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8화. 암류(暗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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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밀실 안.
하얀 장포를 입은 소녀 엽영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은 채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머리 뒤로 놀랍게도 직경이 수 척은 되는 푸른 광채가 천천히 회전하며 하얀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광채 중간에는 인간의 형상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광채 안의 허상은 외모가 엽영과 비슷했지만 체구가 무척 작았다. 돌연 소녀가 입꼬리를 꿈틀하며 조소하자 광채 안의 허상도 무언가를 비웃는 듯 입꼬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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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자신의 밀실 안에서 서성였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밀실 한쪽의 탁자 위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사지를 늘어뜨리고 나른하게 누운 작은 표범이었고, 나머지는 윤이 흐르는 새까만 털을 지닌 초소형 원숭이였다.
갑자기 우뚝 멈춰 선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작은 병과 우윳빛 옥간을 꺼냈다. 병에 새겨진 문양은 매우 고풍스러웠고 멸진단(滅塵丹)이라는 세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한립이 약병을 쓰다듬다 한숨을 내쉬자 영기의 빛이 반짝이더니 약병이 사라졌다. 옥간은 그가 천연성을 떠나기 전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수사들이 남기고 간 것이었다.
그는 옥간을 만지작거리다 이마에 대고 의식을 불어넣었다. 옥간은 원래 거대한 지도였는데 거의 절반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동그란 점이 희미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여러 번 살펴본 내용이었지만 한립은 또 의식을 불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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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성, 은밀한 지하 밀실 안.
도사와 승려가 평범해 보이는 청석 탁자에 마주 앉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사는 짙은 눈썹에 큰 눈과 금빛이 도는 얼굴을 지녔고, 하얀 수염을 기른 노승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마치 너무 노쇠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노승처럼 보였다.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보니, 인족과 요족 수사들이 모여 이동하는 중이겠습니다.”
노승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럴 시각이로군요. 그런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금월 형께서는 출관한 후 어째서 계획을 바꿔 그들을 이족의 땅에 파견한 것일까요? 그들은 새로운 비승수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수사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이족의 정보를 확보하는 임무가 간단해 보여도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요. 게다가 요족에서 파견한 자들은 겉으로는 협조적으로 보이겠지만 다른 꿍꿍이를 갖고 있을 겁니다.”
도사가 의혹을 제기했다.
“이번에 이족들이 요동치는 이유는 아시겠지요?”
노승은 도사의 의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느릿하게 반문했다.
“빈도가 그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이게 다 혼돈만령방에 현천의 보물이 출현해서 아닙니까! 게다가 셋째 줄에 이름이 올랐고요. 듣자니 무슨 현천참령검(玄天斬靈劍)이라더군요.”
도사는 노승의 물음에 가슴이 서늘해져 표정이 한결 신중해졌다.
“그렇습니다. 이족 침공은 수만 년 후에나 예상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족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지요.”
“금월 형께서 빙빙 돌려 말하지 않으셔도 아는 사실입니다. 다른 종족들도 이 일에 휘말려 화를 입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습니까.”
“휘말려 화를 입을까 걱정한다고요? 허허,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휘말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천의 보물은 항상 한바탕 피바람이 휘몰아친 후에야 진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국 보물을 얻는 종족은 그것을 진령급 수사에게 바쳐 수호자로 삼았고, 이후 영계의 강대한 세력으로 떠올랐지요. 진령급 수사는 진선계의 선인과도 고하를 다툴 만하지 않습니까. 강대한 진령이 나타나기 전에는 어느 종족이 보물을 얻든 그것을 지킬 능력이 따라야합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 될 테니까요.
약한 세력이 보물을 얻을 경우 다른 강력한 세력의 비호를 청하거나 아니면 만황 깊숙이 달아나 멸족의 화를 피하려 했던 경우도 허다했지요.”
노승은 서두르지 않고 이야기를 해 나갔다. 그러나 도사는 여전히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노승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현천의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어느 세력의 수중에 있는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필 요족 중 예언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합체기 수사가 다음 대천겁을 버틸 희망이 없자 남은 법력을 전부 쏟아 부어 점을 쳤지 뭡니까. 그런데 현천참령검이 바로 우리 인족이 있는 풍원대륙(風元大陸) 서북쪽에 있다고 나오고 말았습니다. 풍원대륙이 3개의 대륙 중 가장 면적이 적긴 하지만 거주하는 종족의 수는 다른 대륙을 압도합니다. 서북쪽만 해도 우리 인족을 포함해 요족, 영족, 목족, 야차족, 영족 등 크고 작은 예닐곱 개 종족들이 살아가고 있지요. 그러니 이번에 새로 등장한 현천의 보물이 우리 인족의 수중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은 이 소식을 우리 인요족 양족 밖에는 모르지만 얼마나 속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중에도 분명 이종족 첩자가 숨어있을 테니 언제고 정보가 새고 말 겁니다.”
“뭐라고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이는 까딱하면 우리 인족 전체가 멸족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도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상고 전설에 따르면 일정 기간 내에 제한된 곳에서 대량의 강대한 생령을 죽이는 신비한 혈제(血祭)를 시행하면 그곳에서 현천의 보물을 소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정도의 세력이면 다른 강대한 종족들이 우리를 전부 몰살시켜 버리고 혈제를 지내 현천의 보물을 소환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지난 번 백족대전도 화천순(化天盾)을 지닌 자가 세 대륙을 만 년간 오가며 달아나다 여러 종족들이 그 일에 휘말려 벌어진 일 아닙니까. 게다가 당시 몰살당한 약소 종족들은 전부 혈제의 제물이 되었고요. 게다가 서북쪽 종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혈제의 제물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즉시 전쟁을 일으킬 겁니다.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종족을 혈제의 제물로 만들기 위해서요.”
“그랬군요. 그랬어……. 허, 그럼 새롭게 비승수사가 된 이들을 천연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종족의 구역으로 보낸 것이 설마, 그들을 의심해서……!”
도사가 돌연 무언가를 깨닫고 외쳤다.
“맞습니다. 현천의 보물이 어떤 물건입니까? 한 세계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역천의 보물입니다. 그런 것이 꼭 영계의 물건이란 보장이 없지요. 하계에서 누군가 현천의 보물을 갖고 올라와 갑자기 혼돈만령방에 올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근 백 년간 비승수사가 된 이들 중 의심 가는 이들을 추려 전부 천연성 밖으로 위험한 임무를 맡겨 내보냈습니다. 임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만황 세계를 표류하며 단시간 내로는 돌아올 수 없게 해두었지요. 그들 외에도 자질이 뛰어난 이들과 신분이 특수한 이들을 함께 보냈으니 영계 본토 수사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 중 현천참령검을 지닌 이가 있다면 재앙의 근원을 천연성에서 멀리 내보낸 것이고, 아니라면 이후 전쟁이 벌어져 양족의 원기가 크게 상할 것을 대비해 양족의 부흥을 책임질 희망을 살려두게 된 셈이지요.”
노승이 숙연하게 이번 작전의 속뜻을 설명했다.
“성가시게 그렇게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확실히 현천의 보물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면…….”
“정신을 통제하는 비술을 써서 일일이 심문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정말 현천참령검이 우리 인족의 수중에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 입니까? 지금 그것에 욕심내는 것은 뜨거운 감자를 두 손에 쥐고 굶주린 살인귀들 사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심문을 행하는 수사나 심지어 장로들 중에 이종족의 첩자가 없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일단 소식이 새어나가면 우리 인족은 모든 종족들의 표적이 되어 화살 받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심지어 요족조차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연맹을 고려하지 않고 배신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 인족은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노승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인족은 강대한 종족이 아니기에 진령급 수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여력도 없습니다. 심지어 더 강력한 종족에게 보물을 바치고 비호를 청하려 해도 주변의 영족 등이 그럴 기회도 주지 않겠지요. 그럴 바에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곧 발생할 전쟁 준비나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현천의 보물이 어느 종족 손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기껏해야 목족과 영족이 들이닥치는 정도겠지요. 우리 인요 양족의 전력과 천연성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영족과 야차족은 혼돈만령방 소식이 퍼진 후 더욱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종족끼리 전쟁하다 현천의 보물을 소환할 조건이 충족되면 원래 어느 종족이 보물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겁니다. 소환을 받은 현천의 보물이 이 지역에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도 한 고비를 넘기는 것이지요.
그 후에는 초대형 세력들이 서로 승부를 가릴 문제입니다. 이전에 백여 년 넘게 이어지던 전쟁과 달리 이런 전쟁은 몇 년 내로 승패가 결정 날 테지요. 아마 주변 다른 종족의 고위층들도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 현천참령검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다들 보물을 찾기보다는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노승은 서두르지 않고 엄청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이런 소식은 언제 알게 된 것입니까? 어째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못한 것이지요. 설마 장로회에서 일부러 제게만 숨긴 것입니까?”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 멍하니 있던 도사가 불쾌하다는 내색을 했다.
“예, 귀하의 신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조치한 것입니다. 어찌 계속 뇌라진인이라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자영(紫影) 대인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일순 노승의 눈빛이 형형하게 변했다.
“자영이라니, 금월대사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시간이 꽤 지났으니 발작할 때가 되었을 텐데요.”
노승은 시선을 돌려 구석의 작은 향로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향초 하나가 한참 동안 타고 있었다.
“무슨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아니, 이 향은…….”
도사의 눈에 보랏빛이 스쳤고, 안색이 크게 달라지면서 그의 몸에서 보라색 그림자가 튀어나와 노승을 덮쳤다. 그러나 노승은 담담히 자리에 앉아 소매를 펄럭였다.
쾅!
금빛이 번뜩이고 범어(梵語)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보라색 그림자는 마치 거대한 물체에 반격당한 것처럼 튕겨나가 밀실 벽에 부딪쳤고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움직이지 못했다.
바로 그때 벽에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푸른색 옥으로 만든 사발이 나타나 푸른 기운을 보라색 그림자에게 쏘아 보냈다.
“좋군요. 사신향(四神香)이 영족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다지만 자영에게도 이렇게 잘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벽에서 하얀빛이 번뜩이고 우아한 얼굴의 중년 유생이 나타났다.
“천원 형, 사신향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 배신자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노승이 유생을 보고 바로 몸을 일으켜 포권을 했다.
“그리 예를 차리실 것 없습니다, 금월대사! 저도 최근에 어떤 신통을 익히게 되어 우연히 뇌라진인이 실은 자영의 신분이라는 것을 눈치 챘을 뿐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도법의 기재가 이렇게 되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유생은 아직도 단정하게 앉아 있는 도사를 보며 탄식했다. 도사의 몸은 자영이 빠져나가는 순간 생기를 잃은 듯 말라비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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