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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97화 (554/2,000)

797화. 천봉의 피

*

“저는 엽영이라고 해요.”

하얀 장포 소녀가 싱긋 웃으며 말 하는데 목소리가 꾀꼬리 소리처럼 맑았다.

“한립입니다.”

“한립? 정말 당신이었군요! 당시 수중에 멸선주 같은 보물을 지니고 있어 의아하다 생각했는데 본래 고계 수사였네요. 그럼 당신은 법체 쌍수의 공법을 수련하고 있겠군요.”

소홍의 시선은 여전히 냉랭했다.

법체쌍수라는 말에 농동과 이 수사, 새하얀 눈썹 청년이 깜짝 놀랐고 하얀 장포 소녀도 표정이 멍해졌다.

“수사께서 제 공법이 법체쌍수라 말하시니 그렇다고 칩시다. 대아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차분히 물었다.

“……대아가 나를 따라 본 족으로 돌아온 건 현명한 결정이었어요. 수련 속도가 극히 빨라 이미 결단을 이루었고, 화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합니다.”

검은 치마 여인은 대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입니다.”

“소 수사께서는 한 형과 아는 사이신가요?”

엽영이란 소녀가 한립과 소홍을 훑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 사이라……. 오래 전에 안면을 익힌 사이라고 해두죠.”

소홍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때 농동이 수사들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한립과 소홍을 보는 듯 했지만 그의 시선은 엽영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눈 속 깊은 곳에서 탐욕이 느껴졌지만 아무도 알아챈 이는 없었다.

“아직 만황 심처로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증명한 셈입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여정은 이보다 더욱 위험하겠죠.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흑석삼림(黑石森林)에 도착하기 어려울 거예요.”

잠시 생각하던 소홍이 모두를 향해 당부했다. 다들 흑석삼림이라는 소리에 표정이 달라졌다.

“이번 임무는 정말 목령족(木靈族) 동향을 정탐하는 것일까요? 이 전에 심어 놓은 정보원에게 그간 입수한 자료를 수거하는 것 말이에요. 솔직히 저는 그게 임무의 전부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요.”

엽영이 웃으며 물었다.

“그건 우리의 운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다른 임무보다 쉽지만 상황이 꼬여 목령족이 눈치라도 챈다면 전부 순식간에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양 족의 안위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농동이 탄식하듯 대답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어째서 우리 같은 화신기 수사들을 파견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연허기 수사가 나서면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수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혹을 드러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요족에서 책임자는 소 선자인 것 같습니다.”

농동은 이 수사의 의문에 소홍에게 시선을 주었다.

“농 형께서 그것을 아시는 것을 보니 인족 책임자시겠군요.”

“예, 그래서 제가 이런저런 일들을 다른 분들보다는 잘 알고 있습니다.”

농동이 입꼬리를 꿈틀하자 붉은 반점이 따라 움직였으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엽영은 입술을 비죽이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립을 힐끗 보았다. 그런데 한립이 아무 이야기도 못들은 것처럼 태평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에 화신기 수사들을 파견한 것은 흑석삼림에 목령족들이 이미 천목몽라(天木夢羅)를 펼쳐 두었기 때문입니다. 화신의 경지를 넘어선 침입자를 감지하는 결계이지요.”

소홍은 고개를 돌려 의문을 표했던 요족이 수사에게 설명했다.

“그랬군요. 그래도 농 수사는 그렇다 치고 나머지 둘은 화신 중기라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 수사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못마땅한 눈길로 한립과 엽영을 보았다.

“이 형, 안심하십시오. 장로회에서 한 수사와 엽 소저를 임무에 함께 파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그건 제가 보장하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만일 임무 수행에 걸리적거리는 일이 발생하거나 스스로의 실수로 위험에 처하면 제가 모른 척한다 해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농동이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 했으나 이 수사가 음산하게 경고했다.

“흥, 저와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그래요? 누가 들으면 수사께서는 연허기 수사인 줄 알겠습니다.”

그가 연달아 도발하자 드디어 엽영이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희 같은 경지에 이르면 그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큰 결과를 불러 오는지는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이 수사가 냉소하며 거만하게 대답했다. 엽영이 발끈해 대꾸하려는데 한립이 끼어들었다.

“농 수사와 소 선자께서 저희보다 임무에 대해 상세히 아시는 것 같으니 일단 설명해주시지요. 저는 대략적인 이야기만 들어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하는 줄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이번 임무에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한립은 실제로도 불쾌했다. 천연성에서 이 번 임무에 다수의 수사들이 파견된다는 정보를 듣고 일이 간단하게 풀리지 않을 거라 직감했다.

임무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포기하면 다른 임무에도 지원하지 못하고 10년간 천연성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렇다 보니 몇 년 내로 천연성을 떠나야 하는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번 임무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달에 걸쳐 회합 장소에 모인 그는 그곳에 모인 이들이 비승수사들이 아니라 영계 본토 수사들과 요족 수사들이란 것을 보고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이번 임무는 예상보다 더 위험하고 복잡하겠구나. 조무귀는 비승수사들을 위해 위험한 임무를 연달아 발표한다고 했는데 설마 내가 착각해서 다른 임무를 떠맡은 것은 아니겠지?’

허나 출발 전 충분한 수량의 멸진단을 제공 받았고 임무에 성공하면 천연성을 떠날 수 있다는 내용도 들었다. 그렇다면 조무귀와 문 선배가 이야기했던 것과 일치했다.

“시일이 넉넉하지 않으니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시지요.”

농동이 미소 지으며 이렇게 제안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시일이 촉박하니 어서 움직입시다. 가는 길에 관련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소홍도 찬성했고 다른 수사들도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출발하시죠.”

“그럼 다들 제 영운주(靈雲舟)에 타서 같이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약간의 영석을 소모하는 대신 모두의 법력을 아낄 수 있고, 배 자체에 은신술 기능이 있어 가는 동안 들킬 가능성을 줄여줄 겁니다.”

농동이 열정적인 태도로 말했다.

희미한 하얀 빛덩이가 수풀 속에서 떠올랐다. 빛 속에 자리한 것은 은은하게 빛나는 스무 장 길이의 2 층 선박이었다.

옥으로 만든 새하얀 선박은 표면에 구름 모양의 기괴한 문양과 금색과 은색 주술 문자가 새겨져 있어 비범한 물건처럼 보였다.

웅!

퍼퍼펑!

선박이 진동하자 금색과 은색 주술 문자가 일제히 폭발했고 하얀 구름이 선박을 감싸 평범한 구름처럼 보였다. 거대한 구름이 날아가는데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박의 비행 속도가 화신기 수사의 속도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족 경매소를 장악한 농 가의 수사답습니다. 원행에 아주 유용한 보물을 준비해 오셨군요. 영운주가 진귀한 보물은 아니지만 이 정도 속도를 내는 것은 영운주 중에서도 극상품이니까요.”

갑판에 선 소홍이 배를 둘러보고는 칭찬했다.

“과찬이십니다, 소 선자! 선자께서는 칠요족 출신이시니 웬만한 보물은 거의 다 보셨을 것입니다. 제 영운주는 속도가 조금 빠른 것을 제외하면 별것도 아니지요. 그래도 공간이 넉넉하니 번갈아 한 명씩 바깥 상황을 살펴보고 나머지는 밀실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시면 될 겁니다. 순조롭게 일이 풀린다면 반년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갈 테지요.”

“좋습니다. 그럼 한 사람당 열흘씩 번을 서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지내는 것으로 하지요. 각자 원하는 밀실을 고르시죠.”

소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했다.

두 사람의 말에 다른 이들은 굳이 반대를 하지 않았고 각자 마음에 드는 방을 하나씩 골랐다. 그리고 좌선하고 휴식을 취할 곳이니 알아서 금제를 설치해 다른 이들이 엿 보는 것을 방지했다.

이후 다섯 수사들은 상의 끝에 당번 순서를 정했다.

한립은 가장 마지막에 배정되어 그의 차례가 돌아오려면 출발한 지 40일이 지난 후였다. 한립은 다른 이들과 깊이 교류하지 않고 자신의 밀실로 돌아가 금제를 설치했다.

소홍 등 다른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로 번을 맡은 농동을 제외한 이들이 전부 자신의 밀실로 들어갔다. 농동은 선수(船首)로 돌아와 비취색 방석을 꺼낸 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반년이라……. 어서 그날이 되기를 바라야겠군.”

농동은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선박이 다시 고요해졌을 때 소홍과 이 수사가 나무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뭐라고요? 엽영이라는 어린 계집이 천봉(天鳳)의 피를 이어받은 몸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진령세가(眞靈世家)의 제자이고요?”

이 수사는 소홍이 엄청난 일이라도 얘기한 것처럼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이 수사, 그리 놀라실 것 있습니까? 수사가 속한 현응족도 희귀한 천조류(天鳥類) 중 하나이니 천봉 혈맥에 감응하셨을 텐데요. 우리 흑봉족이야 봉족(鳳族)의 방계라 천봉의 피가 그녀보다 정순하지는 못해도 천봉혈맥을 감응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쩐지! 그녀를 보자마자 은근히 거슬리는 마음이 든다 했습니다. 그래서 회합 장소에서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고요. 그런데 소 선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그녀가 다른 진령세가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면 상관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필 만조지왕(萬鳥之王)이라 불리는 천봉의 피라니요!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 형께서도 모르지 않을 텐데요.”

소홍은 빙긋 웃었지만 시선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흥, 당연히 알지요. 허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출발 전 장로님께서 이번 임무가 본 족에 얼마나 중요한지 당부하셨습니다. 만일 사적인 일로 대사를 그르친다면 우리가 천봉의 피를 얻는다고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이 수사는 어두운 얼굴로 냉소했다.

“하하, 제가 언제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손을 쓴다고 했습니까? 당연히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임무가 성공하고 나서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음, 임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야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두 수사가 나서서 그녀를 도우면 어찌할 것입니까? 또 천봉의 피를 얻는다고 해도 저희 둘이서 어찌 나누지요? 그것이 둘로 나눠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수사가 눈을 빛내더니 생각 끝에 고개를 저었다.

“천봉의 피는 우리 흑봉족에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시죠! 이 형께서 제가 그것을 얻게 도와주신다면 흑염단(黑炎丹) 세 알을 보수로 드리겠습니다. 다른 두 명이야 제가 알아서 할 것이고요. 게다가 흑석삼림이라는 흉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그들이 살아남는 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소홍이 놀라운 대가를 약속했다.

“흑염단 세 알이라니. 진심입니까?”

“저도 흑봉족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인물입니다. 오랜 세월 재료를 구해 겨우 제련해 낼 수 있었습니다. 본래 연허기 경지를 뚫을 때 사용하려던 것이지만요.”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합시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천봉의 피를 취하는 것을 돕겠습니다. 허나, 진령의 피는 쉽게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진령세가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완전히 분리해내기 어려울 겁니다.”

이 수사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안심하세요. 저희 흑봉족이 다른 진령의 피는 몰라도 천봉의 피를 분리하는 데는 연구가 깊습니다. 7, 8할의 확률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선자께서 자신이 있으시다니 됐습니다.”

이 수사가 소홍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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