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13화 (570/2,000)
  • 813화. 진령의 혼백

    *

    “무슨 소문 말입니까?”

    대연결을 운행해 위압감을 떨쳐버린 한립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하! 한 형, 저 진룡의 혼백은 농동이 농간을 부린 것입니다. 제 몸의 천봉의 피를 얻기 위해서겠지요. 허나 그가 일단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반드시 그것을 보고 들은 이들을 모두 죽일 겁니다.

    우리 진령세가 사이에는 서로 진령의 혈맥을 빼앗지 않겠다는 협약이 되어 있거든요. 그것을 어기면 다른 세가의 연합공격에 멸문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인족들이 사는 곳에서 공격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일을 꾸민 것이지요.

    허나 진령의 피를 촉발하는 일은 겨우 화신기 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농 가의 연허급 수사가 이곳에 와있는 듯하군요.”

    엽영이 신중하게 거대한 용의 머리를 살피며 담담히 설명해 주었다. 한립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엽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농동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범한 진령의 피라면 모르지만 저희 엽 가나 농 가처럼 상고 시대부터 이어진 진령세가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진령의 혈맥이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유전되며 완전히 동화되었기에 쉽사리 빼앗아 갈 수도 없을 텐데요. 농 가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엽초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그 점은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농 가에서 수작을 부릴 때는 진작 방책을 마련해 두었겠죠. 어찌 되었든 상대는 제 천봉의 혼백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진령의 피를 촉발할 때 언니의 도움이 필요해요. 한 형, 호법을 부탁드립니다.”

    엽영이 얼굴을 굳히며 결단을 내렸다.

    “이미 말려들었으니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한립은 주변에 가득한 먹구름과 거대한 용의 머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진룡의 혼백이었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한 형께서 상황을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진법을 펼쳐 진령의 피를 촉발하겠습니다. 어디, 우리 엽 가의 천봉의 힘이 강한지 농 가의 진룡의 피가 정순한 지 알 아볼 때이군요.”

    소녀가 저물탁을 스쳐 여러 색의 진법 깃발들을 꺼내더니 주변으로 쏘아 보냈다. 진법 깃발들이 사라지고 별안간 주위에 광채가 일었다. 그때 엽영이 성큼성큼 진법의 중심으로 걸어가 가부좌를 틀고 색깔이 제각각인 빛구슬 다섯 개를 뱉어냈다.

    구슬들은 주먹만 한 크기로 희미하게 각양각색의 보물들을 품고 있었다. 퉁소(簫), 금(琴), 비파(琵琶), 도(刀), 고리(環)의 다섯 가지 물건이었다.

    그 중 노란 빛덩이 속의 비파는 한립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무서운 위력을 지닌 영보의 모조품이었다. 다른 네 가지도 비파와 동급의 보물로 보였다.

    한립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엽영이 품에서 새하얀 옥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서 듣기 좋은 봉황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고 한 촌 크기의 초소형 봉황이 날아와 그대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엽영이 즉시 입을 벌려 오색 기운을 분출해 봉황을 휘감았다. 그러자 아름다운 초소형 봉황은 빛으로 반짝이며 오색 영단의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엽영이 무표정하게 영단을 가리키자 오색 영단이 스스로 날아들어 소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엽초는 엽영의 곁에 앉아 수결을 맺어 입에서 노란 빛기둥을 뿜어냈다. 정 순하기 그지없는 막대한 나무 속성 영기가 엽영의 몸으로 주입되었다.

    파앗.

    그와 동시에 엽영 주위로 푸른 영기의 빛이 자욱하게 나타났고 머리 위에서 직경 몇 척의 푸른 빛무리가 천천히 회전했다.

    동그란 빛무리의 가장자리로 한 척 가량의 하얀 화염이 활활 타고 있었는데 그 중간에 사람처럼 보이는 허상이 앉아 있었다. 크기가 아주 작은 것을 제외하면 용모가 소녀와 매우 흡사했다.

    빛무리 속 소녀의 허상이 두 눈을 번쩍 뜨자 오색 빛이 흘러내려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먹구름은 벌써 몇 리 밖에 이르러 있었다.

    이에 하얀 소녀의 피부가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고 머리로 핏빛 기운이 몰려들어 머리 위 빛무리를 향해 맺혔다.

    빛무리 속 소녀의 허상이 핏빛 기운에 닿자 전부 흡수해 주위의 오색 기운이 더욱 또렷해졌다. 대량의 핏빛 기운이 흘러들자 소녀의 허상은 오색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변했다.

    돌연 맑은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빛무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응축 되었다. 이어 오색 광채가 터져 나오며 다섯 가지 빛깔의 털을 지닌 채봉(彩鳳)이 격앙된 몸짓으로 날개를 펄럭였다.

    채봉은 날아가면서 점점 신형을 키웠고 날갯짓을 할 때마다 두 배씩 늘어나 지금은 백 장 크기의 거대한 봉황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진룡의 삼엄한 기운에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봉황은 한 쌍의 은색 눈으로 먹구름 속의 용머리를 노려보았다. 금색 용머리도 거대 채봉의 등장에 울음소리를 멈추었고 먹구름 속에서 뇌전이 번뜩이며 이백 장 길이의 금색 몸뚱이를 드러냈다.

    황금 진룡은 오색 채봉보다 배는 더 컸다. 그러나 채봉은 두려움 없이 날개를 펄럭였다.

    휘잉!

    동시에 광풍이 일었고 한쪽 날개에서 거대한 바람기둥들이 치솟았다.

    파츠츠츳!

    그리고 다른 날개에 하얀 점이 빼곡하게 나타난 순간 하얀 화염이 꽃송이처럼 퍼져 불바다가 펼쳐졌다.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채봉을 경계로 하늘이 갈라지듯 한 쪽에서는 포악한 푸른 광풍이 휘몰아쳤고, 다른 쪽에서는 하얀 화염이 모든 것을 불사를 기세로 타올랐다.

    쿠르릉! 콰콰쾅!

    그것을 본 진룡도 기운이 포악하게 변했다. 먹구름 속에서 무수히 많은 벼락이 동시에 떨어져 내려 각각 십여 장 길이의 은색 뇌전 교룡으로 변해 진룡을 둘러싼 것이다. 몇 마리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이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허공에서 용울음 소리와 봉황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금룡이 거대한 입을 벌려 금색 빛기둥을 뿜자 주위의 은색 뇌전 교룡들이 득달같이 날아갔다.

    채봉은 두 날개를 동시에 앞으로 펄럭였고 푸른 돌풍과 하얀 불바다가 엄청난 기세로 쇄도하고 있었다.

    쿠콰콰콰콰쾅!

    굉음이 일대를 뒤덮으며 진통과 천봉의 혼백 간의 대전이 드디어 시작 되었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위를 올려다봤지만 사실 만일을 대비해 의식으로는 진법 주위를 감시했다.

    허공에는 은색 뇌전, 푸른 광풍, 하얀 화염이라는 세 가지 천지의 힘이 격돌했고, 금룡과 오색 채봉의 방대한 육체가 나타났다 사라지며 일반 요수처럼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신통 역시 대단해서 금룡이 발톱을 휘두르면 다섯 줄기의 하얀 궤적이 나타나며 허공을 갈랐고 채봉이 날개를 펄럭이면 공간이 왜곡되었다. 두 진령급 존재가 날뛰면서 하늘을 찢어발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립의 마음이 요동쳤다.

    경천동지할 위력을 선보이고 있는 것은 겨우 진령의 혼백들이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진룡과 천봉은 말 그대로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을 멸한다는 뜻이 아닌가.

    경전에 적힌 진룡과 천봉 등의 역천의 존재들은 진선계의 선인들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느덧 사실인 듯 했다.

    한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고공을 주시했다. 금룡과 채봉은 쉽사리 승부가 갈릴 것 같지 않았다.

    ‘몇날며칠을 싸우기라도 할 셈인가?’

    그는 시선을 진법 중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는 두 여인에게로 돌렸다. 주변에 오색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엽영은 눈을 감은 채 수결을 맺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엽영의 몸에 영기를 주입하고 있는 엽초의 피부색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청록색이던 피부가 투명하고 하얗게 변해 지금은 옥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엽초가 아름다운 미녀로 변신한 것이다. 동그란 얼굴에 눈꼬리가 올라간 매혹적인 눈이 별처럼 빛났고 겨우 열 여덟아홉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립의 시선을 느낀 듯 그녀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냉랭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냉랭한 눈빛에서 불쾌함을 감지한 한립은 살짝 미소 짓고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파츠츠츳!

    그때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형세가 크게 달라져 돌풍의 힘이 변한 남색 기운이 얼음 연꽃들로 공중에서 피어나며 한기를 몰아오고 있었다.

    하얀 화염과 한기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았고 오히려 극히 다른 성질의 기운이 서로를 보완해 한층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얀 화염의 불꽃과 남색 연꽃이 하늘을 뒤덮자 뇌전의 힘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채봉이 비장의 공법을 발동해 우위를 점한 것 같았다.

    “오행이 전환하며 종국에는 하나로 돌아간다. 드디어 음양화극결(陰陽化極決)을 운용하는군!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 왔구나.”

    금색룡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윙윙 거리는 목소리로 인족의 말을 했다. 마치 이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이 공법에 대해 알고 있나요?”

    채봉이 일순 멈칫하며 입을 열었다. 엽영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금룡은 채봉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큰 소리로 주술을 읊었다. 이어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금룡의 거대한 육체에서 점차 금빛이 빠지고 그 자리를 붉은 빛이 대신 차오른 것이다. 용은 입을 벌려 굵직한 피 기둥을 분출했다. 피 기둥은 공기와 닿아 열댓 개의 거대한 거검으로 응결되었다.

    붉은 수정처럼 반짝이는 거검에서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왔다.

    “혈정마가검(血晶摩訶劍)을 지니고 있었다니! 설마……!”

    검의 모습을 확인한 채봉이 놀라 소리치더니 바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급히 날개를 펄럭여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이제와 떠나려 해도 늦었습니다.”

    쉬익.

    용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급속하게 줄어 한 장 크기의 핏빛으로 변해 검속으로 빠져들었다.

    희미한 핏빛이 번뜩이고 백여 장 길이의 핏빛 그림자가 채봉을 갈랐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피할 수 없었다. 채봉의 방대한 육체는 멀쩡했으나 수 척 크기의 봉황의 허상이 핏빛 검의 허상에 가차 없이 잘렸다.

    핏빛 검의 그림자는 봉황의 허상을 휘감아 전광석화처럼 검속으로 돌아갔다.

    우웅우웅!

    채봉의 육체가 빠직!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빛 알갱이로 흩어져 떨어져 내리자 다시 엽영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소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에 찬 얼굴로 눈을 떴다.

    “천봉의 피! 내 천봉의 피가 대부분이 검에 흡수되어 버렸습니다.”

    여태까지 태연자약하던 소녀가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소주, 당황할 것 없습니다. 천봉의 피가 어디 그리 쉽게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은 잠시 검에 갇혔을 뿐입니다. 농 가 놈이 원신(元神)을 이용해 진령의 피를 검에 잠시 가둬두었지만 당장 두 피를 융합할 수는 없습니다. 검만 빼앗아 오면 천봉의 피를 다시 찾을 수 있고, 역으로 상대의 진룡혈맥까지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엽초가 소녀의 몸으로 영기를 불어 넣던 것을 멈추고 서늘하게 말했다.

    “……맞아요, 아직도 천봉의 피 일부와 감응이 됩니다. 상대가 완전히 손에 넣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서 검을 빼앗아 와야 합니다. 한 형, 저는 수사께서 보통의 화신기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천봉의 피를 되찾도록 도와주신다면 이후 엽 가에서 수사의 청을 한 가지 들어드리겠습니다.”

    곧 평정을 회복한 소녀가 침음하다 한립을 향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말에 엽초는 움찔했고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머뭇거렸다.

    “어차피 농 가의 사람들이 한 수사를 달아나게 놔두지 않겠지. 만약 농 가를 죽이는데 실패한다면 홀로 추격당하게 될 것이야. 게다가 당장은 화를 피한다 하더라도 농 가에서 절대 가만 두지 않을 테니, 이후 엽 가의 비호를 받아야 무사할 수 있을 거네.”

    엽초가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제게 다른 선택이 있는 것도 아니군요.”

    한립은 턱을 쓸어내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하, 그렇게 난색을 표할 일만은 아닙니다. 인족 수사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우리 엽 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지 아십니까?”

    엽영이 낮게 웃으며 금빛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고 엽초도 푸른 빛줄기로 변해 그 뒤를 쫓았다. 여인의 몸에 영기의 빛이 흐르고 다시 피부가 녹색으로 변해 멀리서 보면 목족과 분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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