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5화. 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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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거래만 성공적으로 마치면 수련의 고비를 넘기는데 시급한 단약들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여인은 한립이 이렇게 많은 영초의 종자를 구해 뭘 하는지 궁금했지만 적당한 대가만 지불한다면 구태여 상대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한립은 확인을 마쳤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부분이 이전에 제가 언급했던 것이군요. 이건 수사께서 마땅히 받아야할 대가이니 확인해 보시지요.”
그가 몇 개의 옥갑을 꺼내 상대에게 넘겼다. 여인은 꼼꼼하게 확인하며 하나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전부 만년 영초들이 맞네요. 오늘이 마지막 거래지만, 수사께서 다가올 큰 재난에서 살아남는다면 다시 거래할 기회가 생기겠죠.”
“저도 그러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저는 다른 수사들이 어떤 물건을 갖고 나왔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눈앞의 긴박한 상황에 몇몇은 숨겨 두었던 진귀한 보물을 갖고 나와 거래할 지도 모르니까요.”
한립이 대청 사방에 깔린 노점을 훑으며 말했다.
“수사께서도 머리를 잘 쓰십니다. 저도 둘러보았는데 확실히 이전보다 희귀한 물건들이 많더군요. 허나 저는 다른 볼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자께서는 편한 대로 하시지요.”
여인이 인사를 하자 한립이 포권을 했다. 검은 기운 속 여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요족 입구로 걸어갔다.
한립은 그녀가 대청을 나선 후에 자기도 몰래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여인과 몇 번의 거래로 드디어 화신 중기에 필요한 단약을 두 종류나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한동안은 단약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계속 근심하던 문제가 잘 해결되자 한립은 기분이 좋아졌고 가까운 점포로 발길을 옮겼다. 한 바퀴를 돌아본 한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물건도 많고 진귀한 보물도 이전보다 풍부해졌지만 그의 눈에 들 만한 것은 없었다. 지금 그에겐 법보나 재료보다 비술이나 공법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내놓고 거래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는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대청을 나서 그가 머물고 있는 석탑으로 돌아왔다.
보름 후면 천광전에서 장로급 수사가 설법을 하는 날이었고, 또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바로 천연성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석탑으로 돌아온 한립은 공적이 적힌 옥패를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영패로 교환한 후 자신의 소대가 주둔하는 곳으로 돌아와 밀실로 들어갔다.
* * *
사흘 후, 푸른 빛줄기가 급히 석탑을 떠나 성 밖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반나절 후, 푸른 빛줄기는 성 밖의 어떤 골짜기 상공에 있었다.
초목이 울창하게 자란 덕에 풍경이 좋은 것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점이 없는 평범한 골짜기였다. 푸른 빛줄기는 허공을 선회해 골짜기로 내려갔다.
빛이 가시고, 한립이 서른 장 높이의 석벽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를 살펴 아무런 이상이 없자 그가 소매를 털어 금색 부적을 꺼냈다.
파앗.
부적이 잿빛 석벽 안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고, 곧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석벽 표면에 회색빛이 한층 생겨나더니 한립 앞에 두 장 높이의 통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네모난 통로는 영기의 빛을 반짝이는 푸른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 장장 4, 50장을 걸어가니 하얀 빛의 장막으로 덮인 백옥 문이 나왔다. 한립이 주저 없이 수결을 맺자 빛의 장막이 진동하며 중간에서 갈라졌다.
그 안에는 서른 장 규모의 대청이 있었는데 20개가 넘는 돌 의자와 중간의 거대한 돌 탁자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의자에는 이미 여덟아홉 명의 수사들이 앉아 있었다. 성별도 복색도 달랐지만 전부 화신 이상의 수행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이 한립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한 형 오셨습니까!”
“이번에는 일찍 오셨습니다.”
“이번에 녹영을 생포하였다면서요? 우리 비승수사의 체면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한립도 웃으며 대답해 주고는 대청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눈을 감아 마음을 편안히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몇 명의 수사들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두 시진이 지난 후에 대청에 모인 수사들의 수는 열대여섯 명에 이르렀지만 다들 조용히 앉아 대기했다. 다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대청 밖에서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습니다. 몇몇은 임무가 있어 시간을 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조 형, 이제 시작하시죠.”
“음, 대충 다 모인 듯합니다. 문 형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립이 즉시 눈을 떴다.
한 명은 얼마 전에 한립에게 공적을 정산해 주었던 문 씨 성의 수사였고, 다른 한 명은 조무귀였다. 연허기 수사의 등장에 대청 안이 잠시 술렁였다.
“신입 비승수사 회합을 주관하던 범 수사가 일이 있어 우리가 왔네. 다들 이의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조무귀가 대청을 훑으며 담담히 물었고, 대청에 모인 수사들은 이의가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문 씨 성의 수사가 미소를 지었다.
“조 수사께서 홀로 주관해도 되었지만 최근 특수한 상황이 발생해 중요하게 논의할 일이 있어 나도 함께 자리하게 되었네.”
“특수한 상황이라면, 이족들이 성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붉은 얼굴에 붉은 코를 지닌 노인이 입을 열었다. 노인의 말에 다른 이들도 놀라 문 수사와 조무귀의 반응을 살폈다.
“그 일은 잠시 뒤에 이야기 하도록 하세. 일단 예년과 마찬가지로 교환회를 열어 서로의 수련 심득을 나누는 자리를 갖도록 하지! 수련하면서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우리에게 지도를 부탁해도 되네. 물론 범 수사 때와 마찬가지로 그 대가는 소홀히 할 수 없겠지.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중요한 소식이나 정보가 있다면 보고하게.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멸진단 등의 영약을 아낌없이 베풀 터이니.”
조무귀가 냉랭히 선언했다.
연허기 수사의 참석 하에 교환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립은 만년현옥을 이용해 진귀한 부적 몇 장을 교환할 수 있었다.
거래가 끝나자 수사들은 차례로 수련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던가 아니면 특수한 공법을 수련하며 알게 된 사실 등을 이야기했다.
물론 모호하게 말하는 수사도 있었고 자세히 서술하는 수사도 있었는데 모두 깨달음의 관건이 되는 부분에서는 말을 멈추었다.
관심이 가는 이들은 따로 전음을 보내 깨달음과 보물 혹은 다른 공법심득을 일대일로 거래하는 방식이었다. 문 수사와 조무귀는 조용히 앉아 행사에 끼어들지 않았다.
한립은 최근 부적술을 연구 중이어서 그 내용을 대충 설명했다.
그러나 대청 안의 수사들 중 부적술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많지 않아 아무도 그의 심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문 수사와 조무귀만이 한립이 은과문 영부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놀라는 기색이 스쳤을 뿐이다.
고계 수사들 중 은과문을 아는 이는 꽤 있었지만 관련 부적을 연구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의 차례가 끝나자 몇몇이 조무귀와 문 수사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질문을 들은 문 수사는 짧은 몇 마디로 답했고 더 깊이 들어가면 웃음을 머금고 입을 다물었다.
조무귀는 전음으로 대답했는데 역시 질문하는 수사가 고개를 끄덕이든 말든 할 말을 마치고는 더 이상 대답해주지 않았다.
새로운 비승수사들은 거의 모두 수련에 문제가 있는지 한립을 제외한 대부분이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립도 범성진마공을 수련해 법체 쌍수의 길을 걸어가며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차피 이 길을 가본 사람이 거의 없으니 가르침을 구할 사람이 없어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시진 동안 모두가 한 번씩 문답을 진행했고, 누군가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와 소식을 제공해 조무귀와 문 수사에게 영단을 하사받았다.
이전이었다면 이대로 회합은 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 수사가 가볍게 헛기침을 해 주위를 환기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소한 일을 처리했으니 이제 중요한 사안으로 들어가겠네. 이제부터 뇌라 장로님의 분부를 전할 것이니 모두 잘 듣게.”
그 소리에 다른 수사들은 물론이고 한립도 표정이 숙연해졌다. 천연성의 인족 장로 다섯 중 두 명이 비승수사였는데 그들이 바로 뇌라진인과 금월선사였다.
금월선사는 오직 수련에만 매진하고 다른 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 자연스럽게 뇌라진인이 천연성 비승수사들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었고, 비승수사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한립은 천연성에 온 후로 두 장로를 직접 본 일은 없었다. 몇 차례 천광전 설법에 참석했지만 다른 세 명의 장로를 보았을 뿐이었다.
“뇌라 장로님께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결국 확실한 소식을 알아내셨다. 10년 내로 천연성은 이종족 침공을 받을 것이며, 3개 이상의 이종족 연합군이 들이닥치게 될 것이다.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제2의 백족대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존재한다.”
조무귀의 말이 대청을 울렸다. 미리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백족대전이라는 말에 일부 수사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곳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영계로 올라온 지 채 백 년도 되지 않았지만 백족대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인요 양족이 사라질 뻔한 초대형 전쟁이었다.
전쟁은 만 년 동안 지속되었고 서로를 향한 공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구석에 앉아 있던 한립도 한숨을 내 쉬었다. 상황이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좋지 않아 대책을 마련해야 할 듯싶었다.
이대로 전쟁이 발발하면 화신기 수사들뿐 아니라 합체기 장로들에서도 사상자가 나올 수 있었다.
“선배님께서 이런 소식을 저희에게 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맨 발의 사내가 일어나 예를 올린 다음 정중하게 물었다.
“이곳에 모인 수사들은 영기가 희박한 하계에서 고된 수련을 마치고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네. 천신만고 끝에 비승하여 영계에 이른 사람들이니 전부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그간 천연성에 새로운 비승수사가 생기면 청명위라는 직책을 맡겨왔네. 겉보기에는 중용을 받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임무에는 거의 비승수사들이 투입됐지. 실질적으로 고계 수사들 중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우리가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처리하고 나머지 수사들은 안전한 곳으로 파견되어 왔다는 뜻이지. 다들 천연성에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네. 몇몇은 수차례나 명을 받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었을 것이고. 다들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황도 우리 비승수사들이 단결하고 뇌라 장로님께서 각고의 노력 끝에 쟁취한 결과라네. 금월선사님과 뇌라 장로님이 장로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정이 더욱 좋지 않아 천연성에서 번을 서던 비승수사 중 거의 반절이 죽어나가기도 했지.”
조무귀가 말을 마치자 수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도 체감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심지어 최근 몇 년 동안 위험한 임무를 나갔던 비승수사들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회합에 겨우 열댓 명만 참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립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는 청명위가 되자마자 부려습지와 같은 위험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들 소대 말고도 부려습지에서 순찰을 도는 다른 부대가 있었지만 영계 본토 수사가 이끄는 부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비승수사들이 맡고 있었다.
예전부터 의심스럽게 여기던 바였다. 그래서 비승수사들의 회합에 참석하라는 조무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천연성에서 지내다 보니 다른 수사들이 비승수사들을 두려워하거나 꺼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지에 침입해 보물을 찾으려던 명 노괴를 그리 쉽게 쫓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빌 언덕이 스스로 찾아와 잘 지내보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려습지 순찰도 충분히 위험한 임무였지만 비승수사 회합에 참석한 후에는 다른 위험한 임무를 강제로 떠맡기거나 하는 성가신 일은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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