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화. 대경검진 대 혈정마가검
*
제혼이 변신하자 음기가 더욱 농염해져서 무상귀왕을 위협했고 미간 사이의 제3의 요목이 눈을 뜬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사발만한 굵기의 뇌전이 분출되었다.
뇌전은 피처럼 붉었고 순식간에 무상귀왕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무상귀왕은 핏빛 뇌전을 보고 놀라 고함치더니 양 손의 망치를 들어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치치칙!
하얀 백골 망치 두 개와 핏빛 뇌전은 상극이었는지 둘 사이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꽈광!
핏빛 뇌전은 막힘없이 망치를 뚫고 무상귀왕의 갑옷을 공격했다.
치익!
갑옷도 백골 망치들처럼 뇌전에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핏빛 뇌전은 거침없이 갑옷을 뚫고 귀왕을 휘감았다.
키이하하하하!
처절한 귀왕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뇌전은 더욱 빠르게 무상귀왕의 몸을 수축시켰고 작아진 무상귀왕은 제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무상귀왕은 제혼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번에는 농 가 수사들은 물론이고 엽초와 엽영 역시 눈을 부릅뜨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상귀왕은 결코 작은 악귀 따위가 아니라 연허기 수사와도 비견되는 귀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대로 반격도 못해보고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작은 원숭이는 대체 무엇이기에 요목에서 역천의 신통을 지닌 핏빛 뇌전을 분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수사들은 다들 비슷한 의문을 품었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립은 하얀 장막을 향해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가 소매를 털자 72개의 금빛들이 벌떼처럼 날아올라 열댓 장 크기의 금색 장검으로 응결했고 그대로 빛의 장막을 갈랐다.
쿠앙!
금빛과 하얀빛이 교전하고 빛의 장막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안 돼!”
농 가 수사들은 한립이 쏘아 보낸 비검이 상상 외로 매섭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리를 높였다. 빛의 장막은 균열을 중심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핏빛 수정으로 만들어 놓은 혈정마가검이 눈앞에 드러났다. 한립은 주저 없이 법결을 발동했고 거검으로 금빛을 뿌리며 핏빛 검을 내리쳤다.
탕!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금빛 거검이 튕겨 올랐다. 한립으로서는 인상이 찌푸려질 일이었다. 그가 소매를 털어 은색 뇌문 구슬 여러 개를 쏘아 보냈다.
콰콰쾅!
핏빛 거검은 은색 뇌전이 폭발하는 와중에도 잠시 빛이 어른거릴 뿐 멀쩡했다.
“헛꿈 꾸지 말거라! 혈정마가검은 혼돈만령방에 오른 극상의 보물이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이 검을 부수겠다고?”
눈빛이 흔들리던 농 가 수사가 표정을 다잡고 음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에 한립이 눈꼬리를 끌어올리곤 신중하게 핏빛 검을 응시하다 허공의 거검을 향해 손짓했다.
우우웅!
거검이 크게 몸을 떨며 금빛 속에서 다시 72개의 작은 비검들로 갈라졌다.
웅웅!
그러나 작은 비검들은 즉시 흐릿하게 변해 똑같이 생긴 검빛들을 만들어냈고 순식간에 수백 개의 금빛들이 떠올랐다. 허공에 한 척 길이의 검빛 수백 개가 하늘을 난무했다.
한립은 낮게 주술을 외며 연달아 법결을 날려 보냈고, 동시에 거검들이 휭 하고 흩어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금빛은 하나둘 소실되어 사라져갔다.
한립은 혈정마가검을 중심으로 대경검진을 펼쳐 검진의 놀라운 위력으로 농동의 원신을 강제로 뽑아낸 다음 통천령보를 부술 작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진이 갖추어졌고 한립이 법력을 불어 넣자 엄청난 기운이 사방팔방에서 밀려들었다. 핏빛 거검을 중심으로 반경 백여 장을 무수히 많은 금실이 보일 듯 말 듯 뒤덮고 있었다.
농 가 수사들은 대경검진의 내력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시선을 교환하고는 핏빛 고서를 부렸던 수사가 양손으로 법결을 맺었다.
쉬쉬쉭!
핏빛 고서의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가고 열 개의 붉은 마귀 그림자가 한립 쪽으로 튀어나갔다. 한립이 혼돈만령방에 오른 혈정마가검을 처리할 거라 믿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공격하게 둘 수도 없었다.
새빨간 마귀 그림자는 몇 번 번뜩이더니 어느새 한립 근처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한립은 두 팔을 펼쳤다.
꽈꽈꽝! 쿠르릉 콰쾅!
연달아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열댓 개의 금빛 뇌전이 연달아 날아가 붉은 그림자와 격돌했다. 마귀 그림자 대부분이 금빛 뇌전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없어졌고 일부는 기겁해 달아났다.
붉은 마귀 그림자도 사실 연허기 수사가 부리는 마물이라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마귀 그림자들은 도검은 물론이고 웬만한 속성의 공격은 대부분 두려워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하지만 한립의 벽사신뢰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립의 수행이 진보할수록 벽사신뢰의 위력도 강력해져갔다. 만일 그가 원영기 수사였다면 뇌전 한 방으로 붉은 그림자들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립의 뛰어난 실력에 쟁투를 벌이던 나머지 네 수사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립이 농 가 수사들에게 수작을 부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곁의 제혼이 콧김을 흥하고 불었고 푸른 기운이 날아가 엽영과 싸우고 있던 적발의 악귀 무리들을 공격했다.
일곱 마리의 악귀들도 신통이 대단했지만 무상귀왕 보다는 급이 낮았기에 단번에 세 마리가 붉은 기운으로 흩어져 제혼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머지 네 마리는 즉시 백여 장을 달아나 겨우 화를 피했다.
그리하여 엽영도 겨우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소녀가 희색이 만연해 금실에 갇힌 핏빛 거검과 농 가 수사들을 번갈아 보더니 다섯 개의 보물들을 조종해 엽초를 돕기 시작했다.
엽초를 붙들어 두던 농 가 수사들은 엽영과 다섯 개의 보물이 합류하자 밀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었던 보라색 독무도 눈에 띄게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한립을 신경 쓰지 못하고 각각 붉은 북과 남색 자(尺)를 발동했다. 작은 북은 독무 속에서 새빨간 귀봉(鬼蜂) 무리를 불러냈고, 남색 자는 허공을 갈라 거대 발톱을 불러냈다.
그러나 제혼은 섭혼신광을 조종해 달아난 네 명의 적발 악귀들을 이리 저리 추격하는 중이었다. 이에 한립이 안심하고 대경검진의 움직임에 힘을 불어 넣었다.
농 가 수사들의 방해만 없다면 검진의 위력으로 충분히 거검을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대경검진은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며 빼곡하게 핏빛 거검을 향해 몰려들었다.
끼기긱! 채채채채챙!
거검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이 들려왔다.
거검의 전신에 영기의 빛이 번뜩이며 뜻밖에도 일순간 금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우웅! 하고 길게 울며 하늘 높이 치솟아 검진을 벗어나려 들었다.
하지만 어디든 금실이 빼곡하게 포진해 있었기에 거검은 겨우 몇 장을 솟아오르다 눈부신 광채를 토해내며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거검은 검진의 위력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통천령보라 해도 그것을 부리는 이가 없으면 본연의 힘만으로 검진을 버티기는 무리였다.
우웅! 우우웅!
잠시 후 핏빛 검이 암담해지더니 처량하게 울기 시작했다.
금실은 검진 주위로 끝없이 밀려들었고, 더욱 가늘고 밝아지며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드러냈다.
멀리서 그것을 본 농 가 수사들은 화들짝 놀라 비술로 악귀와 해골 머리들을 불러내 한립의 행동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엽초와 엽영이 아니었다.
그들은 숨겨둔 신통을 남김없이 사용해 농 가 수사들과 그들이 비술로 불러낸 귀물들을 붙들어 두었다. 농 가 수사들을 죽이는 것은 어렵겠지만 시간을 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농 가 수사들은 분노와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눈앞의 적들을 상대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혈정마가검의 영기의 빛이 대경검진에 의해 거의 꺼져갈 무렵 한립의 귓가에 분노에 찬 농동의 전음이 들려왔다.
“한 형, 제 일을 망칠 셈입니까! 이 검을 훼손한다면 수사는 앞으로 농 가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엽 가의 비호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한립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똑똑히 들었지만 검진을 재촉하며 무시했다.
“……수사께서 한 번만 봐주시면 엽 가가 무슨 조건을 걸었든 그 두 배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한립이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농동의 말투가 달라지며 애원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분명한 조소였다.
농동은 한립이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자 더는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핏빛 검은 허공에서 무수히 많은 금실들에 연달아 베이며 약해져 드디어 한 줄기씩 베인 자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런데 그때 한립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급변해 대경검진이고 뭐고 고려치 않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나갔다.
쩡!
그가 사라지자마자 핏빛 검에서 봉황의 울음소리와 용울음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며 거검이 스스로 폭발했다.
작열하는 태양처럼 하얀 빛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고 금빛 실들은 하얀빛과 만나 갈가리 찢겨나갔다. 하얀 빛은 순식간에 수백 장을 집어 삼켰고 멀리서 싸우던 농 가 수사들과 엽초, 엽영까지 기함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즉시 신통을 회수하고 순간이동을 해 폭발의 여파를 피할 수 있었다.
최상급 통천령보가 폭발했으니 합체기 수사라도 직접 막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립이 기민하게 먼저 달아났으니 망정이지 멍하니 그 곳에 있었다가는 폭발에 휘말려 재가 되어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하얀 빛덩이에서 수백 장 떨어진 곳에서 창백한 안색으로 폭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죽봉운검들이…….’
달아나면서 바로 비검을 회수하기는 했지만 한 발 늦어 열댓 개가 폭발에 휘말렸다. 본명 법보 중 일부가 영성이 상했으니 이후 날을 잡아 다시 제련해야 했다.
그나마 청죽봉운검에 연정 등 진귀한 재료를 배합해 제련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비검이었다면 진작 형태를 잃고 부서져 나갔을 것이다.
지금 한립의 눈동자는 남색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너무 눈이 부셔 다른 이들은 작열하는 빛의 중심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달랐다.
순간 그의 안색이 달라지며 등 뒤의 날개를 펄럭였다. 청백색 뇌전 속으로 사라진 그가 괴이하게 어딘가에서 나타나 옥처럼 새하얀 손으로 아래쪽을 쥐었다.
그러자 다섯 개의 해골 반지가 손가락마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손가락 끝에서 다섯 줄기의 한염들이 튀어 나와 오색 한염으로 융합해 아래쪽을 뒤덮었다.
촤륵!
한 척 크기의 핏빛 그림자가 화염 속에서 나타났다. 전신이 새빨간 작은 혈룡(血龍)이 입에 불완전한 혈봉(血鳳) 한 마리를 물고 있었다.
핏빛 봉황은 몸 절반이 어디로 갔는지 없었고 작은 용에 물려 축 늘어져 있었다. 진작 영성을 잃은 듯 했다.
혈룡은 한립이 명청령안을 통해 자신을 찾아내고 오색 한염을 분출해 그를 가둘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색 한염 속의 혈룡은 아까 보았던 방대한 육체보다 훨씬 작았고 움직임도 극히 느렸다.
한립이 입을 벌려 푸른빛에 싸인 허천정을 뿜어냈다.
통보결을 발동하자 작은 솥이 순식간에 몇 척 크기로 커져 스스로 뚜껑을 열고 푸른 실 뭉치를 방출해 혈룡을 묶으려 했다.
“감히 어딜!”
혈룡은 분노해 고함을 치며 몸에서 핏빛을 뿜어 푸른 실을 자르려 했다. 농동은 진령의 피를 검기처럼 방출해 최후의 발악을 했다. 웬만한 공격이었다면 핏빛 검기에 잘려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통천령보인 허천정이 방출한 푸른 실은 무형의 물질이면서도 신묘하기 짝이 없는 신통을 부렸기에 어림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