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화. 인수합일(人樹合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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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지가 자라나고 초록 이파리가 생겨나자 금색 검실이 다가서지 못하고 더 이상 검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경검진이 허무하게 뚫리자 한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가 다른 신통을 펼치기 전에 스스로 목서라 밝혔던 은계 목령이 서늘하게 냉소했다.
“네 검진이 대단하기는 하구나. 하지만 내 이미 본명영수(本命靈樹)를 불러냈으니 인수합일(人樹合一)하면 넌 끝이다.”
말을 마친 목서가 수결을 맺고 초록빛을 가득 머금은 몸으로 등 뒤의 고목 환영과 하나가 되었다.
곧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거목에서 거대한 영기의 압력이 느껴지고 영기가 줄줄 흐르더니 나무가 높이 열 장의 초록 거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거인 머리에는 목관이 얹어져 있었고 나뭇가지 같은 사지에는 녹음이 우거져 목서의 이목구비를 빼닮은 얼굴을 제외하면 거대한 나무 같았다.
목족의 진면목인 목령체(木靈體)였다.
이제 갑옷에서 튀어나오던 은색 가시는 사라지고 검진 중앙에는 거인만 떠 있었다.
한립은 눈을 부릅떴지만 조용히 법결로 검진에 남아 있는 금실들을 다시 움직였다.
녹색 거인은 그 자리에서 서서 그를 비웃었다.
끼기기긱!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리고 금실들이 튕겨나갔다. 그러나 녹색 거인은 금실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허허, 겨우 화신기 인족 수사가 내 본명영수에 손상을 입히려 하다니 꿈도 크구나. 목령체를 이용하면 백 년간 깊은 잠에 빠지겠지만 육체의 강함이 인족의 통천령보 보다 강해지지. 그러니 얌전히 목숨을 내놓거라!”
거인이 거대한 다리를 들어 올려 금실들을 무시하고 7, 80장을 넘어 한립의 지척에 이르렀다.
한립은 입 꼬리를 움찔했지만 의식을 이용해 몸 바깥을 선회하던 오색 고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대한 고리가 진동하며 거인의 허리춤에 가 있었다.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던 초록 거인의 움직임이 열배는 느려졌다. 희색을 드러낸 한립이 급히 거인이 딛고 있는 땅을 가리켰다.
푸확!
은색 불새가 땅 속에서 솟아올라 입에서 은색 빛덩이를 분출했고 날개를 펄럭여 은색 화염을 일으킨 다음 돌진했다.
쿠르릉 콰콰쾅!
천둥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거인의 발밑에서 은색 화염이 피어올라 폭발해 거인을 뒤덮었다. 엄청난 기세였다.
멀리서 지켜보던 한립은 입고 있던 금은색 장포를 벗어 거인 머리 위로 던졌다. 장포는 그의 법결을 맞고 몇 배로 불어났다 폭발했다.
쿠콰콰콰쾅!
경천동지할 폭음이 울리고 주먹만 한 뇌전 구슬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위아래에서 동시에 공격이 가해지자 초록 거인이 있는 곳은 완전히 뇌전의 파도가 몰아쳐 끊임없이 폭음이 들리고 뇌전이 번뜩였다.
한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경검진을 완전히 풀어냈다. 그가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우자 수백 개의 검빛들이 동시에 공명하며 은색 화염과 뇌전 속으로 몰아쳤다.
꽈광! 쿠콰콰쾅!
폭음이 미친 듯이 터지고 나서야 한립은 신형을 움직여 열댓 장 밖으로 물러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연허 후기를 대성한 수사라도 뇌포(雷袍), 뇌문 구슬, 서령천화 그리고 청죽봉운검들이 합쳐진 일격에는 멀쩡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한 것이다.
잠시 후 뇌전 구름이 가시고 초록 거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인의 몸은 청옥을 조각한 것처럼 번뜩였고 믿기 어렵게도 온갖 공격을 받고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리고 초록 거인의 커다란 손이 어느 샌가 허리의 거대 고리를 붙들고 있었다.
쨍!
거인이 열 손가락에 힘을 주자 오색 고리가 그대로 부서져버렸다. 속박에서 벗어난 거인이 박장대소하더니 다시 땅을 박찼다.
그러자 녹색 영기의 빛이 출렁이며 은색 화염을 휘감았다. 초록빛이 반짝이고 은색 불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기이한 빛에 갇힌 후였다.
각종 영력을 삼킬 수 있는 서령천화가 초록빛에 속수무책으로 잡히고 만 것이다. 이미 상당히 손상된 72개의 금색 청죽봉운검들은 초록 거인을 당해낼 힘이 없었다. 비검들은 거인의 몸에 닿자마자 튕겨나갔다.
그 중 열댓 개는 영기의 빛이 크게 줄어 애달프게 울어댔다. 혈정마가검의 자폭에 휘말려 영성을 크게 잃은 비검들이었다.
청죽봉운검이 온전하지 못한 것도 목서가 쉽게 대경검진을 부순 이유 중 하나였다.
웅!
굳은 표정으로 한립이 손짓하자 비검들이 동시에 공명하며 그의 소매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이다. 나보다 수행이 높은 존재라도 지금의 나를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뭐든 다른 술수가 있다면 다 꺼내 보거라! 본 존에게 작은 흠집이라도 낼 수 있다면 보내 주겠다.”
거인이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웃어댔다. 한립도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아 조금 놀라는 중이었는데 이제야 은계 목령과 인족 연허기 수사의 커다란 차이를 알 것 같았다.
범성진마공과 백맥련보결을 익힌 그의 실력은 단지 수행의 고하로 판단하기에는 틀을 벗어나 있었다. 화신기 수사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고 연허기 수사들은 상대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 임무를 통해 싸워보니 엽초나 농 가 수사들의 실력이 결코 그보다 윗줄이 아니었다.
만일 자신이 지닌 신통과 상극인 공법을 익힌 연허기 수사라면 그가 압도적으로 승리할 가능성도 있었다.
미리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영족(影族)의 적영(赤影)을 만났을 때도 서금충을 쓰지 않고 강력한 육체로 전면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런데 중상을 입은 은계 목령의 능력이 그의 예상을 훨씬 초월했다. 위력적인 신통하며 속도와 힘도 상상 이상이었다.
‘이건 너무하잖아!’
이제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마저도 실패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혈영둔을 이용해 달아나는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대로 죽임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재빨리 계획을 짠 한립의 얼굴이 무섭게 차가워졌다.
파칫!
곧바로 등 뒤의 풍뢰시가 펄럭였고 날개 위로 청백색 뇌전이 나타나 빼곡하게 주먹 크기의 청백색 뇌전 구슬로 변했다.
그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자 한립의 양쪽에서 푸른빛이 번뜩이고 네 개의 똑같은 푸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전부 날개가 달리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있었다.
“재미 있구나!”
초록 거인이 그것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웃어댔다. 총 다섯 개의 푸른 그림자는 얼굴을 굳히고 신형을 움직여 하얀 실로 변해 사라졌다. 이에 목서가 변한 거인이 웃음을 터트리다 거대한 손으로 양 옆을 내리쳤다.
그러자 공간이 폭발하듯 구겨지며 열댓 개의 가느다란 하얀 균열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푸른 그림자들이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손이 움직일 때마다 무형의 힘에 의해 푸른 그림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전부 한립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같은 시각 거인의 머리 위에서 검은빛이 번뜩이고 또 다른 푸른 그림자가 뛰어내렸다. 하지만 거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입에서 비취색 빛기둥을 발사했다.
굵은 빛기둥은 속도가 빨라 푸른 그림자가 피할 틈도 없이 충돌했고 푸른 그림자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거인의 등 뒤로 보라색 빛이 번뜩이며 푸른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 소매를 펄럭였다. 이번에는 수백 개의 금빛이 그의 소매에서 쏟아져 나왔다.
또 한 명의 한립이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 거인은 푸른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서도 막지 못했다.
퍼퍼퍼퍼퍼펑!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처럼 금색 검빛들이 거인의 등을 난타했고, 분노한 거인은 녹색 거대 손을 괴이하게 꺾어 한립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한립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뇌전 속으로 사라지려 했다.
“어딜!”
이에 거인이 냉소하며 두 손가락을 튕겼고, 두 개의 손톱이 뻗어나가 사라졌다. 다음 순간 초록빛 두 개가 기이한 속도로 한립의 날개를 공격했고 막 울려 퍼지려던 천둥소리도 뚝 끊겼다.
대경실색한 한립이 다른 방법으로 몸을 빼내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거인의 거대 손이 한립의 허리를 쥐고 엄청난 힘으로 조여왔다. 놀랍게도 초록 거인의 괴력은 그에 못지않은 듯했다.
다섯 손가락이 그를 으깨려는 순간, 한립이 다급히 주술을 외워 영기의 빛을 터트렸다. 그러자 종이처럼 얇아진 그는 영기의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영기의 빛은 인근에서 응결해 푸른 부적으로 변하더니 어딘가로 멀리 날아갔다. 이에 거인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수십 장 밖 허공. 공간 파동이 일고 한립이 창백한 얼굴로 나타나 푸른 부적을 회수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화령부(化靈符)의 신통을 발동해 진짜 육신을 바깥으로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고공에서 거인이 분출한 빛기둥을 맞은 인물이 펄쩍 뛰어 한립 곁으로 다가왔다. 옷은 너덜너덜했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지만 초록 거인을 향해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한립은 검은 빛을 발산하더니 체형이 쪼그라들어 새까만 털을 가진 작은 원승이로 변했다. 그것은 바로 제혼이었다.
한립은 술법으로 만들어낸 환영 속에 자신의 모습으로 변신한 제혼을 감쪽같이 섞어 공격하게 만들었다.
제혼이 은계 목령의 주의를 끄는 동안 본체는 태일화청부를 사용해 조용히 거인의 등 뒤를 노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력한 의식을 지닌 거인을 기습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녹색 거인은 뭔가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고 등 뒤에서 한립이 뿜어낸 금빛을 떠올렸다. 인수합일을 해서 거인의 몸은 강력해졌지만 원래 육체보다는 감각이 둔해졌던 것이다.
그리곤 등 뒤에서 무언가를 잡아챘다. 손바닥을 펼치자 그 안에는 한 촌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 몇 마리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초록 거인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폈지만 금색 딱정벌레는 으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이에 거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한립이 드디어 의식으로 무언가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거인의 등 뒤에서 금빛이 크게 번지며 거대 딱정벌레들이 괴이하게 나타나 미친 듯이 거인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지켜봤지만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비록 서금충이 갉아먹을 수 없는 것이 없다지만 인계의 경전에 따르면 목옥(木玉)과 같은 재질은 어쩌지 못한다고 했다. 은계 목령이 인수합일의 신통을 펼쳤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거인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내며 거대한 손바닥으로 자신을 등을 마구 때렸다. 금빛 딱정벌레들이 어찌나 야무지게 거인을 뜯어먹는지 수정처럼 반짝이던 몸이 나무토막처럼 쉽게 뜯겨나가고 있었다.
수백 마리가 동시에 깨물어대니 아무리 감각이 둔한 거인이라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기뻐하며 소매를 털어 제혼을 회수한 다음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서금충이 상대를 갉아대고 있으니 거인이 영충의 주인인 그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펼칠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서금충! 서금충 성체를 지니고 있었다니!”
멀리서 분노한 거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악몽이라도 시달리는 듯 두려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쾅! 콰쾅!
녹색빛이 연달아 터져 나왔으나 한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벌써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그들이 격전을 벌이던 자리에서 커다란 빛구슬이 떠올라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빛구슬 속에는 희미하게 거인의 형상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뒤를 금색 딱정벌레 떼가 구름처럼 쫓아갔다. 한립이 날아간 방향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웽! 웽웽! 웽!
얼마 지나지 않아 금색 서금충들이 허공을 선회해 돌아왔다. 딱정벌레들은 이미 일 촌 가량으로 크기가 줄어 있었고 날아가는 모습이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속도는 빨라서 질풍처럼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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