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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93화 (550/2,000)
  • 793화. 녹색 그림자

    *

    “어서 오행영광진(五行靈光陣)을 편다. 웬만한 방어 보물로는 막을 수 없어.”

    청갑 노인이 소리쳤다.

    이어 그는 자신의 머리 위를 떠도는 구리거울도 개의치 않고 손을 저어 붉은 영전(令箭) 모양의 보물을 하늘 높이 던졌다. 붉은 빛이 번뜩이고 보물이 사라졌다.

    다른 흑철위들이 정신을 차리고 법기를 꺼내 발동했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퍼퍼퍽!

    세 명의 흑철위의 손목에서 이령반이 폭발했다. 이어 그들의 발밑에서 그림자 같은 허상들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나타나자마자 몸을 길게 늘려 수사들을 향해 치솟았다.

    “헛!”

    “으악!”

    회색 그림자들을 본 세 명의 흑철위는 놀라 소리쳤지만 법보와 영력으로 만든 보호막이 무색하게도 회색 그림자를 전혀 막을 수 없었다.

    비명이 울리며 머리를 부여잡은 흑철위들이 추락했다.

    “그림자 괴뢰! 영족인(影族人)이다. 뇌전 속성 신통이나 법보를 써!”

    어두운 그림자들을 본 노인은 안색이 변해 황급히 소리쳤다. 그는 즉시 입에서 은백색 비검을 방출했고 은백색 뇌전으로 변해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꽈광!

    괴이하게 노인의 뒤에서 달려들던 회색 그림자가 뇌전에 맞아 몇 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하지만 대원들 중 두 명이 뇌전 속성 보물을 방출했을 뿐 나머지는 얼어붙은 채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금속 속성이란 다양한 영기 속성 중 가장 패도적이면서 희귀했다. 아무나 강력한 뇌전 속성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란 소리였다.

    영족은 괴이한 이종족 중 하나로 뇌전 속성 보물이나 몇 가지 특수한 방법으로 밖에는 상대할 수 없었고 다른 신통은 잘 먹히지 않았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다른 흑철위에게 회색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흑철위들은 경악하며 일시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회색 그림자는 그들의 그림자라도 되는 양 따라 붙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그림자 괴뢰에 쫓겨 수십 장 밖으로 달아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청갑 노인과 뇌전 속성 보물을 지닌 흑철위 뿐이었다.

    꽈광! 쿠릉! 콰콰쾅!

    그러나 노인과 수사에게도 회색 그림자들 일고여덟 개가 무더기로 달려들어 쉼 없이 공격하는 통에 천둥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회색 그림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지 튕겨나갔다 다시 뛰어들기를 반복했다.

    청갑 노인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손목에서 빛을 뿜어 알 수 없는 부적을 꺼냈다.

    “죽어라!”

    노인이 달려드는 회색 그림자 하나를 사납게 노려보았고 부적은 열댓 개의 남색 뇌전으로 변해 그림자 괴뢰들을 공격했다.

    쿠콰콰쾅!

    드디어 회색 그림자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뇌전에 휩싸여 흩어졌다. 노인은 그것을 보고 내심 기뻐했다. 많은 대가를 주고 특별히 준비한 부적을 제대로 쓴 셈이었다.

    그가 연이어 같은 부적을 사용해 미친 듯이 회색 그림자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뇌전이 인근 회색 그림자들을 뒤덮으려는 순간, 그들 사이로 녹색 거대 손이 나타났다. 거대 손은 무슨 수를 썼는지 뇌전들을 잡아챘다.

    쾅! 쿠르릉 콰쾅!

    “녹영(綠影)!”

    녹색 거대 손을 본 노인의 동공이 수축해 신음하듯 외쳤다.

    “너희는 다 죽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녹색 거대 손에서 들려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일그러지더니 녹색의 빛 그림자로 변한 것이다.

    빛 그림자는 언뜻 보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유난히 크고 눈알이 시뻘게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고계 영족이 나타나자 청갑 노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뇌전의 힘으로 대부분의 영족을 상대할 수 있지만 녹영처럼 인족 화신기 수사에 맞먹는 존재라면 뇌전에 약간이나마 저항력이 있었다.

    같은 화신급 수사라도 영족 녹영을 만나면 거의 인족의 패배로 끝나곤 했다. 게다가 혼자 힘으로 이렇게 많은 그림자 괴뢰를 부리는 것을 보니 녹영 중에서도 급이 가장 높은 존재인 것이 분명했다.

    이때 달아난 흑철위들 쪽에서도 폭음이 들리며 고전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그림자 괴뢰에 따라 잡힌 것이다.

    녹영은 노인이 놀라든 말든 상관없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단 한 걸음이지만 괴이하게도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져 한 장 앞까지 다가왔고 그대로 손을 들어 노인의 몸을 휘감은 뇌전을 쥐려 했다.

    뜻밖에도 맨 손으로 노인의 법보를 억제하려는 것이다. 노인은 화들짝 놀랐지만 상대의 공격이 너무 빨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낮게 일갈하며 전신의 법력을 법보에 불어 넣었다.

    그를 보호하는 뇌전이 일시에 한층 굵어졌다. 그것을 본 녹영의 핏빛 눈에 조소가 어렸고 지체 없이 굵직한 뇌전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콰쾅!

    뇌전들이 녹색 손 주위에서 폭발했지만 결국에는 원형의 작은 검으로 돌아갔다. 작은 검은 수축했다 늘어나며 녹색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이에 청갑 노인은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녹영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곧바로 공격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노인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청백색의 뇌전이 번뜩이더니 등에 날개가 달린 인영이 나타났다.

    인영은 주저 없이 두 팔을 펼쳤다.

    인영은 한 손을 가볍게 튕겨 굵직한 금빛 뇌전을 방출했고 다른 손으로는 영기의 빛을 번뜩여 사각형의 손수건을 쏘아 보냈다. 손수건 표면에 기괴한 주술 문양이 어른거려 무척 신비로웠다.

    녹영은 그의 등장에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틀어 등 뒤에서 회색 그림자 두 개를 뽑아냈다. 회색 그림자는 바로 양 옆에서 금빛 뇌전과 비단 손수건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그 틈에 뒤로 물러나려는 것 같았다.

    “흥!”

    인영이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고 잠시 후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코웃음 소리를 들은 녹영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멈춘 것이다.

    쿠쾅!

    다섯 줄기의 금빛 뇌전이 먼저 그림자 괴뢰와 충돌했다. 그러자 회색 그림자는 눈 녹듯이 사라졌고 회색 거품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비단 손수건의 은색 주술이 빛을 발하며 폭발해 수천수만의 가느다란 은실로 변해 회색 그림자를 뒤덮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그림자 괴뢰를 꽁꽁 휘감았다.

    그림자 괴뢰는 손수건에 수많은 뇌전이 흘러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때 날개 달린 인영이 날개를 펄럭여 은색 실로 변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은색 실은 녹영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다른 법보 없이 맨 손으로 아래쪽을 내리쳤다.

    그러자 수정처럼 반짝이는 다섯 손가락에서 색이 다른 뼈 반지 다섯 개가 나타났다. 뼈 반지들은 옥처럼 빛났고 콩알만 한 정교한 해골 머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해골 머리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눈을 굴리고 입을 벌려댔다.

    다섯 색깔의 한염(寒焰)이 각각의 입에서 분출되어 하나로 합쳐지더니 아름다운 오색 화염으로 변했다.

    녹영은 충격에서 벗어나 술법을 펼치기도 전에 눈앞이 밝아지며 이번엔 오색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온 몸이 굳은 것처럼 녹영의 행동이 더없이 느려졌다.

    이에 녹영은 경악하고 있었다.

    “크하하학!”

    그러나 그도 영족의 고계 수사였기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녹색 육체를 터트려 녹색 실로 변해 오색 화염의 구속을 벗어나려 했다.

    허공의 인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손을 들어 아래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회색 고리가 연달아 방출되어 녹색 실과 상극이라도 되는 듯 가는 곳마다 녹색 실들을 산산이 부숴 녹색 기운으로 흩어 버렸다.

    녹색 기운은 무형의 압력을 받아 서서히 한 덩이로 뭉쳐졌고 회색 기운 탓에 다시 녹색 빛 그림자로 돌아갔다.

    녹색 빛 그림자의 시뻘건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몸을 산맥이 내리 누르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슈슉!

    날개 달린 인영이 여러 색깔의 금제 부적을 녹영의 몸으로 쏘아 보냈다. 움찔하던 녹영은 그대로 암담해졌다.

    이어 기이한 일이 펼쳐졌다. 녹영은 금계 부적의 영향으로 급속도로 몸이 작아졌고 결국 주먹 크기의 녹색 구슬로 변한 것이다.

    일을 마친 인영이 눈이 휘둥그레진 청갑 노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악 수사, 제가 늦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한 형,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수사께서 제때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노부 이번에 크게 당할 뻔 했습니다. 한 형의 실력이 대단하다고는 들었지만 오늘 직접 보니 역시 남다르십니다. 고계 영족도 한 형에게는 적수가 되지 않는군요.”

    노인은 비검은 회수한 다음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날개 달린 인영은 푸른 전갑을 입은 한립이었다.

    이제 그는 화신 초기가 아니라 어느덧 중기에 접어들었다.

    “과찬이십니다. 제 신통이 마침 영족과는 상극인 덕이지요. 만일 다른 강력한 이종족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처리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허허, 과연 겸손하십니다. 수사께서 이끄는 소대가 수십 년 간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한 형께서는 그간 적잖은 이종족 첩자를 죽이거나 생포했다고 들었습니다. 공적으로 쳐도 저와는 비교할 수가 없겠군요.”

    “과분한 칭찬입니다. 그런데 다른 수사들은 괜찮습니까?”

    한립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영족을 제압했으니 그가 부리던 그림자 괴뢰들이야 진작 사라졌겠지요. 그림자 괴뢰가 깃들어 쓰러졌던 수하들도 잠시 후면 깨어날 겁니다. 원기야 상했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 형께서는 어찌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수하들은 어쩌시고요.”

    노인은 한립이 자신의 신통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치 있게 화제를 돌렸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새로 얻은 고계 이령반의 경계 범위가 넓어 대원들을 데리고 근처를 순찰하던 중 이곳의 상황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수하들은 헤어진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한립은 저물탁에서 옥갑을 꺼내 녹영 구슬을 조심스레 담아 넣었다.

    “아,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운이 좋은 날이군요!”

    노인이 감개 무량해하자 주변에 남아 있던 흑철위 두 명도 얼른 한립에게 대례를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또한 바닥에 추락한 이들과 멀리 달아났던 흑철위들도 날아들어 한립을 보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에 한립은 두어 마디 대꾸해주고는 노인과 인사를 한 뒤 푸른 빛줄기로 변해 떠났다.

    “한 선배님이 천연성에 오셨을 때는 화신 초기셨는데 이미 화신 중기 수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10년 전에 중기에 이르렀다니 지금은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흉흉한 인상의 거한은 한립의 둔광이 완전히 사라지자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순찰을 도는 수십 년 동안 고계 이족만 일고여덟 명을 죽였다고 하니 저 선배님을 다른 청명위와 같이 거론하기는 어렵지요. 설마 비승 수사들은 전부 저렇게 대단한 걸까요?”

    또 다른 흑철위가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비승 수사들이 본 영계 수사들보다 실전에서 강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 중에서도 한 선배님은 별종일 겁니다.”

    중년 여수사가 냉랭히 반박했다. 그러나 청갑 노인은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말을 아꼈고 한참 후에야 손을 저으며 이동을 명했다.

    수백 리 밖, 언덕 상공으로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자 동시에 열 개의 둔광이 언덕에서 솟아올라 한립 앞에 섰다.

    “대장님.”

    “한 선배님!”

    다들 부르는 호칭은 달랐지만 손을 공손히 모으고 그 앞에 선 모양새가 아주 공손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한립과 생활하며 그를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임무를 맡아 비슷한 구역을 도는 소대가 셋은 더 되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드문드문 사상자가 나왔고 어떤 부대는 대부분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런데 한립이 있는 부대는 수많은 위험을 마주하고도 한립이 나서 해결해 주었기에 오늘 날까지도 무사히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립을 따라 다니며 꽤 많은 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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