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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96화 (553/2,000)

796화. 임무

*

“미리 알려주는 이유는 뇌라 장로님께서 위기가 찾아오기 전에 비승 수사들의 원기를 보호할 기회를 제공하려 하시기 때문이라네.”

문 수사가 인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설마 뇌라 장로님께서는 저희를 천연성 밖으로 보내 위기를 피하게 할 방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푸른 궁장을 입은 여인이 기뻐하며 물었다.

“흥, 이종족 침공은 우리 인족 전체의 생사존망이 걸린 일이다. 아무리 다른 수사들과 갈등이 있더라도 이종족에 대항할 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감히 천연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자는 천연성 집법대가 찾아내기도 전에 우리가 친히 나서 사살할 것이야.”

조심성 없는 그녀의 말에 조무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대청 안 수사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허허, 모두 오해는 말게. 이종족을 막아내는 사명은 미룬다고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저 뇌라 장로님께서는 이번 위기에서 비승수사들이 전부 죽어나가는 것을 막아보자고 하시는 것이네. 상의 끝에 일부라도 비승수사의 전력을 보전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했는데 그 방법은 위험이 따르네. 그래서 미리 통지하고 계획에 참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권을 주려는 것이지.”

문 수사의 말에 수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한립도 슬쩍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비승수사들 중 한 명이 차분히 물었다.

“간단하다. 곧 뇌라 장로님께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성공하면 큰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임무를 발표할 것이다. 극히 위험한 일이라 대부분의 본토 수사들은 맡으려 하지 않겠지. 하지만 임무를 맡아 성공하면 큰 공을 세우는 셈이니 정정당당하게 일선에서 물러날 수 있다.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면 천연성으로 돌아오면 되고 전쟁이 일어나면 잠시 몸을 피하면 되겠지. 미리 말해두지만! 이번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은 절반의 확률로 죽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 사실 이종족이 침공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으니까 말이야.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천연성을 떠날 수는 없으니 명심해야 한다.”

조무귀가 말을 마치며 냉소했다.

조무귀와 문 수사의 말에 대청 안 수사들은 헛바람을 삼키며 난색을 표했다. 절반은 죽어나갈 것이라 예상되는 위험한 임무와 6할의 확률로 일어날 이종족 침공!

이종족 침공이 있더라도 단일 종족의 공격이면 대다수가 그럭저럭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아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임무를 맡는 것이 더욱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목숨이 걸린 일이니 간단히 결정내릴 수는 없었고 다들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일순간 대청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바로 결정할 필요는 없네. 1년 간 이런 임무들이 연달아 발표될 것이야. 표식이 있는 임무를 맡으면 자동으로 원래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미 고정된 임무를 수행하는 수사들도 걱정할 필요는 없네.”

문 수사가 몇 마디 덧붙였다.

“문 선배님! 저희가 임무를 완수한다고 해도 멸진단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멸진단이 없으면 임무를 완수해도 이색(二色) 천겁을 버티지 못 할 텐데요.”

한립이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한 현질이군.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본래 이번 임무 자체가 최후의 승부수와 마찬가지지. 출발 전에 필요한 분량의 멸진단을 전부 배부할 예정이다. 물론, 영단에는 금제를 걸어 두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사라지게 해둘 것이다. 그러니 자네들은 중간에 임무를 포기하고 달아날 생각은 접는 것이 나을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어찌될 지는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겠지.”

“그렇군요.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다른 수사들도 내색은 안했지만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전달할 내용은 모두 전달했네. 보름 후부터 첫 번째 임무가 발표될 것이야. 임무를 맡고 싶은 이들은 미리미리 준비해두게. 비록 뇌라 장로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안배해 주신 임무지만 만일 다른 수사들이 자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회합은 이로써 끝났으니 다들 돌아가 고민해 보게.”

문 수사가 웃으며 당부하고 회합을 종료했다. 이어 그와 조무귀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을 빠져 나갔다.

대청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고 몇몇은 일어나 가버렸지만 나머지 수사들은 남아서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한립도 급히 일어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 형, 이번 임무에 마음이 끌리십니까?”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미소를 보였다.

“훤 선자셨군요. 확실히 고민이 되기는 합니다. 선배님들이 주신 기회니까요. 다만 감수해야할 위험이 높은 것도 고려를 해야겠지요.”

한립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고는 웃으며 답했다. 푸른 궁장 차림의 여인은 화신 중기로 이전에 몇 번 비승수사 회합에서 만나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지난 번 순찰에서 녹영을 생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형은 이미 화신 후기 수사와 비슷한 실력을 지니신 것 같더군요. 만일 수사께서 함께 하신다면 임무를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겁니다. 그러지 말고 저와 같이 임무에 지원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훤 수사가 빙긋 웃으며 제안했다. 푸른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하얀 피부와 고운 눈만 봐도 자색이 뛰어난 여인이 분명했다. 한립은 그녀의 제안이 의외였으나 훤 수사의 얼굴을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과찬이십니다. 중기에 이른지 얼마 안 된 제가 선자와 다른 수사들께 폐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임무를 맡을지 말지는 아직 더 고려해봐야겠습니다.”

예의바른 언사였지만 완곡한 거절이었다. 훤 수사는 그의 대답에 실망했지만 더는 매달리지 않고 잠시 한담을 나누다 떠나갔다.

훤 여인의 수행이 낮지 않고 삼천취(三千翠)라는 강력한 신통을 익히고 있다지만 그는 홀로 행동하는 것이 편했다. 지니고 있는 보물과 신통도 남들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중요한 일이 있어 내일 당장 이종족 침공이 시작된다고 해도 천연성을 떠날 수 없었다.

줄곧 예상초를 먹이며 키워온 서금충들이 1년 전 드디어 성체가 될 조건을 갖춘 것이다. 천란 성녀에게 알아낸 속성비술로 제련해두어 몇 달 혹은 1년 내로 영충이 진화가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런 상황에서 진화를 중단하고 이곳을 떠나겠는가.

푸른 빛줄기는 골짜기를 떠나 성 안으로 향했다.

석탑으로 돌아온 그는 밀실로 들어가 금제를 개방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손바닥을 뒤집자 노란 옥병이 나왔고 그 안에서 엄지손톱만 한 푸른 영단을 꺼내 복용했다.

그러자 희미한 푸른빛이 그의 몸에서 나타났다. 눈을 빛낸 그가 두 팔을 앞으로 뻗고 눈을 감았다.

푹!

그의 정수리에서 두 촌 크기의 원영이 떠올랐다. 작은 솥을 밟고 선 원영 주위로 수십 개의 가느다란 검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원영은 고개를 숙여 본체가 두 팔을 뻗고 있는 것을 보더니 눈을 깜빡이며 천진난만하게 웃어댔다. 그리고 입을 벌려 손바닥을 향해 은색 불덩이를 분출했다.

그러자 한립의 손 중 하나가 은색 화염에 휩싸였고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평범해 보이던 손바닥 표면에 검은 빛이 반짝였고 다섯 손가락에 하얀 뼈 반지가 나타난 것이다. 각 반지 위에는 생생한 해골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해골머리들은 은색 화염 속에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떤 것은 굉장히 편한 얼굴을 하는 반면 어떤 것들은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무표정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은색 화염 속에서 아른거리며 크기가 커졌다 줄었다 어지럽게 변화고 있었다.

더 이상한 일은 반지의 변화에 따라 손도 늘었다 줄었다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바닥 피부는 점점 투명하고 하얗게 변해 피와 살이 아니라 옥으로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원영이 고개를 들어 다시 입을 벌렸고 이번에는 다른 쪽 손바닥 위로 불덩이를 뿜었다. 은빛이 크게 번지고 요사스러운 불길이 한립의 나머지 손마저 휘감았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화염 속의 손바닥이 투명한 색이 아니라 먹처럼 새까맣게 변해갔다. 또한 잠시 후 손바닥과 손등에 작은 동산 모양이 떠올라 신비롭게 깜빡거렸다.

두 손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원영은 다시 한립의 정수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한립의 몸은 은은한 금빛으로 바뀌었고 등 뒤에 사람 모양의 희미한 금빛 그림자가 나타났다.

금빛 그림자는 모호했지만 놀랍게도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이나 달려있었다. 그리고 손목과 뺨에 드러난 황금빛 주술 문자들이 나타나 천천히 돌아다녔다.

멀리서 보면 금색 비늘로 뒤덮인 것 같았다.

*     *     *

10일 후, 한립은 평온한 얼굴로 밀실을 걸어 나와 천광전 설법에 참석했다. 삼일 밤낮을 그곳에서 보내며 강연을 들은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천연성 성내를 떠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동굴로 돌아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천연성 장로회는 위험해 보이지만 공적이 큰 임무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대부분 다양한 이종족에 관한 것이었고 임무를 맡게 될 인물들은 대부분 화신기 수사였다.

이에 천연성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무척 위험한 임무였기에 지원을 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 무렵 홀연히 불청객 몇 명이 한립의 영지를 찾아와 땅의 주인인 한립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그들은 동굴에서 장장 반나절을 보내다 복잡한 심경의 한립만 두고 조용히 떠났고, 한립은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결심을 내렸다.

*     *     *

4개월 후, 서금충 대부분이 속성으로 진화하는데 성공해 성체 서금충이 6, 7천 마리가 되었다.

그 후 한립은 영충들과 밀실의 물건들을 회수해 천연성 모처의 비밀스런 공간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락한 후 성에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맡아오던 소대에는 다른 화신기 대장이 부임하게 되었다.

천연성에는 한립처럼 갑자기 종적을 감춘 수사들이 종종 나타났는데 그들은 비승수사인 경우도 있었고, 일반적인 본토 산수의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숨겨진 세가의 제자인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전부 화신기 수사라는 것과 동급 수사들 중 발군의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     *     *

왜곡된 새빨간 괴목(怪木)들이 자라는 숲 속에 다섯 명의 젊은 남녀들이 각자 몇 장씩 떨어져 묵묵히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하얀 번개 같은 눈썹을 지닌 비단 장포 사내와 호리호리한 몸매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 입가에 핏빛 반점이 있는 보라색 장포 청년,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앳된 하얀 장포 소녀,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물 중반으로 보이는 푸른 장포 사내였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는 바로 천연성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한립이었다.

다섯 사람은 겉보기는 젊어 보였지만 전부 수행이 화신기 이상이었고 한립과 하얀 장포 소녀가 화신 중기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화신 후기를 대성했다.

그 중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은 한립이 요수의 난을 겪은 후 만난 흑풍족의 소 수사였다. 여인은 냉랭히 한립을 쳐다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놀라고 당황해 했다.

“인족에서 이번 임무에 파견한 수사 중 두 명이 중기의 수행을 지녔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고의로 이번 임무를 망치려 작정한 것은 아니겠지요?”

새하얀 눈썹을 지닌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다른 수사들의 귓가에 웅하고 울렸다. 그 말에 핏빛 반점 청년은 미소가 옅어졌지만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우윳빛 옥간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또 하얀 장포 소녀는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피식 웃었다. 인족에서 파견 나온 세 명 모두 대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반응에 새하얀 눈썹 청년이 안색이 굳어 무어라 하려는데 소 씨 여인이 끼어들었다.

“이번 임무는 천연성과 우리 인요 양족의 안위가 걸린 중대한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 돕지 않으면 성공은 말할 것도 없고, 임무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도 없겠지요. 서둘러도 그곳에 도착하는 데만 반년이 걸립니다. 인족에서 이 일에 세 분을 파견했으니 모두 평범한 분들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오래 동행할 예정이니 먼저 서로 간단히 인사나 나누시지요. 저 소홍은 흑풍족이라고도 불리는 흑봉족(黑鳳族) 출신이고, 이 분은 현응족(玄鷹族)의 이 수사십니다.”

여인의 당당한 태도에 핏빛 반점 청년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농동이라 합니다. 선자의 몸에 감도는 극화(極火)의 힘은 흑봉족의 본명 화염이겠군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농 가 분이시라고요?”

소홍은 핏빛 반점 청년의 이름을 듣고 안색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선자께서 저희 농 가를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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