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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11화 (568/2,000)

811화. 적을 물러나게 하다

*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고 푸른 빛 줄기로 변해 계속 날아갔다.

이후에도 몇 차례 목족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수행이 높지 않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쾌속으로 상대를 격살해 시간을 아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도망간 지 반나절 만에 드디어 진짜 골칫거리를 만나게 되었다. 보라색 요대를 한 목령 두 명과 맞닥뜨린 것이다.

한 명은 체구가 우람한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호리호리한 여인이었다. 그들 뒤로 노란 방망이를 든 은백색 털을 지닌 목원수도 네 마리나 서 있었다.

네 마리의 괴수들은 눈빛이 형형했고 한립을 보는 표정에서 지능이 발달한 개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립은 그들이 풍기는 위험한 기운이 남녀 목령만큼 위험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령 목령은 인족의 화신급 존재와 맞먹었다. 이제 만 리 정도만 가면 흑엽삼림을 벗어날 수 있는데 그들에게 붙들려 있을 수는 없었다.

눈앞의 괴수들과 목족들을 보는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의 손이 돌연 뒤통수를 스치자 대량의 회색 기운이 치솟아 굵직한 거대 고리로 응결했다. 족히 2, 30 장은 될 법한 거대 고리가 빙글빙글 회전하며 적들의 시선을 끌었다.

동시에 그의 소매가 펄럭이자 72개의 검이 소리 없이 튀어나갔다. 원자신광으로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대경검진을 펼쳐 전부 몰살시킬 생각이었다.

*     *     *

같은 시각 소홍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전방의 녹색 그림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마주친 이들 역시 보라색 요대를 찬 목족인 세 명이었다.

또 다른 방향, 농동이 변한 금색 빛줄기가 쾌속으로 날아가고 있었고, 황금빛 털을 휘날리는 목원수가 오색찬란한 광채를 내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금색 빛줄기 속의 농동은 이미 금룡의 형상을 잃었기 때문에 가끔 뒤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결코 맞붙을 생각은 못했다.

백여 리만 더 가면 흑엽삼림의 가장자리였다.

*     *     *

또 다른 방향, 엽영이 변한 하얀 빛줄기가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갔고, 몇 리 뒤로 은색 빛줄기가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두 빛줄기는 나타났다 사라지며 순식간에 천 장을 더 날아갔다.

한 동안은 하얀 빛줄기도 은색 빛줄기를 떨굴 수 없었고, 반대로 상대도 하얀 빛줄기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은 흑엽삼림 지대를 벗어났다.

*     *     *

한립은 허공에 떠서 검진 속의 무수히 많은 금실들이 한 곳으로 응결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은색 목원수가 산산조각 난 후에야 그는 작게 탄식하며 수결을 거두었다.

우웅!

수백 개의 검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72개의 금빛 검으로 돌아오더니 즉시 한립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검진이 있던 곳에는 대량의 핏빛 안개가 뭉쳐 있었다.

이에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72개의 비검이 펼친 진정한 대경검진의 위력은 그의 예상을 초월했고 그 안에 갇힌 자계 목령 두 명과 목원수 네 마리는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사라졌다.

농동의 말대로 청원자가 연허기 수행으로 대경검진을 수행해 합체기 수사를 상대했다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한립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비검들을 회수하자마자 흑엽삼림 바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반 시진 후, 그는 결국 흑엽삼림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검푸른 수목을 벗어난 그는 백여 리를 더 날아가 품에서 태일화청부를 꺼내 붙였다. 그러자 그의 몸이 허공과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한립은 안심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숲을 벗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흑엽삼림 방향에서 두 개의 노란 둔광이 날아들었다. 귤색 요대를 맨 목령 둘이었다. 은계 목령을 따라 그들을 기습하려다 엽영이 펼친 술법에 갇혀 있던 고계 목족들이었다.

그들은 한립이 있던 곳을 선회하며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 전 태일화청부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고계 등계(橙階) 목령들의 추격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 리를 더 날아가고 목족들의 추적을 완전히 벗어나자 한립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부적 문자가 빛나고 몸이 원래의 형태를 되찾자 영기의 빛이 한 덩이로 뭉쳐져 태일화청부도 부적으로 변했다.

한립이 부적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 흔들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후 작은 산으로 내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옥간이 훼손되다니! 이번 임무는 실패란 말인가.’

그렇다면 멸진단을 얻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시 천연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야……. 은계 목령을 기습한 정체불명의 인물은 양족에서 파견한 첩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옥간이 가짜였을 가능성도 있고 어차피 진짜 목족의 정보는 그 자가 지니고 있겠지.’

양족의 첩자만 찾으면 임무는 완수할 수 있다. 한립은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도 필요한 정보를 유추해 냈다. 보아하니 엽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찾느냐 인데…….”

한립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고는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손바닥만 한 금색 표범이 바닥에 엎드렸다. 바로 표린수였다.

짐승은 비취색 눈동자를 굴리며 귀여운 얼굴로 낮게 울었다. 이에 한립은 즉시 푸른 진법 법기를 꺼내 주술을 외웠다. 그러자 진법 법기 표면에 우윳빛의 점이 반 척 위로 떠올랐다.

휘익!

한립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작은 짐승을 가리켰다. 그런데 표린수가 어물쩍 시선을 피하며 바닥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닌가.

“…….”

일순간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제혼수와 함께 있더니 게으름 병이라도 옮은 건가? 그러나 지금은 표린수와 사소한 일로 싸울 때가 아니었다. 그는 얼른 저물탁에서 작은 비취색 병을 꺼내 새빨간 단약을 던져 주었다.

그 모습에 표린수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펄쩍 뛰어올라 입으로 단약을 받아먹더니 머리와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어 대며 더 달라고 아양을 떨었다.

그러나 한립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진법 원반 위의 빛의 점을 가리켰다. 의식을 통해 영수에게 뜻을 전달한 것이다.

작은 짐승은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튀어 올라 원반 위에 올라섰다.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던 표린수는 우윳빛의 점을 꿀꺽 삼켰다.

끼잉.

표린수는 두 눈을 감고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청록색 눈을 번쩍 뜨고 낮게 울었다. 그것을 보고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이 작은 요수는 신법이 극히 빠르고 몸이 단단한 것 외에도 추적에 능했다.

일단 감응했던 존재라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아니면 은닉술을 펼쳤든 금제를 걸어 두었든 백만 리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위치를 찾아냈다.

이런 추적 능력은 후각이나 오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식상의 기묘한 감응 능력 덕이었다. 한립도 태일화청부를 사용하지 않고는 표린수의 추적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진법의 우윳빛 점은 엽영이 출발 전 일행들과 나눈 정순한 영기였다. 서로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파팍!

작은 짐승은 네 다리를 쭈욱 펴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노란 그림자로 변해 튀어나갔다. 한립은 바로 그 뒤를 쫓지 않고 수결을 맺어 지면에 푸른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땅 속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은색의 화염이 불새의 형상을 하고 튀어 나왔다. 흑엽삼림에 들어가며 매복시켜둔 서령불새였다.

한립은 만일을 대비해 흑엽삼림을 나오고도 서령불새를 회수하지 않았고 은색 화염은 극히 빠른 속도로 지하에서 그를 뒤쫓아 오고 있었다.

불새가 진짜 영수는 아니었기에 형태를 유지하는데 약간의 법력이 소모되기는 했지만 지금의 수행에 그 정도는 문제없었다.

서령불새가 별 탈이 없음을 확인한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 손을 뻗어 불새를 돌아가게 했다. 아직 위험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데 미리 불새를 회수할 생각은 없었다.

일을 마친 한립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표린수가 사라진 쪽으로 날아갔다. 작은 짐승은 한동안 북쪽으로 향하다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뒤따르던 한립은 움찔했지만 군말 없이 표린수를 따라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표린수는 여러 번 방향을 틀고 또 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립도 표정이 굳어갔다.

이런 복잡한 움직임은 엽영이 아직도 쉼 없이 움직이고 있고 누군가의 추격을 받는 중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빈번하게 방향을 바꾸어 날아가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립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살아나갈 방책 정도는 몇 가지 갖고 있었다. 오히려 엽영의 행적에 멸진단을 획득하느냐 마느냐가 걸려 있었기에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립은 표린수를 바짝 뒤쫓았다. 추적은 삼일 밤낮을 이어졌지만 그는 엽영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흘 째 새벽, 끝없이 펼쳐진 수면 위를 건너던 표린수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한립은 표정이 달라져 짐승 곁으로 다가갔다.

털이 복슬복슬한 표린수는 고개를 들어 낮게 낑낑거렸는데 무어라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겠으나 영수의 주인인 한립은 단 번에 알아듣고 희색을 드러냈다.

“머지않은 곳에 멈춰 있다고? 그럼 이제 너는 쉬어도 된다.”

한립이 손가락을 튕기자 새빨간 단약이 표린수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표린수는 좋아하며 단약을 집어 삼킨 뒤 우윳빛 점을 토해 내고 다시 한립의 소매 속으로 돌아갔다.

진법 원반을 꺼내 우윳빛 점을 회수한 한립은 다시 태일화청부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상당히 암담해진 부적을 보던 한립은 잠시 망설이다 생김새는 똑같지만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 보라색 부적을 꺼냈다.

만황세계에 오기 전 고생 끝에 마련한 부적들이었지만 전방에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새 것을 사용해 몸을 숨기는 것이 나을 듯했다.

낡은 부적을 넣어놓고 새 부적을 붙이자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수면은 끝이 보이지 않을 듯 이어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섬이 나타났다.

그곳은 십여 리 규모의 섬으로 초목이 무성했고 드나드는 이가 없는 곳 같았다. 한립은 섬 주변을 살피다 중심부를 향해 조용히 날아갔다. 바로 표린수가 말해준 위치였다.

섬 중앙에는 별로 넓지 않은 공터가 있었고 회백색 암석들이 쌓여있었다. 암석 중 하나에 하얀 장포를 입은 소녀가 창백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옆에는 목족으로 보이는 여인이 공손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놀란 한립은 허공에 멈춰 서서 낯선 여인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보통 목령처럼 똑같이 옅은 녹색을 띠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그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귤색 요대가 매어져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의 다른 목족들과 달리 엽영을 바라보는 모습은 숙연했다. 의식으로 자세히 살피니 강대한 불 속성 영력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른 목족들이 정순한 나무 속성으로 가득 찬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목족이 아니다.’

한립의 시선이 이번에는 엽영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핼쑥했고 가슴에 핏자국이 보였는데 붉은 꽃들이 피어난 것처럼 눈길을 끌었다.

부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바로 모습을 드러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소녀가 고개를 들어 빙긋 웃어 보였다.

“한 형, 오셨으면 내려와서 잠시 쉬어가시지요.”

‘…….’

화들짝 놀란 한립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의 은신술을 단숨에 꿰뚫어 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일화청부는 합체기 수사들은 몰라도 연허급 수사들도 속여 넘겼다.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향해있었다. 여인의 의식이 합체기 수사와 맞먹지 않는 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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