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99화 (556/2,000)

799화. 타령비파(詫靈琵琶)

*

“아미타불.”

노승 역시 낮은 소리로 불문을 외고는 손가락을 튕겨 금색 화염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도사의 육신이 금색 화염 속에서 재가 되어 흩날렸다.

“자영이 우리 합체기 수사들과 비슷한 신위를 지녔다지만 뇌라진인의 신통에 소리소문없이 당했을 리 없습니다. 유일한 가능성은 뇌라진인이 백 년 전 만황세계에 갔을 때 기습당한 것이겠지요. 그 뒤로 자영이 그를 대신했다니 교활하기 그지없는 놈입니다. 만일 천원성황께서 나서서 이 자의 정체를 밝혀주시지 않았다면 아직도 속고 있었을 겁니다. 그간 비승수사들을 한데 불러 모으지 못해 안달한 것도 말로는 비호하려 한다고 했지만 분명 딴 속내가 있었을 겁니다.”

노승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년 문사는 놀랍게도 인족 중 명성이 자자한 천원경의 주인 천원성황이었다.

“허나 몇 년간 너무 본토 수사들을 두둔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습니다. 비승수사들이 불만을 품을만한 상황이지요.”

천원성황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빈승이 최근 수련에만 매진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대한 적을 앞두었으니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지요. 자영이 뇌라진인의 몸을 차지하고 그간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빼냈을지 상상할 수도 없으니까요. 천연성 방어와 금제를 대폭 수정해야 할 듯합니다.”

노승의 얼굴이 더없이 어두웠다.

“중요한 일이니 장로회에서 상의해봐야지요. 자영이 알고 있는 정보 또한 상당할 터이니 금월대사께서 자세히 심문해보셔야 합니다.”

중년 문사, 천원성황이 손바닥을 뒤집어 옥사발을 꺼낸 다음 던져주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이미 파견나간 이들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안타깝습니다.”

금월대사는 옥사발을 받아들고 난색을 보였다.

“적들이 미리 눈치 챌 수도 있으니 그 계획을 중단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저 몇몇 구성원을 조정하는 정도로만 손을 써두었지요. 아마 영족들이 도중에 그들에게 손을 쓰려 들겠지만 일단은 그들 스스로 화를 피하기를 기원해야지요. 그런데 대사께서 방금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비승한 수사들 중에 정말 현천참령검을 지닌 이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럴 리가요! 조금 전 한 말은 7 할의 진실에 3할의 거짓을 섞은 것 입니다. 현천의 보물은 형태를 갖춘 후에도 영성을 지니기 전에는 이계로 옮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원래 차원을 떠나면 영성을 잃게 되지요. 아무리 현천의 보물이라고 해도 그렇게 되면 쓸모가 없습니다. 당연히 혼돈만령방에 오를 수도 없을 테고요. 빈승이 이런 거짓말을 한 것은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것이었군요. 역시 대사께서는 현천의 보물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노승이 웃으며 담담히 설명하자 중년 문사인 천원성황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한립은 자신의 임무에 이렇게 비밀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네 명과 함께 괴조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괴조들은 크기가 한 장 가량에 날 개가 네 개나 달려있고 몸통은 거대한 박쥐를 닮았는데 하필 머리가 산양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 휘어진 두 개의 뿔과 날카로운 송곳니가 아주 흉악했다.

수백 마리의 괴조들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회색 바람이 몰아쳤고 입을 벌리면 사발 굵기의 뇌전이 분출되어 결단기 수사에 맞먹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괴조의 두 발톱은 마치 흑철로 만든 것처럼 새까맣고 날카로워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아마 보통의 화신기 수사들이 이렇게 많은 괴조에게 둘러싸였다면 골머리를 썩거나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립의 일행 중에는 진령세가의 직계 자제와 칠대요족 중 화형기 요수 그리고 한립이라는 별종이 있었다.

이 다섯 명은 괴조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는데도 거대한 선박을 보호하며 그것들을 가볍게 퇴치하는 중이었다.

핏빛 반점 청년과 농동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십여 장 길이의 하얀 빛줄기를 조종해 전방 백여 장을 전담했다.

하얀 빛줄기의 본체는 굉장한 보물인지 영기의 빛이 엄청났고 회색 바람이든 뇌전이든 전부 갈라버려 한 번 번뜩일 때마다 한 마리 혹은 몇 마리의 괴조들이 죽어나갔다.

소홍 역시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검은 화염 속에 있어서 그녀가 어떤 신통을 부리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접근해 오는 괴조는 그 자리에서 재로 변해 사라졌다.

아무리 괴조들이 흉포하다 해도 연달아 열댓 마리가 비명횡사하자 그 이후로는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고 새하얀 눈썹을 지닌 이 수사는 또 다른 방식으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보물에 의지하지 않고 그대로 괴조무리로 뛰어든 것이다. 그의 등 뒤로 새까만 빛을 발하는 날개가 나타났고 어깨가 두꺼워져 반요의 형태로 싸우고 있었다.

이 수사가 괴이하게 괴조 무리를 헤집을 때마다 주변의 괴조들이 사분오열로 흩어지며 핏덩이가 흩날렸다.

한립의 경우 아주 평범하게 청죽 봉운검을 방출해 싸웠는데 72개의 금빛이 그의 주변을 맴돌다 달려드는 괴조를 일일이 두 동강 냈다.

그러나 다섯 명 중 가장 여유롭게 싸우고 있는 이는 하얀 장포를 입은 소녀 엽영이었다.

그녀는 벽옥으로 만든 비파를 들고 고운 손가락으로 비파의 현을 움직이고 있었다.

희미한 노란 고리가 층층이 발산되어 달려드는 괴조들을 일시에 에워싸면 괴조들은 회백색 물체에 뒤덮여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회백색 괴조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비파는 놀랍게도 석화(石化)의 신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 명 모두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수백 마리의 괴조들을 일다경 만에 전부 처리해냈다. 일을 마친 이들이 신통을 회수하고 영운주가 변한 거대한 구름 속으로 복귀했다.

“이 괴상한 새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운주의 변화를 꿰뚫어 보다니 의외입니다.”

농동은 다른 사람들을 훑고는 작게 탄식했다.

“저도 처음 보는 종류입니다. 그러나 드넓은 만황세계에 저희가 모르는 고대 짐승이 허다할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죠. 저는 오히려 영운주가 이제야 들킨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소홍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게 다 이미 만황세계의 심처에 들어왔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앞으로의 여정은 더욱 위험할 겁니다. 괴조들의 수는 많아도 상대하기 편했지만 강력한 고대 짐승을 만나면 반드시 영운주를 버리고 달아나야 할 것입니다.”

이 수사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야 당연하지요. 정말 전설 속의 백목거인 같은 존재를 만난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아, 이제 한 형께서 번을 설 차례이니 한동안 수고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농동이 이야기를 하다 고개를 돌려 한립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에 한립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엽영이 갑자기 빙긋 웃더니 옆에선 소홍을 향해 물었다.

“조금 전 흑풍족의 흑염염(黑炎焰)을 펼치신 거죠? 명불허전이라더니 과연 위력이 대단하네요!”

소홍은 그녀의 물음에 뜨끔했고 이상하다는 눈빛을 담아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수련한 흑염염입니다. 허나 엽 수사의 비파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지요. 듣기로 수만 년 전, 천령경에 합체기 선배님께서 타령비파(詫靈琵琶)라는 통천령보를 제련하여 혼돈만령방에 올랐다죠. 동시에 석화(石化), 용금(熔金), 빙봉(氷封)의 3대 신통을 사용할 수 있는 보물이라고 들었는데 엽 수사의 보물과 관련이 있습니까?”

“하하, 소 수사께서 인족의 보물에도 밝으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지닌 것은 타령비파의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석화 신통밖에는 부릴 수 없어요. 위력도 진짜 통천령보에 비할 바가 아니고요.”

“그랬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영보급의 보물이 아닙니까. 석화 신통 자체가 희귀해서 부지불식간에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지만 속으로는 칼날을 숨긴 두 여인의 대화를 지켜보던 농동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립을 향해 물었다.

“한 수사, 제련하신 비검 법보가 굉장히 특이하더군요! 동시에 72개의 검을 한 벌로 움직이는데다 위력도 만만치 않아보였습니다. 그것을 보니 이전에 비승수사셨던 선배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당시 연허 후기였지만 72개의 비검으로 검진을 펼쳐 합체기 수사를 몰아붙였지요. 그 일로 꽤나 소란스러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선배의 검빛은 푸른색이라 한 형의 비검과는 다르지만요. 혹시 한 수사께서도 검진을 펼칠 수 있으십니까?”

농동은 한립이 발동한 청죽봉운검이 꽤 흥미로운 듯했다.

“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 선배님의 존성대명과 검진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비검만 많을 뿐 검진 같은 것은 잘 몰라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관심이 갔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농 수사께서 말씀하신 분이 누군지 저는 알겠네요. 청원자 선배라는 기인 아니신가요? 어떤 검진을 수련하셨는지는 몰라도 듣기로는 수련한 공법 역시 스스로 창안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안타까운 일은 그 선배님께서 오래 전 만황으로 들어가 더는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재능이 남달랐던 분이니 합체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엽영이 웃으며 대답을 가로챘지만 농동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한립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 칭호와 법보의 특색 그리고 스스로 공법을 창안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한립은 그가 청원검결을 만들어낸 하계의 선배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이렇게 그의 소식을 듣게 되다니 놀라웠지만 이미 법체쌍수의 길을 선택한 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청원자를 찾아가 청원검결에 이어지는 공법을 전승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다른 이들에게 포권을 하고 몸을 날려 선박의 가장 높은 곳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한립이 떠나자 소홍과 농동 등도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     *     *

한립은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정말 명상에 잠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공법을 반복해서 생각하며 의식 일부를 방출해 영운주 주변의 동향을 감시했다. 고대 짐승들의 습격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이어진 7, 8일 동안 선박은 여전히 거대한 구름으로 위장해 앞으로 나아갔고 간혹 조류 형태의 짐승들과 마주쳤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날개가 넷 달린 괴조 떼와 달리 영운주의 금제를 꿰뚫어보는 능력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한립이 번을 선 지 아홉째 날이 되었다.

선박의 영석을 새것으로 교환한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던 그가 멈칫하며 놀란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이럴 수가. 어찌 저런 것이 여기에.”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안색이 달라진 그가 돌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작은 소리였지만 밀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나머지 넷을 불러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후 빛줄기들이 선박 곳곳에서 날아들었다.

“무슨 일이지요? 위험한 것이라도 나타난 것입니까?”

“저게 무엇입니까. 설마…….”

소홍과 농동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소홍은 의혹이 가득했지만 농동은 이미 무언가를 발견한 듯 놀란 얼굴이었다. 이 수사와 엽영도 의식을 방출해 주변을 살폈다.

“정말 진령급 존재가 나타난 것입니까?”

놀란 이 수사가 소리를 높였고 엽영도 말은 없었지만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백 리 밖 고공을 뒤덮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를 의식으로 살피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 주변은 먹구름이 가득해 천둥과 번개를 동반했고 그 아래로는 회색 돌풍이 연달아 휘몰아쳐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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