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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17화 (574/2,000)
  • 817화. 천봉의 깃털

    *

    한립이 의식을 움직이자 푸른 실뭉치 절반이 허공에서 사라졌고 나머지는 하나로 뭉쳐져 핏빛과 교전했다.

    다음 순간 혈룡 위로 공간 파문이 일고 나머지 푸른 실들이 날아들었다. 오색 한염 속에서 혈룡과 반만 남은 혈봉이 푸른 실에 꽁꽁 묶여 솥 안으로 빨려 들어가려 했다.

    빠득!

    그 순간 몸부림치던 혈룡의 몸 안에서 푸른 빛덩이가 번뜩이며 튀어 나와 괴이하게도 열댓 장 밖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3, 40장을 벗어나 있었다.

    한립이 서늘한 눈빛으로 미간 사이의 파멸법목에서 검은 빛을 뿜었다.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푸른빛이 튕겨 나왔고 이전보다 빛이 암담해보였다. 하지만 한립이 다른 술법을 펼치기도 전에 푸른빛은 잔영을 남기며 튀어나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한립이 제 3의 요목에서 다시 검은 빛을 분출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푸른빛 잔영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때 푸른 실에 감긴 혈룡과 혈봉은 맥없이 허천정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솥뚜껑이 바로 떨어져내려 갇혔다. 그 사이 아무도 발견하지 못 했지만 한립 소매 속에서 두 개의 작은 금빛이 소리 없이 날아가 은밀히 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농 가 수사들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돌연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풀어놓은 악귀와 귀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날아간 방향은 농동이 달아난 방향과 일치했다.

    그러나 엽초와 엽영도 그들을 쫓을 생각이 없는지 바로 둔술을 펼쳐 한립에게 다가왔다.

    잠시 후 두 여인은 한립과 열댓 장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엽초의 시선은 한립 곁에 서 있는 수십 장 크기의 제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고 엽영은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푸른 솥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눈에도 두 여인이 진령의 피를 손에 넣은 한립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형,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농 가의 수작에 당할 뻔 했습니다. 이전에 약조한 것은 반드시 지킬 터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엽영이 초롱초롱한 눈길을 보내며 살며시 웃었다.

    “사실 엽 가의 세력이 다른 수사의 도움을 받는 일이 드물기는 하지. 수사에게도 좋은 인연이 될 것이야.”

    엽초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지만 은근히 엽 가의 이름을 빌려 그를 위협했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조용히 푸른 솥을 가리켰다.

    웅!

    솥이 진동하며 뚜껑이 다시 날아올라 푸른 실에 묶인 혈룡과 절반 밖에 남지 않은 혈봉이 유유히 떠올랐다. 두 여인은 혈룡과 혈봉의 등장에 눈을 빛냈다.

    엽영의 경우 얼굴에 붉은 기운이 반짝이며 희미하게 핏빛 봉황의 허상이 스치기도 했다. 한립은 작게 미소 지으며 푸른 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혈봉을 묶고 있던 푸른 실이 뜯겨나가고, 절반뿐인 핏빛 봉황의 몸이 소녀에게 튕겨나갔다.

    “아!”

    엽영은 반가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고 몸에서 작은 핏빛 봉황이 피어올라 절반뿐인 불구의 혈봉과 부딪쳤다. 핏빛이 크게 번지며 두 혈봉이 하나로 합쳐져 동그란 핏빛 구슬의 형태를 띠었다.

    신선한 피로 응결된 구슬은 데구루루 굴러 다시 온전한 혈봉으로 변하더니 엽영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미소를 머금은 소녀가 손을 뻗어 봉황을 가리켰다. 그러자 봉황이 맑게 울며 날개를 펼쳐 엽영의 몸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엽영은 일순 핏빛 기운에 휩싸였고 등 뒤로 봉황의 허상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 핏빛 기운이 흩어지고 눈을 뜬 소녀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천봉의 피를 거의 되찾았습니다. 아마 나머지 일부는 진룡의 피에 강제로 흡수당했나 봐요. 그러나 진룡의 피도 손에 넣었으니 다행이지요. 한 형, 진룡의 피도 넘겨주시지요. 일반적인 법기에 담으면 영성을 상할 수 있으니 저희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엽영이 싱긋 웃으며 한 손을 뒤집어 자금색(紫金色) 호리병을 꺼냈다.

    “엽 선자,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저는 천봉의 피를 되찾는 것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봉의 피를 돌려 드렸는데 진통의 피마저 욕심내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 수사도 진룡의 피를 탐내고 있는 것인가.”

    엽초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제가 비승 수사라 물정에 어두워도 진령세가가 어떤 곳인지는 압니다. 만일 일족이 아닌 다른 수사가 진령의 피를 얻어 융합하려 든다면 모든 진령세가에서 추살의 대상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한 형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엽영은 그가 진룡의 피를 욕심낼 생각이 없어보이자 한 시름을 놓고 물었다.

    “하하, 별 것은 아닙니다. 진룡의 피는 천봉의 피에 못지 않는 보물이니 엽 가에서도 반드시 손에 넣고 싶을 테지요. 저도 그런 보물을 그저 내어드릴 수는 없으니 거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좋은 생각이세요. 원하는 가격을 부르시면 제가 반드시 지불하겠습니다.”

    한립의 대답에 엽영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답했다.

    “진령의 피를 영석으로 매기기는 어렵지요. 물론 극품영석을 한 100개 정도 내주신다면 모르겠지만요.”

    엄청난 금액을 부르면서도 한립은 태연자약했다.

    “농담이시죠? 아무리 엽 가라도 극품영석을 한 번에 그렇게 많이 내어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수량을 조정할 수 있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 융통해보겠습니다.”

    엽영이 안색이 변해 엽초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간신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가요? 그렇게 많은 수량이 아니라면 저도 구할 방법은 많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게.”

    흔들림 없는 한립이 태도에 엽초가 냉랭히 재촉했다.

    “간단합니다. 엽 선배님께서 지닌 천봉의 깃털 하나면 됩니다.”

    “천봉의 깃털이라니? 설마 그 흑봉족 요녀의 말을 믿는 것인가.”

    엽초의 동공이 수축했지만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엽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이제 와서 없다고 하시면 제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계속 제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우기신다면 소 수사에게 추혼술을 해 진위를 알아내는 방법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천봉의 깃털 단 하나입니다. 솔직히 진룡의 피와 교환하면 두 분께서 크게 이득 보는 일임을 아실 텐데요.”

    한립의 말에 엽초가 미간을 좁히며 엽영을 보았다. 소녀가 입술을 달싹이자 다시 예쁘장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수사께서는 천봉의 깃털을 가져다 무엇에 쓰려고 하십니까? 저희 엽 가에서 긴히 쓸 일이 있는 것들이니 그러지 말고 다른 것과 거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일전에 얻은 지룡과 두 개도 가능하고요.”

    “공교롭게도 최상급 봉황의 깃털로 다시 제련해야할 보물이 있습니다. 지룡과도 좋지만 천봉의 깃털이 더 필요하군요.”

    “그러니까 꼭 천봉의 깃털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엽영이 푸른 솥 위의 혈룡을 한참 쳐다보다 다시 물었다.

    “하하, 물론 두 분께서 망선단(望仙丹)이나 구심영지(九心靈芝) 같은 영물을 지니고 계시다면 그런 것도 좋습니다.”

    “흥, 그런 역천의 보물이 있었다면 진룡의 피도 필요 없겠죠! 그것들만 복용해도 연허, 합체기도 꿈은 아닐 테니까요. 좋아요, 약속해요. 천봉의 깃털로 거래하기로 하죠.”

    이를 악문 엽영이 결국에는 그의 조건에 동의했다. 그러나 엽초는 표정이 달라져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엽 수사. 그럼 일단 제가 봉황의 깃털을 확인해 본 후에 두 분께 진룡의 피를 넘겨 드리죠. 설마 제가 달아날까 걱정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언니, 봉황의 깃털을 넘겨주세요.”

    작게 탄식한 엽영이 고개를 돌려 엽초에게 분부를 내렸다.

    “……예, 소주!”

    엽초는 머뭇거렸지만 짧게 답하고 저물탁을 스쳐 빨간 옥함을 꺼내들었다. 옥함은 붉은 색에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밖으로 꺼낸 순간 열기가 퍼지며 주변 공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염옥(炎玉)!”

    옥함을 보자마가 한립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과연 알아보시네요. 만년현옥과 나란히 거론되는 만년염옥입니다. 이 정도로 귀한 기물이어야 봉황의 깃털의 영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지킬 수 있거든요.”

    엽영이 조금 우쭐해하며 설명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엽 가 정도 되니까 만년염옥처럼 진귀한 재료를 한낱 보관용 옥함을 만드는데 쓰는 것이다.

    엽영의 말에 한립이 평정을 되찾고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 엽초가 무표정하게 뚜껑을 열자 안에 오색 깃털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여인이 손가락으로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깃털 하나가 둥실 떠올라 한립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깃털을 끌어당겼고 손끝으로 만져보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기다란 깃털은 수정처럼 단단하면서도 투명했고 광채 속에 오색의 주술문자가 어른거렸다. 함유한 영력은 말 할 것도 없이 굉장했다.

    “맞습니다. 천봉의 깃털입니다.”

    한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봉의 깃털 같은 천지영물은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어 그가 한 손을 뒤집어 새하얀 옥함을 꺼냈다. 엄청난 한기가 풍기며 주변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이 만년현옥으로 만든 옥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여인이 옥함을 보고는 얼굴이 굳어져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한립은 천봉의 깃털을 옥함에 넣고는 곧 바로 손바닥을 뒤집었다.

    “깃털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진룡의 피를 두 분께 양도하겠습니다.”

    빙긋 웃은 그가 두 여인을 향해 눈짓하고 손가락으로 푸른 솥을 튕겼다.

    댕!

    맑은 소리가 울리며 푸른 실이 풀려나가 혈룡이 여인들 쪽으로 튕겨 나갔다. 혈룡은 빛을 반짝이며 순간 달아나려고 했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엽영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자금색 호리병을 기울였다.

    위잉!

    호리병 입구에서 흘러나온 남색의 기운이 혈룡을 엽영의 지척까지 끌어왔고 두 여인이 뚫어져라 혈룡을 살폈다.

    “진룡의 피가 맞습니다.”

    한참 후 엽초가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가 웃음을 머금었다. 엽영은 수결을 맺어 남색 기운으로 혈룡의 크기를 작게 줄인 다음 자금색 호리병 안에 집어넣었다.

    “한 형께서는 한 입으로 두 말하시는 분은 아니었네요. 혹시 천연성으로 돌아가면 저희 엽 가의 객경(客卿)으로 머무는 것은 어떠세요? 저희 가문은 한 형처럼 능력 있는 분들을 섭섭지 않게 대우한답니다.”

    호리병을 회수한 엽영은 귀엽게 미소 지으며 그를 회유하려 했다.

    “제가 한동안 천연성에 돌아갈 생각이 없어서요. 만황세계에서 조금 더 머물 예정입니다.”

    한립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두 여인도 상대의 반응에 크게 놀라지 않았고 엽영만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환영이니 엽 가에 들러주세요. 자, 이제 출발 할까요? 목족들이 언제 추적해 올지 모르니까요. 저 흑봉족 수사는 한 형께서 처리하기 곤란하실 테니 제게 맡겨 주세요.”

    엽영이 검은 산봉우리 밑에 깔려있는 소홍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처리하기 곤란하긴 하군요.”

    이번에는 한립이 주저 없이 동의했다. 그가 손을 뻗자 검은 산이 회색빛을 방출하며 줄어들었고 쿵! 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구덩이 안에는 꼼짝 못하고 엎어져 있는 소홍만이 남아있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엽초가 작은 동산이 사라지는 순간 손가락을 튕겼고 청록색 빛줄기 다섯 개가 날아가 검은 봉황 위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분분히 터진 빛줄기들이 초록 그물로 변해 검은 봉황을 감쌌다. 여인이 수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자 초록 그물이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줄어들었고 기이하게도 검은 봉황 역시 크기가 줄어 반 척 크기가 되었다.

    엽초가 주문을 멈추고 허공을 쥐자 초록 그물이 빛덩이로 뭉쳐 돌아왔다. 빛덩이는 몇 번 번뜩이며 이동하다 그녀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저는 볼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립이 헛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하자 두 여인은 뜻밖에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선천도 통과하지 않아 아직 목족의 범위인데요? 저희와 거기까지 라도 같이 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엽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닙니다.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립은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두 여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그리고 보물들과 제혼을 회수한 채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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