이 단약이 이름 높은 이유는 화신기를 대성한 수사가 연허기에 이르는 고비를 뚫는데 특효였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흑염단 세 알이면 적어도 연허기 고비를 넘길 확률이 2할은 늘어날 것이다. 한립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립은 단약이 흑염단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는 흥분을 억누르고 은색 병에 단약을 넣고 금제 부적으로 꼼꼼하게 봉인해 두었다.

연허기에 이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체내의 영력이 오행합일(五行合一)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원자신광을 지닌 그로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흑염단을 손에 넣었으니 연허기 고비를 넘길 다른 영약과 비술을 찾아 성공 확률을 더욱 높일 일만 남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행을 화신 후기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대량의 단약을 지니고 있으니 화신 중기의 최고봉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문제는 화신 후기에 이르면 지니고 있는 단약들의 효과가 급감해 더욱 고계 단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화신 후기 수사에게 큰 효과가 있는 단약은 그 수가 많지 않았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 중 하나가 진섬액이었다. 그가 이번에 목족 임무를 맡은 이유에는 진섬액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립은 천연성을 떠나기 전 갑자기 그를 찾아왔던 방문객들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의 말대로 순조롭게 일이 풀린다면 그는 적잖은 진섬액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영초나 영목을 원료로 하는 단약들처럼 계속해서 공급할 수는 없어도 그 정도 양이면 상당히 많은 수련 시간을 줄여줄 것이다.

그들의 약조를 떠올린 한립이 길게 한숨을 쉬고 머릿속에서 그 일을 지워냈다.

파앗.

한 손으로 저물탁을 문지르자 이번 임무에서 얻은 또 다른 중요한 수확이 손에 들렸다. 빛이 찬란한 오색 깃털은 엽영과 엽초에게서 얻어낸 천봉의 깃털이었다.

한립이 깃털을 손에 들고 가볍게 흔들자 오색 기운이 반짝이며 밀실을 뒤덮었다. 진령급 천봉의 본명 깃털답게 발산하는 기운이 인계에서 얻은 곤붕의 깃털보다 윗 단계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깃털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벌려 청백색 뇌전을 뿜었다.

꽈광.

낮은 천둥소리가 울리고 뇌전이 응결해 몇 촌 크기의 청백색 날개 한 쌍으로 변했다. 한립이 손바닥을 펼치자 초소형 풍뢰시가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날개를 살피는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각각의 날개에 미세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목서가 변한 초록 거인이 손톱을 날려 만들어낸 구멍이었다.

‘어차피 다시 제련하려던 차였으니 이번에 입은 손상도 복구하면 그만이야.’

천란성수 분신의 말에 따르면 풍뢰시는 곤붕의 깃털을 더했음에도 영보(靈寶)로는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곤붕의 깃털이 함유한 바람 속성의 천지법칙은 오로지 바람 속성의 극품영석으로만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이제까지 바람 속성 극품영석을 찾아다니던 이유였다. 하지만 천봉의 깃털이라는 재료를 찾았으니 계획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깃털을 풍뢰시에 넣고 싶었다.

천봉의 깃털은 곤붕의 깃털과 달리 함유한 천지법칙이 다들 오매불망하는 공간신통이었다. 만일 공간 계열 신통을 지니게 된다면 풍뢰시의 위력이 얼마나 급증할지 알 수 없었다.

다음번에 은계 목령 같은 무서운 존재를 만나면 괜히 위험하게 싸우지 않고 그대로 달아나 버릴 수도 있다. 한립은 청백색 날개와 오색 깃털을 쥐고 고민에 빠졌다.

곤붕의 깃털을 풍뢰시에 더해 제련해본 경험이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천봉의 깃털을 갖고도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그가 저물탁에서 극품 영석 여섯 개를 꺼냈다. 그 중 다섯 개는 물(水), 금속(金), 땅(地), 불(火), 나무(木)의 오행 속성을 지녔고 나머지 하얀 것은 바람 속성의 극품영석이었다.

한립의 능력에 이제는 지화(地火)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한립이 입으로 분출한 은색 불덩이는 허공에서 응집되어 신기하게도 거대한 화로 모양을 만들어냈다.

한립은 풍뢰시를 그 안에 던져 넣고는 바람 속성 영석을 가리켰다.

슉! 슉!

날개와 영석이 연달아 화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푸른 기운이 대량의 재료들을 품고 흘러나왔다. 풍뢰시를 다시 제련하는데 필요한 보조 재료들이었다. 그간 풍뢰시 제련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전부 구비해두었었다.

한립은 수은과 비슷한 액체를 화로 속으로 던져 넣은 다음 주술을 외며 열 손가락을 튕겨댔다. 그러자 다양한 색깔의 법결들이 연달아 화로 속으로 날아들었다.

장장 수십 일이 지나고 밀실 안에서 한립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밀실 중앙에 서서 수정처럼 반짝이는 날개 한 쌍을 들고 기뻐하고 있었다.

날개 중 하나는 푸른빛을 머금었고 나머지 하나는 오색 기운을 품었지만 둘 다 수정처럼 투명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립은 조금 전 이미 영보급에 오른 풍뢰시의 위력을 시험해 보았고 그 신묘함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곤붕의 깃털이나 천봉의 깃털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제련해 연화시키면 통천령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귀한 재료였다.

수정 날개를 던진 한립이 입에서 푸른 기운을 뿜어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그는 손상된 청죽봉운검들을 꺼내 하나씩 새로 제련하기 시작했다.

*     *     *

1년 후, 만황세계 이름 모를 산맥 위.

희미한 푸른빛이 보일 듯 말 듯 날아가고 있었다. 둔광 속에서 차분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있는 청년은 몇 개월간 산 속에서 두문불출하던 한립이었다.

비검들의 보수가 끝나 더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길을 나선 것이다. 한립은 홀로 다니며 더욱 신중을 기했고 그 덕에 반 년 넘게 날아가면서도 아직까지 무사했다.

이름 모를 산맥도 겉보기에는 아주 평범해 보였다. 산꼭대기까지 낮은 관목들이 빼곡하게 드리워 있었고 조금 낮게 날면 짙은 습기가 느껴졌다.

곳곳의 움푹 파인 저지대에는 크고 작은 호수들도 보였고 가장 큰 것은 둘레가 몇 천리에 이르렀고 작은 것은 물웅덩이만 했다. 한립은 호수를 지날 때마다 긴장하고 주위를 살폈다.

호수 속에 강력한 고대 짐승이 살고 있거나 이종족이 잠복해 있을 수도 있었다.

반나절을 더 날아가자 산세가 달라지고 천 장 높이의 산봉우리 두 개가 곧게 솟아 있었다.

‘찾았다.’

두 산봉우리를 본 한립이 눈을 빛내며 미소를 머금었다. 두 개의 산 중 하나는 특이하게도 절반이 빙설로 뒤덮여 있어 굉장히 추워 보였다.

나머지 하나는 온통 보랏빛이었다. 산을 뒤덮은 초목들의 이파리가 어렴풋이 보라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산봉우리는 십여 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모양과 크기는 거의 똑같았지만 완전히 환경이 달랐다.

“정말 이런 산봉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보니, 그들이 허언을 한 것은 아니구나.”

한립이 중얼거리며 빙산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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