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화. 사막 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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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던 농동도 두 명의 수사들에게 따라 잡혀 있었다. 육신을 버리고 진짜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녹영(錄影)을 앞에 두고 그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농동의 몸에서 노란 빛이 반짝였고 다시 전신을 뒤덮는 갑옷이 생겨나 몸을 보호했다. 또한 그의 등 뒤로 한 장 크기의 구리 날개가 펼쳐졌고, 두 손을 마주대자 그 사이에서 피처럼 붉은 괴상한 칼날의 장검이 손에 들렸다.
검은 삼 척 정도 길이에 피를 응결해 만든 것처럼 핏기가 감돌았다. 농동의 입가에 핏빛 반점이 더욱 진해진 것처럼 보인 순간 장검이 푸른 그림자들을 향해 가볍게 움직였다. 아무 기척도 없는 일격이었다.
그러자 녹영들은 비명을 지르며 표면에 무수히 많은 하얀 실이 생겨났고, 영기의 빛이 반짝이며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농동이 다시 장검을 휘두르자 하얀 실이 다시 반짝이며 녹영들의 조각마저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간단히 녹영 둘을 해치운 농동은 말없이 핏빛 검을 흔들었다. 검이 녹아내리며 짙은 핏물로 변해 그의 손바닥으로 흡수되었다. 한숨을 쉰 그는 안색이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대량으로 피를 잃은 사람처럼 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저물탁에서 피 비린내가 나는 붉은 단약을 꺼내 복용하고 그대로 몸을 날려 달아났다.
* * *
사막의 다른 방향, 하얀 장포를 입은 소녀가 모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몇 장 밖에는 이미 싸늘하게 생기를 잃은 시체 네 구가 뒹굴고 있었다.
시체들은 상처 하나 없이 고요히 누워 있었고 그저 온 몸의 정기만이 사라져 있었다. 엽영이 우윳빛 옥병을 쓰다듬으며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는 신형을 날려 금빛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곳에서 십여 만 리 떨어진 곳.
청백색 뇌전이 번뜩이며 한립이 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그의 뒤로 검은 기운이 따라오는데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어떤 신통을 사용 하는지 떨굴 수가 없었다.
청백색 뇌전과 검은 기운은 번갈아 가며 순간이동을 계속했다. 검은 기운이 부르르 떨며 사라지고 1리 앞의 허공에서 나타나면 청백색 뇌전이 번뜩하며 사라져 거리를 벌리는 방식이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 그는 검은 기운 속의 노도사가 자신을 쫓는다는 것을 알고 풍뢰시와 질풍구변의 신법을 조합해 둔술을 극성으로 펼쳤다. 그런데 검은 덩어리가 속도도 빠르고 순간이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오랫동안 달아나고도 전혀 추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남간대사막이 광활하다지만 이종족이 빈번하게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달아나다가 다른 이족과 마주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원기를 크게 상하게 하는 혈영둔의 경우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최악의 순간이 아니면 펼치고 싶지 않았다. 사막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데다 일선천에 진입해야했기에 기력을 아껴둬야 했다.
‘보아하니 따라 붙은 영족과 잠시 손속을 겨뤄봐야겠구나.’
연허 중기 수사의 몸에 깃든 영족이라면 그의 신분도 낮지 않을 것이다. 연허급에 속하는 적영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이렇게 고계의 존재가 다른 이족이었다면 한립도 전투를 꺼렸을 것이다. 하지만 영족이라면 상극의 신통을 지닌 그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또한 천연성에 들어가 새롭게 개발한 보물과 공법을 아직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으니 이번에 적영을 상대하며 시험해 봐도 좋을 듯했다.
한립은 결론을 내리고 순간 이동을 해 등 뒤의 날개를 펄럭였다. 그때 검은 기운이 질풍처럼 백여 장 가까이로 다가왔고 멈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영족은 강제로 다른 종족의 원신이나 혼백을 삼키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하면 상대의 강력한 육신을 장악해 생전의 신통을 대부분 사용할 수 있어서였다.
그것을 아는 한립이 노도사가 가까이 접근하게 둘 리 없었다. 그는 즉시 두 손을 합장했다가 다시 펼쳤다.
꽈과광!
천둥소리가 울리고 사발 굵기의 뇌전이 그의 양 손에서 폭발하듯 분출해 검은 기운으로 떨어져 내렸다.
“흠.”
검은 기운이 번뜩하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한립이 콧방귀를 뀌자 미간 사이가 갈라지며 제3의 눈이 나타났다. 파멸법목에서 검은 실이 튀어나가 허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퍼퍽!
둔중한 폭음이 들리고 수십 장 밖의 허공에서 극렬한 파동이 전해졌다. 검은 기운에 휩싸인 노도사가 강제로 튕겨나오며 일갈했다.
“파멸법목! 그런 신통을 부리다니!”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릴 뿐 빠르게 법결을 외웠다. 굵직한 뇌전이 방향을 틀어 노도사의 뒤쪽으로 호되게 날아들었다. 노도사가 불길한 직감에 피하려하자 한립이 두 눈에 남색 빛을 일렁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노도사는 귓가에서 거대한 종이 울린 것처럼 귀가 먹먹하고 끔찍한 두통에 시달려 일순 몸이 굳었다.
꽈광!
금빛 뇌전이 검은 기운을 명중해 무수히 많은 뇌전 파편을 튕겼고 검은 기운이 꿈틀거렸다.
개굴개굴!
검은 기운 속에서 고통스런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꿈틀거리던 검은 기운이 노도사의 발밑에 뭉쳐져 거대한 괴물로 변했다. 괴물은 새빨간 네 개의 눈으로 한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도사를 보호하던 검은 기운의 정체가 사실은 괴물이었다니 예상 밖의 일이었다.
“대단하구나. 겨우 화신기 수사가 내 의식을 동요하게 할 만한 신통을 부리다니. 어디 한 번 더 해 보거라!”
노도사는 뇌전을 버텨내고 음산하게 소리쳤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뇌전을 발밑의 괴물이 대부분 흡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족에게 극약 처방이나 다름없는 대량의 벽사신뢰를 온몸에 받아내고도 멀쩡할 리 없었다.
다만 상대의 격장지계에 말려들어 실신자를 다시 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정신 공격은 의외의 빈틈을 노려야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는데다 강대한 의식을 지닌 연허기 수사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한립은 시간을 끌지 않고 먹처럼 새까만 손바닥을 노도사를 향해 뻗었다. 그러자 노도사의 머리 위에서 파문이 일며 거무튀튀한 작은 동산이 나타났다.
작은 동산은 빙글빙글 돌며 순식간에 백여 장 높이로 켜졌고 아래쪽으로 회색빛의 고리를 연달아 방출했다.
노도사의 얼굴이 굳었고 머리 위를 향해 소매를 털어 수정처럼 반짝이는 반 척 길이의 도를 꺼냈다.
도는 허공을 빙글빙글 돌아 눈처럼 환한 빛을 뿜어냈다.
무슨 보물인지 도에서 나온 빛에 닿자마자 회색 고리들이 연달아 흩어져 검은 산까지 공격당했다.
댕!
거대한 울림이 전해졌지만 검은 동산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도의 빛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에 미세하게 표정이 달라진 노도사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한립이 새하얀 옥처럼 변한 손을 뻗어 해골이 각인된 반지를 불러냈다.
노도사의 주변에 다섯 개의 거대한 해골 머리들이 나타나 입을 벌리고 다섯 줄기의 극한의 한염을 쏘아댔다. 하나로 융합된 화염이 노도사를 향해 몰아친 것이다.
조소하고 있던 노도사가 오색 화염을 보고는 안색이 급변해 온 몸에서 붉은 빛을 미친 듯이 분출했다.
파앗!
무수히 많은 붉은 검빛들이 사방팔방을 휩쓸며 별안간 한 송이 거대한 붉은 연꽃 모양을 형성했다.
연꽃이 빙글빙글 돌자 오색 화염이 말려들어 노도사에게 전혀 접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본 한립이 어두워진 얼굴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다섯 해골 머리가 괴성을 지르며 몸집을 키웠고 광포하게 붉은 연꽃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에에엑!
슥스걱! 스걱!
붉은 연꽃잎 속에서 회전하던 칼날들이 해골머리들을 무참하게 잘라댔지만 연꽃도 같이 터져나갔다. 붉은 빛과 오색 화염이 흩어지고 노도사가 놀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키하학!
키에에엑!
귀곡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다섯 해골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애달프게 울어대는 것이 노도사를 두려워하는 듯 했다.
작게 탄식한 한립이 이번에는 검은 산을 가리켰다.
쿠릉!
몸을 부르르 떤 검은 산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방대한 물체가 떨어져 내리는 압력이 대단한데도 노도사는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가볍게 발을 굴러 거대 괴수를 일깨웠다.
그러자 괴수의 뱀 머리가 입을 벌려 굵고 커다란 새빨간 그림들을 뿜어냈다.
쿠콰콰쾅!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산이 새빨간 그림자들의 공격에 튕겨나갔다.
이제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새빨간 그림자는 뱀 머리의 혀였는데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원자산이 변화한 산봉우리를 공격해서 날려버린 것이다.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허공을 쥐어 검은 동산과 다섯 개의 해골 머리를 회수했다.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확연히 구분되던 손이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고 원상태로 돌아왔다.
“허허, 보물이 넘쳐나는 녀석이구나. 그러나 그것들로 나를 어찌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이제 별 다른 수도 남아 있지 않겠지. ……본체를 불러내라!”
노도사는 생각보다 대치가 길어지자 참을성이 다했는지 발아래 거대 괴수를 향해 날카롭게 명을 내렸다. 무형의 파동이 도처에서 밀려들고 그 주위를 장악했다.
무수히 많은 오색찬란한 영기의 빛이 인근에서 몰려왔는데 크기가 제 각각인 물거품 형태의 괴물들이었다. 크기가 큰 것은 작은 동산만 했고 작은 것은 한 장 정도로 흉악한 얼굴로 한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환술?’
그 모습을 본 한립은 즉시 소매를 털어 동시에 수십 개의 금색 비검들을 풀어 놓았다. 비검들은 허공을 선회해 한 척 길이의 검으로 불어났다.
속으로 검결을 읊자 검들의 모습이 모호해졌고 똑같은 모양의 비검들이 몇 배로 불어 그의 주위를 물샐틈없이 보호했다.
하늘을 뒤덮은 검기가 종횡무진하며 주변 수십 장 내의 거품 괴물들을 도륙했다. 짐승들의 잔해가 쌓이고 괴성이 난무했다.
하지만 한립의 미간은 좁혀진 채 펴질 줄 몰랐다. 비검이 괴물들을 잘라내는 촉감이며 눈에 보이는 형상이 전혀 환영 같지 않았다.
그는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검들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한립의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멀리 신수 위에 서 있는 노도사가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주위의 괴수들도 무궁무진했지만 한립의 날카로운 검기에 사정없이 베어나가 수백 마리의 괴수를 죽였다. 이상한 일은 괴수의 잔해가 떨어져 내리지 않고 허공에 둥둥 떠서 피비린내가 점점 진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잠시 후, 한립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노도사 발밑의 신수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잘려나간 괴물들의 잔체가 검은 안개로 뭉쳐져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신수의 방대한 몸이 흐릿해졌다. 거대 괴물도 검은 기운으로 변해 검은 안개 속에 숨은 것이다. 수백 개의 금빛 검들이 검은 안개를 난도질했지만 검들은 안개 속에서 속도가 느려졌다.
그 틈을 타 검은 안개 속에서 기다란 붉은 그림자 두 개가 튀어나와 한립의 머리와 심장을 노리고 전광석화처럼 쇄도했다. 명청령안을 발동하고 있지 않았다면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웠을 빠른 속도였다.
얼굴을 굳힌 한립은 다른 보물을 불러낼 새도 없이 금빛이 감도는 몸으로 두 팔을 뻗어 붉은 빛들을 잡아챘다.
콰콱! 콱!
금색 손이 강대한 힘으로 새빨간 혀 두 개를 잡아챘다. 한립은 어깨를 잠시 떨었을 뿐 뒤로 밀려나지도 않았다. 그것을 본 노도사는 깜짝 놀랐다.
신수는 천부적으로 환술에 능할 뿐 아니라 영족 내에서도 혀의 괴력으로 이름이 높았다. 백여 장 높이의 산봉우리가 붉은 혀에 맞아 튕겨나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름 모를 화신기 청년이 맨 손으로 신수의 두 혀를 잡아챘고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흥! 신수의 신통이 괴력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도사는 진심으로 신수의 안위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두 혀에서 하얀빛이 방출되자 각각이 새빨간 구렁이로 변해 입을 벌려 한립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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