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화. 목봉(木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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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온갖 의문에 사로잡혔지만 잠시 침묵하다 은색 부적 문자를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엽 수사, 이분은 누구신지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차분히 입을 열며 하강했다.
“소개해 드릴게요. 이 분은 저희 양족이 파견한 첩자인 엽 씨 가문의 엽초 수사입니다. 한 수사의 모습을 보니 목족의 추적 따위는 가볍게 벗어나신 것 같군요.”
엽영은 작게 웃으며 한립을 보고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전혀 다친 곳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엽초 수사라. 수사께서는 인족입니까? 아니면 요족입니까?”
“보는 눈이 있군. 난 인족이지만 목봉(木鳳)의 피를 지녀 반쯤은 요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인이 냉랭히 한립을 한 번 보고 대답을 하는데 목소리가 약간 이상했다.
“목봉이요? 하아, 수사께서는 연허의 수행을 지니신 분이셨군요.”
엽초의 대답에 한립은 의식으로 그녀를 훑고는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
“언니는 저희 엽 가 출신으로 목족에 잠입할 때 이미 연허 초기의 수행을 지녔었죠. 그간 연허기를 대성해 합체기도 시간문제에 불과해요.”
소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설명했다.
“목족에서 머물며 얻은 수확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이 정도 경지에 이를 수도 없었겠죠. 다만 소주(少主)께서 직접 와 주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엽초는 엽영의 말에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랬군요. 선배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모두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상대가 연허기 수사라는 것을 안 한립이 숨을 고르고 공손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는 상황이 긴박해 자세히 묻지 못했네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목족들이 매복해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죠? 그리고 다른 분들은요?”
엽영이 미소를 거두고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전부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여 년 사이 목족이 무슨 정보를 들었는지 내부에 양족의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더군요. 저도 목봉의 피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수색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하나둘 신분이 드러나 제거 당했고요.”
엽초는 뜻밖에도 비보를 전했다.
“이번에 매복을 당한 이유는 목족이 이미 흑엽삼림 주변 몽라수의 감시 범위를 조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소주께서 숲에 들어온 순간 그들에게 행적이 노출되었겠지요.
다행인 것은 목족 고위층 수사들이 흑엽삼림 일대를 중시하지 않아 은계 하위 목령을 보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숲에서 매복을 당했다면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랬군요. 언니, 지난 천 년 간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엽영이 안색을 풀고 엽초의 노고를 치하했다.
“아닙니다. 목족에 있는 동안 적잖은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으니 괜한 고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제 정체를 들켰을 테니 더는 목족에서 버틸 수 없겠지요.”
엽초는 대수롭게 않게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천연성에 곧 큰 전투가 벌어질 것 같으니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가주께서 언니를 불러들이셨을 거예요. 현재 언니의 수행으로 목족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일이니까요.”
엽영이 가볍게 웃었으나 내상이 심한지 바로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소주 괜찮으십니까? 봉령환(鳳靈丸)을 하나 더 복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아니에요! 얼마 남지 않은 봉령환을 낭비할 수는 없어요. 나머지는 크게 쓸데가 있을 테니까요.”
“엽 소저, 상태가 심각한 것입니까?”
지켜보던 한립이 끼어들었다.
“은계 목령의 일격을 받았는데 상태가 심각할 것 같아요? 아닐 것 같아요?”
소녀가 입을 비죽이며 투정했다.
“일반적인 내상이라면 수사의 상태에 도움이 될 만한 단약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한립은 차분히 소매를 털어 약병 몇 개를 던져 주었다. 소녀가 허공을 쥐어 약병들을 끌어오더니 일일이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아보았다.
“묘지단(妙芝丹), 백성환(百聖丸), 회령수(回靈水)……. 씀씀이가 대범 하시네요. 요상을 하는데 더없이 좋은 성약들을 내주시다니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도 단약에 대해서 박식한지 줄줄이 단약의 이름을 말하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화신기 수사가 이런 단약들을 내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소녀는 그 자리에서 약병을 기울여 요상에 좋은 영약들을 복용했다. 한립을 꽤나 믿는 태도였다.
한립은 속으로 그녀의 과감함에 감탄했다. 물론 십중팔구는 특수한 비술을 익혀 단약에 이상한 수작을 부려놓았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맞다, 한 형께서는 이곳을 어찌 찾아오신 것입니까? 또한 조금 전 그 부적은 은과부(銀蝌符)겠지요.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게 고명한 은과문 부적은 처음 이라 신기해서 그럽니다.”
단약을 털어 넣고 안색이 한결 나아진 엽영이 태일화청부에 대해 물어왔다.
“제가 추적술에 약간의 성취가 있습니다. 우연히 얻은 것인데 은신을 하는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지요. 이름은 태일화청부입니다. 그런데 엽 소저께서 한 눈에 꿰뚫어보셔서 제가 더 놀랐습니다. 수사께서는 어찌 저를 찾아낸 것입니까? 연허기 수사라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제가 수련한 공법이 은닉술과 상극이라 할 수 있어서요. 은과부의 은신을 알아본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참에 한립은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지만 엽영도 묘한 표정으로 두리뭉실 넘어가려 했다. 쓴웃음이 절로 나는 일이었다. 서로 뻔히 허언인줄 알면서도 자세히 물어 볼 수 없었다.
“언니, 목족에서 알아낸 정보들은 지니고 계시겠죠? 다른 문제가 생기기 전에 얼른 옥간을 천연성에 넘기는 것이 좋겠어요.”
“예, 소주.”
소녀가 고개를 돌려 제안하자 엽초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드디어!’
한립은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때 엽영이 저물탁을 스쳐 은빛 찬란한 삼각형의 진법 법기를 꺼내들었고 초록 피부의 여인은 입을 벌려 청록색 옥간을 분출했다.
진법 법기는 한립도 하나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작은 물체를 천연성으로 보낼 수 있는데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했다. 전송이 완료되면 자동으로 효력이 사라졌다.
이 법기는 최근에서야 천연성 연기 종사들에 의해 개발된 물건이었다. 만일 목봉의 피를 지닌 엽초가 목족에 잠입할 때도 이런 물건이 있었다면 그들이 굳이 정보를 전달 받으러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엽영이 진법 법기에 하얀 법결을 때려 넣자 전송 법기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법기를 놓아주자 허공에서 하얀 전송진으로 변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우웅!
“어서요. 소형 전송진이지만 목족의 주의를 끌 수 있어요.”
소녀는 서둘러 말했다. 엽초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기에 바로 전송진으로 옥간을 던져 넣었다.
엽영이 신중한 표정으로 다시 법결을 쏘았다.
웅!
그러자 진법에 은색 부적 문자가 떠오르고 옥간은 맑은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어 전송진이 붕괴되어 은색 진법 법기로 돌아왔지만 새겨져 있던 진법이 완전히 훼손되어 금이 가 있었다.
한립은 기쁜 마음으로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옥부(玉符)를 꺼내들고 주시했다. 출발 전 천연성 고위층이 내어준 만리부의 절반이었다.
소녀가 그것을 보고는 진법 법기를 회수하고 자신도 만리부 반쪽을 꺼내 지켜보았다.
파앗.
막 일다경이 지났을 때 한립과 엽영의 만리부에 영기의 빛이 반짝이며 글자가 나타났다. 한립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빼곡하게 나타났던 문자들은 옥부를 가득 채운 다음 하얀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자 한립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천연성은 약조한 대로 멸진단 약병의 금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보아하니 임무만 완수하면 그들이 자유롭게 다니도록 묵인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았다.
흥분한 마음으로 고개를 든 한립이 바위 위에 앉은 엽영을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만리부를 보고 있었고 입 꼬리가 크게 휜 것이 아주 만족스러운 내용이 적혀있는 듯 했다.
‘뭘까?’
본토 수사들은 멸진단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면 천연성 고위층이 무엇을 약속했기에 이런 위험을 감수하려 한 걸까.
“어때요? 한 형께서는 원하던 것을 얻으셨나요?”
소녀가 드디어 옥부에서 시선을 떼고 한립을 향해 빙긋 웃었다.
“예, 필요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한립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다면 어서 이곳을 떠나죠. 수사께서 앞으로 어찌 하실 예정인지는 몰라도 목족의 세력권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소녀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자 한립은 엽영을 잠시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그의 대답에 기뻐했고 엽초 여인에게 무어라 말했다. 엽초가 그 말을 듣고 보물 한 가지를 방출했다.
그것은 한 척 크기의 노란 나무 새 꼭두각시였다.
여인이 법결을 발동하자 나무새가 허공에 날아올라 순식간에 열댓 장 크기로 거대해졌다. 살아 있는 새를 보는 것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보물이었다.
엽영과 엽초는 고민 없이 올라섰고 한립도 잠시 주저하다 결국에는 몸을 날렸다.
“가자!”
엽초의 날카로운 명에 나무새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노란 빛 덩이로 변한 꼭두각시 새가 빠르게 나아갔다.
한립이 두 여인을 만나 임무를 완수하고 자리를 뜰 때까지 아무도 농동이나 소홍을 언급하지 않았다.
나무새가 공터를 떠나고 반나절 후 은색 빛줄기가 날아와 그 자리를 맴돌다 나무새가 떠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 달 후, 노란 빛덩이가 천천히 황무지 위를 지나갔다. 그들이 출발한 후 엽초는 전력으로 나무새를 부려 질풍처럼 이동했고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일선천 입구가 보일 것이다.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광풍이 불고 먹구름이 들이닥치더니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늘이 새까맣게 변했다. 짙은 먹구름으로 가려진 고공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쩌렁 쩌렁하게 울려댔다.
크아아앙!
울음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너무 분명해서 엽영과 엽초의 안색도 급변했다.
“이건…….”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르릉 콰쾅!
그 순간 어두운 하늘을 은색 뇌전이 가르며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번갯불이 번뜩하는 순간, 금색의 커다란 눈 두 개가 그들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음산한 시선에 한립은 소름이 돋았고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용, 진룡(眞龍)의 머리다. 절대 교룡 따위의 머리가 아니야!’
저 멀리 하늘 위에 떠있는 거대한 물체를 보고 한립이 기겁했다.
거대한 머리는 경전에서 보았던 진룡의 모습과 똑같았다.
금빛이 찬란한 진룡의 머리는 마치 황금으로 만든 것 같았고, 한 쌍의 뿔이 반짝이며 솟아 있어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진룡이 아니군요? 비록 진룡의 기운을 닮았지만 체내의 영력이 기껏해야 합체 중기의 요수와 비슷합니다. 진룡급 존재가 이럴 수는 없지요.”
돌연 엽초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진룡이 아닌 존재가 진룡의 육체를 지니고 있다라……. 진룡의 피를 지닌 이가 억지로 피의 힘을 끌어와 만들어낸 진룡의 혼백이란 소리네요.”
그녀의 말을 들은 엽영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진룡지혈(眞龍之血)! 그럼 농 가의 인물이 수작을 부린 거란 말입니까!”
엽초가 눈썹을 찡그리며 살기 어린 표정을 드러냈다.
“네, 그렇다고 봐야지요.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임무에 참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농 가의 소주(少主) 역시 배치되었으니까요. 아마 저를 노리고 일부러 이번 여정에 낀 듯합니다.”
“소주를 노리고 말입니까? 그럼 소문대로…….”
무언가를 떠올린 엽초의 눈빛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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