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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05화 (562/2,000)

805화. 신수(蜃獸)

*

“선배님을 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곳에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길게 숨을 들이마신 소홍이 먼저 나서 공손히 물었다.

“흑봉족 수사였구만. 노부는 자운상인이라 하네. 저 성은 노부의 일족이 세운 것이지. 모두 의아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알겠네. 하지만 이 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니 나를 따라 성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세.”

노년 도사가 인자하게 웃으며 한 팔을 들어 그들을 청했다.

‘자운상인?’

소홍은 상대가 자신의 내력을 바로 알아보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농동과 시선을 교환했다. 둘 다 ‘자운상인’이라는 칭호가 낯선 눈치였고 모르는 선배의 요청을 함부로 수락하기가 꺼려졌다.

“너무 걱정들 말게. 노부는 오랫동안 은거하며 지낸 터라 다른 수사들과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었지. 아마 자네들은 일선천을 지나려는 듯 한데! 그럼 잠시 노부의 당부를 듣고 가는 것이 좋을 게야. 최근 변고가 있어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화 입기 십상일 테니 말일세.”

노도사는 소홍 등의 표정을 보고도 너그럽게 설명했다.

자운상인의 말이 모두의 의혹을 가시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의도로 요청하니 수사들의 긴장감이 조금은 옅어졌다. 게다가 일선천에 변고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선배님께서 이렇게 청하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농동이 결정을 내렸다. 솔직히 성 안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지 않더라도 연허기 수사의 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농동의 말에 한립 등 다른 일행들은 더욱 반대하기 어려웠고 노도사를 향해 예를 올리고 제안을 수락했다. 이에 자운상인은 살갑게 웃으며 땅에 내려서서 성문을 향해 앞장서 갔다.

그것을 본 일행도 둔술을 풀고 경신술을 이용해 노인의 뒤를 쫓았다. 녹지에 가까워지자 호숫가에서 장난치며 노는 어린 아이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허허, 누추하지만 참아주게. 이곳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제대로 구색을 갖추지 못했네. 그래도 얼마 전 얻은 희귀한 영과가 몇 종류 있으니 그것을 맛보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노도사의 친절과 평화로운 분위기에 농동과 소홍 등도 자연히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앞에 이르자 그곳을 지키던 축기기 수사들이 양쪽으로 늘어서며 예를 취했다. 그들이 지나도록 길을 터준 것이다.

노도사가 소매를 펄럭이며 먼저 걸어갔다.

농동 등이 수비를 맡은 수사들을 의식으로 훑었지만 공손해 보이는 표정이며 기운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일행이 천천히 노도사의 뒤를 따라 축기기 수사들 사이를 지나갔고 한립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다.

쾅!

그런데 그때 고공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은색 화염 덩어리가 폭발하며 근처의 축기기 수사 하나를 공격했다. 은색 화염은 삽시간에 수사를 집어 삼켰다.

“이게 무슨.”

소홍 등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노부가 좋은 마음으로 후배들을 청했건만 빈도의 완배에게 손을 쓰다니!”

앞에서 걸어가던 노도사가 표정이 급변해 일갈하더니 순식간에 한립 앞에 나타났다. 그가 손을 들자 붉은 빛이 도는 거대 손이 한립의 머리를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한립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은색 화염이 축기기 수사를 불태운 찰나 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거대 손은 이미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 영기의 압력만으로도 몸이 굳어 천근만근이었다. 평범한 수사였다면 말 한마디 못하고 당했을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체쌍수를 수행했고 용린과(龍鱗果), 천시주(天屍珠), 쉬골결(淬骨決) 등의 비법을 이용해 단련한 몸을 지녔다. 범성진마공을 발동하지 않더라도 육체의 단단함이 요족 수사인 이 수사와 소홍을 넘어선다는 말이었다.

한립은 어깨를 털어 가뿐히 영기의 압력을 지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십 여장 밖에서 괴이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질풍구변의 신법이었다.

현재 그의 신체 능력과 상황을 고려해 풍뢰시를 사용하지 않고 신법을 운용한 것이다.

“어서 달아나야 합니다. 전부 영족(影族)이 깃든 꼭두각시들입니다.”

한립은 몸을 빼내자마자 큰 소리로 외치고 그대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은색 화염에 휩싸여 있던 수사가 고통스럽게 절규했고 몸 안에서 회색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림자 역시 은색 화염이 닿는 순간 화르르 타올라 사라져버렸다.

은색 화염으로 불시에 공격을 가하고 노도사의 반격을 피해 달아나기까지 찰나의 시간이었다.

소홍과 농동은 멍하니 있다가 한립의 경고를 듣고 대경실색해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갑시다.”

그들은 신속하게 네 개의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어딜!”

노도사는 한립이 자신의 일격을 피해 달아나자 잠시 멈칫했다가 다른 네 명도 달아나려는 것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소매를 펄럭이자 무수히 많은 붉은 실들이 나아가 허공의 둔광 중 하나를 휘감아 돌아왔다.

영기의 빛이 가시자 붉은 실에 꽁꽁 묶인 이 수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온 몸에서 검은 빛을 번뜩이며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붉은 실의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끊어낼 수 없었다.

이때 성 안에서 긴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다양한 색의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그것을 본 이 수사는 겁에 질려 고함을 쳤고 검은빛이 빠르게 몸을 타고 흐르며 신형이 커졌다. 등 뒤로 새까만 강철 날개가 펼쳐지고 양 손이 매의 발톱으로 변하며 반요의 형상을 띤 것이다.

요족에게 위급한 순간 가장 유용한 것은 강인한 신체였다. 특히 칠대 요족 중 하나인 현응족 출신인 이 수사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발톱에서 갑자기 한 척 길이의 검은 빛이 솟아올라 붉은 실을 갈라냈다.

이 수사는 갈라지기 시작한 붉은 실을 보며 희색을 드러냈다. 붉은 실만 벗어나면 현응족의 독문 둔술을 사용해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양 발톱을 계속 휘둘러 붉은 실을 완전히 끊어버리기도 전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잇!”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붉은 실이 다시 연결되면서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노 도사는 조소하며 신형이 모호해져 이 수사 앞에 나타났다. 그가 한 손으로 뒤통수를 매만지자 새빨간 그림자가 서서히 떠올랐다.

“적영(赤影), 과연 영족이었군!”

적영을 본 이 수사는 완전히 절망했다. 영족 중에서 인족의 연허급에 속하는 것이 적영이었다. 겨우 화신기 요족 수사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알면 되었다. 네 육신이 쓸 만해 보이니 본 존이 접수하마. 걱정 말거라. 나머지 녀석들도 곧 네 뒤를 따르게 해줄 터이니!”

노도사의 안광이 붉게 물들며 가느다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붉은 그림자가 수사를 덮쳐왔다. 이 수사는 꼼짝하지 못하고 적영이 달려드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헛꿈 꾸지 마시오!”

푹.

이 수사는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알고 이를 악물었다. 혀를 깨물어 피를 뿜어낸 그는 다시 엄지 손가락 만한 검붉은 구슬을 뱉었다. 구슬이 수사의 몸을 떠나자 청년의 두 눈이 암담해졌고 피부가 말라붙어 순식간에 백발의 노인처럼 몸이 쪼그라들었다.

뜻밖에도 오랜 세월 정성을 다해 품어온 요단(妖丹)을 분출한 것이다. 구슬은 검붉은 기운을 발산하며 팽창하다 스스로 폭발했다. 노도사가 놀라 눈을 부릅떴고 적영도 독사를 본 사람처럼 얼른 물러났다.

콰쾅!

경천동지할 폭음이 울리고 검은 기운이 열댓 장 넘게 퍼져 나가 돌풍을 일으켰다. 주변의 누런 모래들이 돌풍에 휘날려 황토색 풍룡(風龍)처럼 휘몰아쳤다.

몸을 피한 노도사는 열댓 장 밖에서 나타나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검은 기운이 그의 발목을 거머리처럼 잡고 늘어졌다. 얼굴을 굳힌 노도사가 갑자기 이상한 괴성을 내질렀다.

쉭!

이어 파공음이 울리고 갑자기 허공에 붉은 그림자가 나타나 검은 기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돌풍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검은 기운과 새하얀 눈썹을 지닌 이 수사도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한숨을 내쉰 노도사는 화를 감추지 않았다.

금제로 구속해놓았는데 이 수사가 스스로 요단을 폭발해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빛이 가시고 여덟 명의 남녀 수사들이 주변에 나타났다.

“계획이 틀어졌다. 놈들이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어. 허나, 오는 동안 영향(影香)을 방출해 놈들의 몸에 묻혀 두었다. 1시진은 향기가 지속될 테지! 나는 직접 신수(蜃獸)를 이끌고 이번 계획을 망친 녀석을 쫓을 테니 너희는 나머지 셋을 죽이거라.”

노도사가 음산하게 분부를 내렸다.

“존명!”

여덟 명의 수사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세 무리로 나뉘어 날아갔다.

노도사는 급히 뒤따르지 않고 입을 벌려 기괴한 소리를 연달아 질러댔다. 주변을 쩌렁쩌렁 울려 하늘 끝까지 들릴 법한 소리였다.

이어서 그가 성문을 가리키자 성문을 지키던 축기기 수사들의 몸에서 열댓 개의 회색 그림자가 빠져나와 노도사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텅 빈 축기기 수사들의 육체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어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호수 주변에서 물장난을 치던 어린 아이들과 범인들이 그의 괴성을 듣고 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작은 성마저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검은 기운이 솟아올라 뒤덮어버렸다.

개굴, 개굴, 개굴.

새까만 기운 속에서 귀를 찌를 듯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괴성을 멈춘 노인이 무표정하게 검은 기운을 가리키자 광풍이 일며 검은 기운이 흩날렸다.

그 안에 열댓 장 크기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이 앉아 있었다. 각각 금색과 은색인 두 개의 뱀 머리가 청록색 개구리 몸통에 붙어 네 개의 핏빛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모골이 송연해지는 모습이었다.

푹!

금색 뱀 머리가 뼈만 남은 잔해를 뱉어냈다. 조금 전 요단을 폭발한 이 수사의 잔해였다. 어느 틈에 괴물에게 통째로 삼켜져 이제는 뼈만 남았다.

노도사의 신형이 흐릿해졌고 다음 순간 괴물 머리 중 하나에 서 있었다.

“가자!”

그의 냉랭한 명령에 거대한 괴물이 풀쩍 뛰어 검은 기운으로 변해 종적을 감추었다. 노도사가 향한 곳은 한립이 달아난 방향이었다.

*     *     *

안색이 창백해진 여인이 붉은 빛줄기에 감싸여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표정이 달라진 그녀는 한쪽 소매를 털어 푸른 옥패를 꺼내 들었다. 옥패에 박힌 우윳빛 구슬 하나가 사분오열해 훼손됐다.

헛바람을 들이킨 여인이 구슬을 손가락으로 튕기자 퍽! 하고 완전히 깨져나갔다. 옥패를 회수한 여인은 전신의 법력을 끌어올려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러나 반 시진 후, 그녀는 놀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뒤쪽 하늘 저편에서 두 개의 영기의 빛이 번뜩이며 그녀를 추적해오고 있었다.

두 명이 힘을 합치니 속도는 극히 빨라 여인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은 추격자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놀랍게도 둔광을 거두고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뒤쪽에서 쫓아오던 두 개의 빛도 수십 장 거리에서 멈추었고 그 안에서 남녀 한 쌍이 나타났다.

둘 다 어려 보였으며 사내와 여인 모두 외모가 출중했으며 어딘가 닮아 보였다.

그들이 쫓고 있는 것은 소홍이었는데 그녀는 그 둘이 영족이 깃든 꼭두각시라는 것을 알았기에 주저 없이 수결을 맺어 검은 화염 두 덩이를 분출했다. 화염은 즉시 불새로 변해 남녀를 향해 쇄도했다.

상대 남녀는 서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털었고 등 뒤에서 몇 줄기의 회색빛이 방출되었다. 검은 화염에 뒤지지 않는 기세였다.

쿠릉!

회색빛과 검은 화염이 얽혀 교전했다.

눈썹을 끌어올린 소홍이 갑자기 허공에서 몸을 굴렀고 동시에 검은 빛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그녀를 감쌌다.

이어 검은빛 속에서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상대편 남녀를 향해 날아갔다. 새는 새까맣게 윤이 나는 피부에 머리에는 갈색 볏이 솟아 있었고 비취 색 눈을 반짝이는 검은 봉황이었다.

어린 남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시선을 교환하더니 두 줄기의 그림자를 분출했다. 일순간 영기의 파동이 크게 일었고 굉음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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