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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94화 (551/2,000)

794화. 천광전(天廣殿)

*

“가지. 영족의 녹영은 잘 해결했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상황을 알렸다.

“녹영이요? 하핫, 정말 운도 없습니다. 대장님의 원자신광은 이종족을 대항하는데 즉효인걸요. 녹영이 아니라 적영(赤影)이 나타났다고 해도 대장님은 끄떡 없으셨을 겁니다.”

소년의 얼굴을 한 수사가 싱글싱글 웃으며 한립을 추켜세웠다.

“적영은 연허기 수사들도 상대하기 어려워하는데 어찌 일개 화신기 수사가 처리하겠나. 됐고, 바로 출발하세! 마지막 구역만 순찰을 마치면 다시 반년 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게야. 동허족 고계가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는 고계 영족의 출현이라니. 심상치 않아!”

한립은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맞습니다, 최근 10년간 뭔가 이상 합니다. 부려습지는 원래 이종족 첩자들이 자주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빈번한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심지어 고계 이종족들도 목숨을 걸고 출몰하니……. 듣기로는 요족에서 맡고 있는 장골(葬骨) 사막에도 요즘 대량의 이종족 첩자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순찰을 도는 화형기 요족 쪽에서도 대량의 사상자가 나왔고요. 설마 이종족이 우리 인족과 요족을 치려는 것일까요? 천연성을 공격할 계획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마 수사도 어두운 얼굴로 걱정을 토로했다. 그 말을 들은 부대원들의 안색이 순간 나빠졌다.

“그럴 리가요. 지난번 이종족 공격이 겨우 3만 년 전입니다. 보통 6, 7만년을 주기로 일어나는 일 아닌가요?”

허 선자가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전쟁이 6, 7만 년 아니 10만 년의 간격을 두고서 일어났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중대한 변고가 생기면 이종족들이 원기가 크게 상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그 이전에 대규모 전투를 시작할 가능성도 있어요! 50만 년 전, 백족대전(百族大戰)도 몇몇 이족들이 연합해 차례로 다섯 번이나 쳐들어와 인요 양족이 끝장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로 10만 년이 지나서야 원래의 성세를 되찾았다고 하죠. 물론 그때 전쟁을 일으킨 이종족들도 무사하지 못해 두 종족은 그 일로 멸족하고 말았지요.”

마 수사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백족대전이요? 제발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대규모 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난답니까? 게다가 하필 우리가 천연성에 있을 때요?”

탁충은 생각만 해도 싫은지 눈을 부릅떴다.

“마 수사, 걱정도 많으십니다. 백족 대전 같은 전쟁은 우리 같은 이들이 열댓 번 다시 태어나도 한 번 만나기 어려울 겁니다. 당시 전쟁에서 범인들은 몰라도 수사들은 십중팔구 죽어 나갔다던데요.”

허선자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다른 대원들도 백족대전이라는 말에 안색이 달라져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마 노인을 타박했다.

“됐네. 최근 이족 첩자들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뿐이니 앞서 나가지 말게. 그러나 이미 한 번 있었던 일이니 다시 반복 될 수도 있을 것이야. 허나 어차피 우리의 능력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일이네. 우리는 주어진 순찰 임무를 마치는 것이 우선이니 다른 일은 장로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두세.”

한립이 차분히 소란을 정리하고 먼저 전방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에 다른 대원도 더는 떠들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

며칠 후, 한립과 대원들은 금정주를 타고 천연성의 거탑으로 복귀했다.

다른 이들이 잠시 쉬는 동안 그는 홀로 주둔지를 떠나 석탑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한립은 열댓 개의 층과 여러 개의 문을 지나 평범해 보이는 대청에 도착했다.

대청 벽은 금제의 빛으로 반짝였고 한 눈에 보기에도 강력한 금제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돌 탁자와 의자에 앉아 있는 하얀 장포의 중년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한립이 들어서자 눈을 감고 있던 중년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한 현질(賢姪)이구만. 이번에도 수확이 있었는가? 이번에 데려온 것은 포로인가 아니면 시체인가? 어느 쪽이지?”

중년인은 한립과 낯이 익은 듯 편하게 물었다.

“문 선배님께 아룁니다. 이번에 잡아온 것은 영족의 첩자입니다.”

한립은 예를 갖추어 포권을 취한 후 손바닥을 뒤집어 옥갑을 꺼내 돌 탁자 위에 두 손으로 올려놓았다.

“영족! 호오, 포로로 거의 잡혀 오지 않는 이종족인데. 어디 한 번 보세.”

하얀 장포 중년인은 흥미가 가는지 드디어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탁자를 내리치자 탁자에서 소형 진법이 드러났다. 그 안에 옥갑을 올려 두자 옥갑은 완전한 은색빛으로 뒤덮였다.

하얀 장포 중년인은 개의치 않고 한쪽 소매를 옥갑을 향해 펄럭였다. 옥갑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서 미약한 빛의 녹색 구슬이 나타났다.

“녹영! 고계 영족이로군. 그것도 생포를 했어? 한 현질, 이번에 큰 공을 세웠구먼.”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보름 후에 천광전(天廣殿)에서 천령경(天靈境) 출신의 형 장로님께서 부적술에 관해 강연하실 거란 소식이 정말입니까?”

“그렇네. 이번 천광전 설법은 형 장로님으로 결정되었지. 워낙 그쪽으로 출중하신 분이니 아마 맞을 게야. 어찌 관심이 있는가?”

하얀 장포 중년인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제가 최근 부적술을 연구하고 있는데 가르침을 구할 곳이 없었습니다.”

“부적술이 깊이 연구하면 적을 상대하기에 큰 도움이 되기는 하지. 허나 아무리 그래도 보조적인 술법에 불과하네. 한 현질은 비승 후 짧은 시간 내에 화신 중기에 이렀으니 앞길이 구만리 아닌가! 이런 수련 속도는 우리 비승 수사들 중에서는 드문 경우네. 잡다한 것들에 한 눈을 팔다 대도(大道)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게.”

중년인은 미간을 좁혔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말씀은 가슴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형 장로님의 설법은 꼭 듣고 싶습니다. 그간의 공적으로 천광전에 들어갈 기회를 얻을 수는 없을 지요?”

“그리 원한다면 나도 더는 말리지 않겠네. 이전의 공적과 이번에 녹영을 생포한 공적을 합치면 천광전에 들어가고도 남을게야. 허허, 10년 마다 한 번 있는 장로급의 설법에 한 번도 빠지지 않는군. 좋네, 공적을 산출해줄 테니 논공각(論功閣)으로 가서 전도령(傳道令)을 수령하게.”

하얀 장포 중년인이 품에서 옥패를 꺼내 그 위에 무언가를 새긴 후 한립에게 주었다. 옥패를 받은 한립은 중년인에게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중년인은 떠나는 한립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옥갑을 닫은 후 수결을 맺어 돌 탁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탁자의 진법이 눈부신 빛을 발했고 옥갑이 하얀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한립은 석탑에서 나와 천연성 시장으로 향했고, 몇 시진 후, 시장 중간의 태현전(太玄殿)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영석을 지불하고 차광패를 받아 모습을 숨긴 후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긴 통로를 지나니 은빛 속에서 거대한 대청이 나타났고 안에는 물건을 거래하려는 인족과 요족 수사들이 가득했다. 은빛과 검은빛이 반짝이며 돌아다니는 것이 못해도 3, 4 백 명은 되는 듯했다.

대청에는 수십 개의 노점이 있었지만 한립은 시선은 어느 돌기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검은 기운에 휩싸인 요족이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한립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왔군요. 지난번 거래 이후 수사께서 폐관 수련에라도 들어간 줄 알았습니다.”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그를 반기고 있었다.

“저도 혹시나 해서 와본 것입니다. 운 좋게도 염 수사께서 정말 와 계셨군요. 수사께서도 요즘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셨나 봅니다. 아무래도 저희의 거래를 서둘러 마쳐야겠습니다.”

한립도 미소를 지으며 전음으로 대답했다.

“심상치 않다니요?”

“알면서 모르는 척 마십시오. 대청 안에 거래를 위해 모인 인족과 요족의 수가 이전의 몇 배입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검은 기운 속 여인은 서늘하게 반문했지만 한립은 차분하기만 했다.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신 건가요?”

“다른 것은 모르겠고 고계 수사들이 빈번하게 출동하고 제가 담당하는 구역에서 이종족 첩자들의 수가 이전에 비해 대여섯 배나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그쪽은 어떠십니까?”

“……비슷한 상황이에요. 이쪽 늙은이들도 자주 얼굴을 비추고 성 안에 낯선 얼굴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다들 수행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칠지(七地)에서 새로 초빙한 인사들 같고요.”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이 이번에는 솔직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고는 있는 것이군요. 수사의 생각에 이종족이 성을 공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적어도 3할이요. 그렇지 않고서야 성 안에 이런 변화가 있을 리 없겠죠.”

“3 할이라……. 상당히 높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이번 거래를 마지막으로 전 다시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수사도 살고 싶다면 하루 빨리 성을 떠나는 것이 나을 거예요. 일단 이종족과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 같은 존재들은 십중팔구 화를 피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말은 쉽지만 성을 떠나는 일이 쉬운 가요. 게다가 저는 매년…….”

쓴웃음을 지으며 무어라 말하던 한립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떠나는 건 곤란하겠네요. 서로 사정이 다르니 각자 알아서 해야겠죠. 소식은 이만하면 주고받은 것 같은데 이제 물건을 거래할까요?”

여인이 가볍게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선자께서 모아온 영초 종자가 얼마나 되는지요? 지난 번에 가져다주신 몇 가지는, 비교적 드문 것이기는 했지만 크게 쓸모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안심해요. 이번엔 다른 영초들은 물론이고 수사께서 꼭 집어 원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몇 가지 구해왔으니까요. 솔직히 말해 곧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만 아니라면 거래하지 않았을 종자들이에요. 그런데 만년 영초들은 충분히 지니고 오셨나요?”

“그간 거래하면서 부족했던 적이 있던가요?”

한립도 그녀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건 그러네요. 허나 이번에 구한 종자들은 아주 진귀해서 장기적으로 보면 수사의 만년 영초보다 가치가 있는 것들이에요. 만년 영초가 당장 시장 가격이 높지 않았다면 아까워서 내놓지 못했겠죠.”

여인은 손바닥을 뒤집어 비취색 목함을 꺼내 던져주었다. 목함 위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희미하게 주술 문자가 아른거렸다.

한립은 신중한 얼굴로 목함을 끌어들여 명청령안을 이용해 함을 꿰뚫어 본 다음 강력한 의식을 불어넣어 자세히 확인했다.

순간 그가 멍한 얼굴을 하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기운 속 여인은 한립을 재촉하지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은색 기운 속의 한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잠시 후 그녀가 짧게 탄식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상대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엄청난 수량의 천년 영초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희귀한 영초 종자를 거래하는 인물이 평범할 리 없었다.

그녀는 그가 신비에 휩싸인 인족 진령세가의 일원일 것이다. 특히 영초를 기르는데 이름이 높은 ‘민 가’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상대가 어찌나 신중한지 여러 번 접촉하며 떠 보았지만 내력을 캐낼 수 없었고 자신의 성을 노출하는 실수까지 하고 말았다. 그 일로 여인은 한참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이후 그녀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마음을 버렸다. 괜히 부주의해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여인은 그간 그와의 거래를 통해 얻은 만년 영초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들떴다. 그녀도 특수한 신분으로 종족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렸지만 그렇게 많은 만년 영초들은 돈이 있다고 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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