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화. 혈정마가검(血晶摩訶劍)
*
한립은 푸른 기운에 감싸여 핏빛 검을 향해 쇄도했다. 금룡과 채봉이 동시에 사라진 하늘은 먹구름이 차차 가시고 새파란 빛을 머금었다.
고공에 거대한 핏빛 검이 떠 있지 않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한립과 엽 가 수사들은 상대가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과연 세 개의 빛줄기가 떠오르자마자 핏빛 검의 양쪽에서 공간에 파문이 일며 은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슷한 용모의 중년 수사 두 명이 나타났다. 비단 장포를 걸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인들은 차분하게 세 수사를 바라보았다.
“농우, 농린! 당신들이었군요.”
갑자기 나타난 이들을 본 엽초가 동공을 수축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의식으로 그들을 훑다 내심 긴장했다.
“아시는 분들이세요?”
“천여 년 전부터 저와 연허 초기를 맴돌던 이들입니다. 진령세가의 모임에서 본적이 있는데 둘 다 마귀(魔鬼)를 부리는데 능해 평범한 수사들과는 궤를 달리하지요. 농 가에서 저 둘을 보낸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천봉의 피를 빼앗을 작정인가 봅니다.”
“마귀를 부린다고요? 확실히 만만치는 않겠네요.”
엽초가 어두운 얼굴로 말하자 엽영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안 그래도 엽 가에서 목족에 심어 놓은 고인(高人)이 누구신지 궁금해 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엽초 선자셨군요. 위명을 떨치시던 분이 어느 순간 소리 없이 잠적하셔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지요. 벌써 연허기를 대성하신 것으로 보아 목족구역에서 기연이라도 얻으셨나 봅니다.”
두 중년인 중 하나가 허허 웃으며 물었다.
“두 분도 천년 만에 연허 중기에 이르렀으니 진전이 느리다고는 볼 수 없겠군요. 허나 이번에 저희 소주를 노리신 것은 너무 대담한 행동이 아닙니까?”
엽초가 눈썹을 끌어올리며 쏘아붙였다.
“허허, 저희 소주께서 이번 일을 성공해 용봉(龍鳳)의 혈맥을 겸하시면 합체기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 그럽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앞서 말한 중년인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음양화극결은 고의로 내게 넘긴 것이었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알고 혈정마가검을 갖고 와서 천봉의 피를 취해간단 말입니까?”
엽영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그 말을 들은 농 가의 수사들이 시선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트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입니다. 더는 우리 소주를 성가시게 할 생각은 마시지요!”
“소주, 더 이야기 해봐야 득 될 것이 없습니다. 공격하시죠!”
중년인의 말에 엽초가 냉랭히 소리치며 몸에서 초록빛을 반짝였다. 그러자 녹색빛이 한 겹 한 겹 출렁이며 일어났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무성한 초목과 화려한 꽃무더기가 보였다.
여인이 수결을 맺자 녹색빛이 하늘로 치솟아 농 가 수사들을 뒤덮었다.
이에 농 가 수사들은 곧바로 소매를 펄럭여 적홍색의 고서(古書)를 방출했다. 중년인이 손을 들어 핏빛 고서를 가리키자 핏빛 고서의 책장이 좌르륵 넘어가며 무수히 많은 주술 문자가 떠올랐다.
그 문자 하나하나가 적홍색 마귀의 그림자로 변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푸른 기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중년인은 속으로 법결을 발동해 새까만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러자 기운이 용솟음치며 검은 바람이 일어 푸른 기운을 향해 날아갔다.
쿠르릉! 쿠쾅!
핏빛과 검은 바람이 얽혀 푸른 기운을 상대하니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소녀가 그것을 보고 얼굴을 굳히며 두 손을 뒤집자 한 손에는 금색 비도가 다른 손에는 초록빛의 고리가 나타났다.
금빛 비도는 열댓 장 크기의 도광을 뿜어내 검을 향해 날아갔고, 초록빛 고리는 맑게 울며 거대한 녹색 환영을 만들어내 역시 핏빛 검을 노렸다.
“어딜!”
이에 농 가의 수사 중 하나가 소녀의 행동에 놀라 허리춤에서 하얀 옥패를 들어올렸다. 옥패는 하늘 높이 떠서 빙글빙글 회전했고 하얀 빛의 장막으로 변해 핏빛 검을 보호했다.
쿵! 콰쾅!
도광과 초록 고리의 환영이 동시에 하얀 빛의 장막을 내리쳤지만 굉음이 울리고 주술문자가 반짝였을 뿐 두 보물의 공격을 가뿐히 막아냈다.
그러자 엽영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지며 한 손을 들어올려 금색 비도에 법결을 던져 넣고 주술을 외웠다. 이에 비도가 빛을 머금으며 다시 하얀 빛의 장막을 향해 쇄도했다.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 도광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두께가 아주 굵었고, 길이는 백여 장에 이르렀다.
칼날이 닿기도 전에 주변 대기가 진동하며 윙윙거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아무리 신묘한 장막이라도 이번 공격에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또 다른 농 가 수사가 콧방귀를 뀌더니 자신의 한쪽 소매를 뜯어내 모골이 송연해 질만한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 주먹 크기의 새빨간 해골 머리 일고여덟 개가 달라붙어 물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크악!”
수사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자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해골 세 개가 입을 벌리고 떨어져 나갔다. 사라진 해골들은 다음 순간 하얀 빛의 장막 위에 나타나 음산한 기운을 폭발했다.
세 마리의 악귀들은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도광을 보더니 그 중 두 마리가 돌연 적홍색 검으로 변했고, 그것을 중간의 악귀가 두 손으로 잡아챘다.
이에 주변의 음산한 기운들이 미친 듯이 악귀와 검으로 몰려들었다.
키에에에에엑!
악귀는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일고여덟 배로 불어나 적홍색 귀검(鬼劍)으로 날아드는 도광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쾅!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도광이 열댓 장 길이의 두 거검에 막혀 버린 것이다.
우웅.
애달프게 울던 도광이 그 자리에서 흩어졌다. 그러자 귀검들과 악귀의 굵은 두 팔도 갈가리 흩어져 붉은 기운으로 뭉쳐졌다.
바로 그때, 무언가가 날아들어 악귀를 으깨버리려 했다. 하지만 악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붉은 기운으로 다시 두 팔과 두 거검을 만들어 환영의 공격을 막아냈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엽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엽영은 이를 악물고 소매를 털어 빛덩이 세 개를 꺼냈다. 빛덩이 안에는 각각 퉁소, 금, 비파가 들어 있었다. 소녀가 열 손가락을 튕겨내자 세 보물이 일시에 기이한 빛을 머금었고 각기 다른 빛의 기운이 하나로 융합되어 악귀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삼색 기운이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전방에 나타난 네 마리의 악귀로 인해 막혀버렸다. 악귀들은 삼색 기운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음기를 뿜어냈다.
일순 삼색 기운과 음기가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소녀가 흠칫 놀라 다른 술법을 펼치려는데 머리 위에서 슉 하는 미세한 소리가 울리고 붉은 그림자가 괴이하게 나타나 두 개의 검을 휘둘렀다.
하얀 빛의 장막에서 머물던 붉은 악귀가 공간을 찢어내고 순간이동을 해 그녀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다. 놀란 엽영이 즉시 금빛 빛줄기로 변해 기습을 피하며 금색 비도와 초록 고리를 불러들여 머리 위의 악귀를 공격했다.
그러나 악귀는 전혀 보물들에 밀리지 않았다.
이에 엽영은 보물 다섯 가지를 부리면서 붉은 악귀 다섯 마리와 싸우느라 핏빛 검에 다가갈 수 없었고, 엽초도 열댓 개의 비검들을 조종해 농 가가 불러낸 해골 머리들과 교전하고 있었다.
해골 머리들은 인간의 머리모양을 갖고 있었지만 육신이 없었고 푸른 얼굴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보라색 기운을 뿜어댔다. 그러자 엽초가 해골 머리의 기운에 휩싸였다.
푸른 기운을 뿜어내 보라색 기운을 밀어내고는 있었지만 단시간 내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여인은 엽영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한립을 바라보았다.
‘이런!’
한립은 뒷짐을 진 채 가만히 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머지않은 곳에 떠 있는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두말 할 것 없이 흑봉족의 소홍이었다.
“인족의 일에, 그것도 진령세가의 일에 끼어들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엽초가 소홍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수사께서 지니고 계신 천봉의 깃털을 제게 주십시오. 그럼 바로 떠나겠습니다.”
“무슨 천봉의 깃털! 그런 것이 어찌 내게 있단 말이냐.”
엽초의 안색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흠, 잊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초 목족의 첩자로 파견한 인물 중에는 저희 요족의 수사도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천봉이 불 속에서 부활하는데 쓰인다는 천봉의 깃털 세 개를 목족들이 감춰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허급 수사인 당신이 직접 목족에 숨어들어 이리 오랜 세월 고생했겠습니까? 심지어 이제는 엽 가의 소주께서 친히 나선 것을 보니 원하시던 천봉의 깃털을 얻으신 거겠지요.”
소홍의 말에 엽초와 엽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에 여인은 싱긋 웃고는 이번엔 한립을 보았다.
“한 형의 신통이 남다른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저를 압도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지 말고 저희는 그냥 저들이 알아서 승부를 가르게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립이 엽영과 엽초의 상황을 살펴보고는 돌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소 수사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농가의 소주가 정말 진령의 피를 융합하고 나타난다면 저도 죽은 목숨이겠지요. 그간의 정이 있으니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냥 비켜 주시겠습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소홍이 얼굴을 굳히며 단호히 답했다.
“좋습니다.”
한립이 한 걸음을 떼자 신형이 모호해지더니 스무 장 밖에서 나타났다. 소홍과 몇 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한립은 조용히 손을 들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금빛이 번쩍이더니 금실 한 줄기가 여인을 가르려 했다. 강력한 육체를 이용해 라연보와 질풍구변의 신법을 극성으로 발휘한 것이다.
화신기 요족 수사인 소홍도 한립의 귀신같은 신법에 화들짝 놀랐다. 검기가 변한 금실은 극히 빨라 피하기 어려웠기에 여인은 재빨리 검은 화염을 분출했다.
펑!
검은 화염이 폭발하며 금실의 속도가 줄어들었고 결국 그녀의 치맛자락 밖에 잘라내지 못했다. 일고여덟 장 밖에서 나타난 여인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이때 한립은 검기를 회수하고 즉시 회색 원자신광을 불러내는 중이었다. 회색 기운은 그의 조종을 받아 소홍을 향해 밀려들었다.
동시에 다섯 개의 백골들이 여인 주변에 나타나 각기 다른 색깔의 한염을 방출했다. 한염은 순식간에 오색 한염으로 융합돼 무서운 기세로 소홍에게 날아들었다.
콰쾅.
이어서 한립의 등 뒤에서 천둥소리가 울렸고 풍뢰시가 나타나 청백의 뇌전을 번뜩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소홍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 소매를 펄럭였고, 수십 개의 금빛이 춤을 추며 떨어져 내렸다. 그가 일단 손을 쓰기 시작하니 강력한 공격들이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소홍은 혼비백산했지만 생사의 고비를 앞둔 탓에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빙글 돌더니 전신에서 검은 화염을 뿜어내 오색 한염을 공격했고 입에서 뿜어낸 새까만 거울로 검은 빛을 쏘아 회색 기운을 막으려 했다.
또한 머리 위에서 미친 듯이 쏟아지는 금색 검빛들은 흰색 실 뭉치를 쏘아 보내 그물을 만들어 대비했다.
그 모습에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가 속으로 법결을 발동하자 수십 자루의 비검들이 순간 번뜩이며 수백 자루로 불어났고 하늘을 뒤덮은 금빛들이 쾌속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푸푸푸푸푹!
검기는 하늘을 가르며 쏟아져 내렸고 소홍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웅.
실뭉치도 신묘한 신통을 부리고 있었겠지만 수백 개의 검빛이 베어대니 극심하게 진동하다 붕괴하려 했다. 그리고 검은 화염은 오색 한염을 아주 잠깐 막아내다가 밀려나갔다.
오색 한염이 다시 소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퍼퍼펑!
그녀가 검은 거울로 뿜어낸 새까만 빛은 회색빛에 닿자마자 연달아 둔중한 폭음을 내며 흩어져 버렸다. 회색의 기운이 달려들자 검은 거울도 암담해지며 영성을 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