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7화. 서금충의 위력
*
한립은 구렁이로 변한 혀들이 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감지했다.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것을 지켜본 한립은 두 손을 다시 검은색과 흰색으로 변하게 했다. 이어 검은 손 손등에 은색의 작은 동산 문양이 나타났고 손가락이 몇 배로 굵어졌다.
콰직!
피가 튀기며 구렁이 한 마리가 으깨져 절단났다.
백옥처럼 하얀 손에서는 다섯 해골 머리들이 나타나 구렁이를 마구 물어뜯었다. 해골들은 즐겁게 시시덕거리며 포식했고 구렁이는 정혈을 잃고 바짝 말라비틀어졌다. 한립이 원자산과 오자동심마를 자신의 양손에 응결해 일체화시킨 결과였다.
이런 방식은 백맥연보결(百脈煉寶決)에 적힌 독특한 수련법이었다.
신체를 보물로 제련하는 데는 길고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유용한 보물이 있고 그것을 응결하기만 하면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립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신수의 두 혀가 변한 구렁이들을 멸해버렸다.
노도사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자 분노했다. 또 다시 고통에 몸부림치던 신수 머리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신수는 검은 기운으로 변해 뛰쳐나왔고 도중에 신형이 모호해지더니 투명하게 사라졌다.
괴력과 환술에 이어 은신술까지 펼칠 줄 알았던 것이다. 잠시 후 한립 주위에서 괴물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는데 정확히 어딘지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명청령안을 발동해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기에도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한립은 피식 웃어버렸다.
웽! 웽웽!
그의 두 소매 속에서 곤충의 소리가 들리며 수없이 많은 금빛 점들이 쏟아졌다. 금빛 점들은 나타나자마자 몸을 키워 각각이 반 척 크기의 거대한 딱정벌레로 변했다. 한립이 정성을 다해 길러 겨우 성체로 키워낸 서금충이었다.
거대한 곤충들이 천 마리 넘게 떠오르자 온 하늘이 서금충으로 뒤덮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웽웽웽웽웽!
주변에 숨어 기회를 보던 거대한 몸집의 신수가 서금충 중 몇 마리와 충돌했고 한립의 조종을 받은 영충들이 벌떼처럼 모여 들어 괴물을 둘러쌌다.
신수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즉시 검은 기운으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일반적인 영충이었다면 무형의 기운으로 변한 신수를 어쩌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이 또 벌어졌다.
딱정벌레들의 발톱에 금빛이 감돌더니 검은 기운을 꽉 붙들고 갉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천 마리가 넘는 거대 딱정벌레들이 갉아먹자 방대한 육체를 지닌 신수의 기운도 순식간에 10분의 1이 사라지고 말았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며 검은 기운이 요동쳤고 그 속에서 열댓 마리의 가느다란 금은색 뱀들이 나타나 한 마리씩 서금충을 삼켰다. 순식간에 성충의 서금충 열댓 마리가 검은 기운이 변한 뱀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웽!
그러나 곧바로 금은색 뱀들이 몸을 비틀며 떨어져 내려 검은 기운으로 돌아갔다. 그것들이 삼킨 금색 서금충은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날아올랐다.
검은 기운은 다양한 괴물들을 만들어 영충을 막으려 했지만 성충이 된 서금충을 상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기력을 소모해서 더욱 빨리 먹혔다.
한립이 영충 떼를 풀고 검은 기운이 먹히기까지는 너무 순식간이었다. 멀리서 뚫어져라 거대한 금빛 딱정벌레를 살피던 노인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서, 서금충! 서금충 성충!”
노도사는 혼자 중얼 거리다가 주저 없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붉은 빛이 번뜩이고 적영이 노도사의 두개골 위로 나타나 그대로 몸을 날렸다. 붉은 빛줄기가 번뜩 이동하며 하늘 저편으로 달아난 것이다.
허공에 남아 있던 노도사의 몸은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되었고 한 줄기 바람에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한립은 상대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런 기이한 짐승까지 두고 달아난다고? 그 정도로 성체인 서금충이 유명하단 말인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서금충들이 검은 기운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턱을 쓰다듬은 그가 손짓을 해 영충들을 불러 모았고 금색 서금충들은 다시 쌀알 크기로 작아져 그의 소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려다 돌연 안색이 창백해져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언제 의식을 이렇게 소모한 거지. 거의 원신(元神)을 상할 뻔 했잖아!’
서둘러 자신의 상태를 살핀 한립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연허기 수사와 비슷한 의식을 지닌 그가 7, 8할의 의식을 탕진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빨리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의식을 소모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그는 조금 전 성체 서금충을 부린 것을 떠올리자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한립은 소매 속으로 금빛 하나를 날렸다. 금빛은 거대한 딱정벌레로 변해 그가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자신의 의식을 차분히 지켜보던 그는 멍해졌다.
영충 한 마리를 불러내서 부리는데도 천천히 의식이 소모되는 것이 느껴졌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만일 천 마리 이상을 한꺼번에 부리면 의식 소모가 얼마나 극심할지 뻔했다.
현재의 의식으로는 아주 잠깐 밖에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더욱 무서운 일은 자신의 의식을 이용해 주시하지 않으면 소모되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립은 조금 울적했다. 서금충 성체를 얻은 일로 기뻤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8천 마리의 서금충 성체를 지니고 있으니 일단 방출하면 강적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영충들이 의식도 빨리 소모시킬 것이다.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는데 성체가 된 후에는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의식이 유실되는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마음 놓고 서금충을 부리겠는가! 한립은 서금충을 향해 손짓했다.
웽.
금색 영충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아 그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의식 한 줄기로 영충의 몸을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한숨을 쉬던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털어 서금충을 날려 보냈다. 다시 의식으로 서금충을 살피다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서금충 주변을 맴돌던 의식 한 줄기가 점점 약해지며 거대한 영충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였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의식을 크게 소모한 원인은 성체인 서금충이 움직일 때 저절로 영충을 부리는 의식을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한참 미간을 좁히고 궁리했지만 바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의식은 하루 정도 정좌를 하고 휴식을 취하면 회복되었다. 하지만 전투중이라면 대량의 의식 손실이 큰 문제였다.
‘해결책을 찾기 전에는 아주 급한 순간에만 써야겠구나.’
서금충 성체를 본 적영이 화들짝 놀라 달아난 것으로 보아 영계에서도 서금충의 악명이 자자한 것 같았다.
인계에서 마도 수사가 집대성한 소위 기충방(奇蟲榜)이란 목록을 한립은 이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저계 수사들이 보는 기이한 영충의 관점과 고계 수사들이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금충 성체의 위상은 그의 예상을 초월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로 하고 바로 방향을 잡아 날아올랐다.
일행 중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면 아마 그곳에서 모일 것이다. 서로에게 남겨둔 영기 표식은 사라졌지만 특별한 연락 방식이 있어 너무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찾을 수 있었다.
* * *
열흘 뒤, 푸른 빛줄기가 사막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푸른색이기는 했지만 무슨 비술을 썼는지 흐릿하고 투명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었다.
둔광의 주인은 한립이었다.
10일간 아무 일도 없었고 영족의 추격을 받지도 않았다. 적영이라던 영족은 서금충을 보고 그대로 달아나 버린 듯했다. 이에 한립은 안심하고 줄곧 묵묵히 길을 서둘렀다.
적영과의 전투로 소모한 의식도 오는 동안 서서히 회복되었다.
한립이 옥병을 들고 만지작거렸다. 멸진단이 들어있는 약병으로 천연성을 출발할 때 수령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위험한 임무를 할당받은 비승수사라면 누구나 충분한 멸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임무 도중 달아나거나 임무에 성실히 임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약병에는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약병을 여는 것이 불가능했다.
강제로 열거나 깨트리려고 하면 약병이 폭발해 멸진단도 훼손될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이 검증되면 천연성 쪽에서 만리부를 통해 금제를 푸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어 있었다.
약병을 쓸어보던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곧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약병이 사라졌다. 전방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거대한 조류 떼가 노란 날개를 펄럭이며 떠 있었다.
거대 새들도 한립을 발견하고 날카롭게 울며 날아왔다.
괴조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한립이 한숨을 내쉬고 신형을 번뜩였다. 다음 순간 그는 수십 마리의 노란 괴조 떼 위에 나타났고 소매 속에서 빛을 뿜었다.
꽈과광!
금은색의 뇌전들이 뻗어나갔다. 경천동지할 굉음과 천둥소리 속에서 노란 조류 떼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다시 길을 재촉했다.
* * *
절반 밖에 남지 않은 거대한 돌기둥과 바람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남은 벽들이 이곳이 상고 시대 건축물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곳곳에 세월이 흐른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돌담 아래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근처에는 보라색 장포를 입은 청년이 이리저리 거닐었다.
둘 다 좋지 않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 채였다. 그들은 소홍과 농동이었다. 청년은 혈색이 괜찮아진 것으로 보아 핏빛 검을 사용해 소진한 정혈을 상당히 회복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최상의 상태를 회복하려면 몇 년은 더 요양해야 할 것이다.
잠시 후, 여인과 청년은 무엇을 감지했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금빛 빛줄기가 소리 없이 날아들었고 그 안에서 하얀 장포의 소녀가 나타났다.
“소 수사와 능 수사시네요. 오래 기다리셨죠?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엽영은 멀쩡한 모습으로 빙긋 웃었다. 그녀의 말에 소홍이 예의상 미소를 머금었고 농동은 남몰래 희색이 스쳤다.
“엽 소저처럼 영민한 분이라면 무사히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두 수사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 형은 당시 영족에게 잡혔으니 큰 기대를 할 수 없고, 한 형도 아직까지 연락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영족의 추적을 받아 변고를 당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동이 탄식하며 말했다. 소홍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다물었다.
“이 형은 정말 잡혔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한 수사의 경우는 다르니 며칠 더 기다려 보죠.”
엽영이 허공에서 내려와 두 사람 앞에 섰다.
“며칠이요? 지금이 일선천의 모래 폭풍이 1년 중 가장 약할 때입니다. 이때를 놓칠 수 없으니 길어야 이틀 정도 더 기다릴 수 있겠군요.”
“하루 이틀이면 될 것 같네요.”
소홍이 담담히 고개를 흔들자 엽영은 반박하지 않고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웅!
반나절이 지났을 때 맑은 울음소리가 세 사람의 몸에서 동시에 울렸다. 셋이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었는데 농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정위반(定位盤)을 발동하지요. 한 수사께서 정말 별 일 없이 돌아왔다니 다행입니다.”
농동이 소매를 펄럭여 푸른 진법 원반을 꺼내고는 한 손을 들어 수결을 맺은 후 법결을 때려 넣었다. 농동이 합장을 하자 영기의 빛을 뿜던 진법 원반이 자취를 감추었다.
일을 마친 그는 뒷짐을 지고 서서 기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