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88화 (545/2,000)
  • 788화. 뇌포(雷袍)

    *

    한립은 천연성에서 은과문과 연관된 금제들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그가 연구해낸 만롱주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금제가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작고 정교하면서도 은밀하게 작용하는 것은 없었다.

    그보다 의식이 몇 배나 강한 수사가 자세히 땅을 수색하지 않는 한 절대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간단하게 제련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법기란 뜻이다.

    물론 간단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이야기로 금궐옥서 잔본의 부적술을 연구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실 인계에 있을 때도 이런 법기를 한 벌 만들어 놓을까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주재료 중 한 가지가 인계에서 이미 멸종되어 불가능했다.

    그런데 낙일성 시장에서 주재료들이 그다지 비싸지 않은 금액에 거래되는 것을 보고 필요한 재료들을 일괄적으로 구매해 두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척 현명한 행동이었다.

    ‘내 영지에서 누군가 수상한 짓을 벌이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순 없겠지.’

    어떻게 처리하든 상대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반드시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푸른 빛줄기로 변해 거처에서 날아 오른 그는 그곳을 중심으로 무수히 많은 만롱주들을 규칙적으로 땅 속 깊이 묻으며 돌아다녔다.

    빠른 속도 덕에 겨우 반나절 만에 영지의 3분의 2에 금제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후 한립은 조용히 동부로 돌아가 밀실 중 한 곳에 기괴한 진법을 설치하고 팔각형의 진법 원반을 진법의 눈에 올려두었다.

    이어 수십 개의 고계 영석을 진법 주위에 박고 연달아 법결을 날려 즉시 진법을 발동했다.

    우웅.

    진법 전체가 하얀빛을 뿜었고, 팔각형 진법 원반 위로 은색 빛의 장막이 드리워지며 하얀빛이 반짝거렸다.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사로이 자신의 영지에 침입한 이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와 영지 쟁투를 벌였던 눈썹이 치솟은 사내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기 전에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암암리에 상대의 행동을 주시할 생각이었다.

    이제 신비한 번개 문양을 살펴보고 금궐옥서 잔본에 적힌 은과문 영부(靈符)와 필요한 영초들도 숙성시켜 옥청단 제련도 함께 병행해야 했다.

    밀실로 들어간 그가 석문을 닫고 중앙으로 가 방석 위에 앉았다.

    파앗.

    저물탁을 스치니 푸른빛이 반짝이고 옥간과 금색 손수건 그리고 구슬이 나타났다. 한립은 의식을 옥간에 주입해 뇌문(雷紋) 도안을 다시 살폈다.

    금빛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갑작스레 그것을 허공에 던졌다. 그리고 빙글빙글 도는 손수건을 향해 입을 벌려 새빨간 불구슬을 분출했다.

    그러자 광채가 번뜩이고 불구슬이 푸쉭! 하는 소리를 남기고 사그라졌다.

    ‘흠.’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금빛 손수건을 가리켜 투명한 얼음송곳을 분출했다. 역시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는 얼음송곳이 사라졌다.

    ‘설마 뇌문으로 이뤄진 물체는 오행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가?’

    한립이 손끝을 가볍게 튕겨 금빛 검기를 방출했다.

    스걱.

    금빛 손수건이 가볍게 두 조각으로 잘려나가며 무수히 많은 세밀한 금빛 실을 발산하며 폭발해 사라졌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다 또 좌우로 흔들었다.

    이번에는 금색 구슬 차례였다. 구슬이 함유한 뇌전의 기운은 거칠고 사나웠다.

    꽈과광!

    반 시진 후, 밀실에 돌연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렸고 금제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벽이 갈라지며 사발 굵기의 뇌전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금빛을 번뜩이며 꿈틀거리는 뇌전 때문에 무수히 많은 금빛 뱀들이 난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 금빛 중심에서 맑은 소리가 울리고 거무튀튀한 동산이 떠올라 회색 고리를 겹겹이 방출했다.

    회색빛의 고리가 달려들자 밀실을 뒤덮은 금빛 뇌전이 밀려나 원자신광 속에서 한 마리의 금빛 뇌전 교룡으로 응집했다. 뇌전 교룡은 꼬리와 머리를 마구 흔들며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한립이 앉은 곳을 제외하고는 주위가 텅텅 비었다. 대여섯 장의 깊은 구덩이가 뚫린 것이다. 한립은 구덩이 중간에 솟아 오른 돌기둥 위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작은 동산과 금빛 뇌전 교룡 그리고 주변의 상황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뇌문 구슬의 위력이 벽사신뢰의 위력을 10배 이상 끌어올리는구나! 조금 전 원자신광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면 나까지 휘말릴 뻔했으니 동급 적수도 쉽게 죽일 수 있겠어.”

    그러나 뇌문 구슬의 성공률이 낮은 것이 아쉬웠다. 벽사신뢰를 부린다지만 이것에 전부 써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가 지닌 뇌전의 힘이 벽사신뢰가 전부는 아니었다.

    한립은 입을 벌려 푸른빛을 내뿜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작은 솥은 바로 허천정이었다.

    한 손으로 뒤통수를 매만지니 회색기운이 분출되었고 뇌전교룡을 가둔 검은 동산을 휘감았다. 두 개의 강력한 금제가 걸리자 뇌전 교룡도 더는 난동을 부리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한립이 손을 뻗어 작은 솥을 가리켰다.

    웅!

    솥뚜껑이 날아가고 회색 기운이 강제로 뇌전교룡을 솥 안에 밀어 넣고 스스로 흩어져 사라졌다. 검은 동산도 한립의 손짓에 따라 체내로 흡수되었다.

    난장판이 된 주변을 보며 그가 손을 들어 두 장 크기의 원숭이 꼭두각시를 꺼내 의식 한 줄기를 심었다. 명을 내린 후 자신은 다른 밀실로 자리를 옮겼다. 허천정이 공중에 뜬 채로 그를 바짝 따라왔다. 새로운 밀실에서 한립은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뻗었다.

    쉬익!

    그러자 허천정이 빠르게 다가왔고 속으로 통보결을 읊자 솥에서 푸른빛이 크게 방출되며 삽시간에 열댓 배로 커졌다.

    텅!

    손가락으로 한 장 크기의 솥을 튕기자 안에서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고 사람 머리통만한 은빛이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꽈과광! 콰쾅!

    솥 안에서 아직도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이 더 많은 뇌전이 남아 있는 듯했다. 바로 그가 처음으로 소천겁을 맞으며 강제로 가둬둔 금색과 은색의 천뢰였다. 이 천뢰의 위력은 벽사신뢰에 뒤지지 않았고 수량 또한 많아 뇌문 물체를 실험하기에 적합했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한립은 뇌전덩이를 향해 열 손가락을 쉼 없이 튕겨 강대한 의식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은색 뇌전 속에서 굉음이 들려왔고 무수히 많은 은색 뇌전 줄기로 갈라져갔다…….

    시간이 흘러 한립이 밀실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우웅!

    대청에 설치해둔 진법 안에서 팔각형 진법 원반이 맑게 울어댔다. 진법 원반에서 은색 빛의 장막이 튀어 나오고 있었다.

    줄곧 굳게 닫혀있던 밀실의 석문이 열리고 푸른 빛줄기가 쇄도해 대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금색 장포를 걸친 한립이었다.

    장포의 모양은 평범했으나 자세히 보면 금색과 은색의 주술 문자가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려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립은 푸른 장포를 꺼내 그 위에 덧입어 금색 장포를 꼼꼼하게 가렸다.

    이어 진법으로 다가간 그는 허공에 형성된 은색 빛의 장막을 주시했다. 은색 장막 한쪽에 색이 다른 네 개의 점이 반짝이며 중심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

    눈을 빛낸 한립은 묵묵히 점들의 이동방향을 주시했고 그것들이 자신의 거처로 다가오자 표정이 가라앉았다.

    점들은 상당히 천천히 이동해 장장 한 시진을 기다려서야 네 개의 점이 거처에서 2, 3천리 떨어진 곳에서 멈춰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각 점들은 주변을 배회하며 이리저리 돌았다.

    드디어 한립이 턱을 쓸어내리며 반응을 보였다.

    웽웽웽!

    소매를 털어 열댓 마리의 주먹만 한 서금충들을 방출했다. 서금충들은 지붕을 한 바퀴 선회해 바람처럼 바깥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푸른 장포를 풀어 젖혀 다시 금색의 장포를 드러냈다. 손끝으로 장포 옷자락을 만지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이것은 뇌포(雷袍)로 뇌문과 허천정 안의 대량의 천뢰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뇌포 안에 열댓 종의 뇌문 부호를 사용했으니 적과 싸울 때 새로운 비장의 한 수가 되어줄 것이다.

    뇌문 구슬도 열댓 개나 만들어 두었다. 이제 연허기 수사라도 그를 쉽게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한립은 짧은 시간에 전력을 크게 강화했다.

    묵묵히 생각을 정리한 그가 다시 푸른 장포의 옷고름을 바르게 정리하고 저물탁을 스쳐 하얀 옥패를 꺼냈다. 금궐옥서 잔본이었다.

    금궐옥서의 외편 잔본에는 부적술이 적혀 있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네 종류의 제련법은 확실했다.

    이전에 사용했던 태일화청부(太一化淸符), 만롱주를 제련하는데 응용한 구궁천건부(九宮天乾符) 및 갑원부(甲元符)라 불리는 그림자 꼭두각시 부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공격용 부적인 천과부(天戈符)였다.

    태일화청부는 아직 성공률이 낮고 대량의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천란성수 분신의 깨달음이 담긴 옥간의 도움으로 거의 연구를 마쳤다.

    또 구궁천건부는 본래 적을 가두는데 쓰는 선가 부적이었다. 이것을 절반가량 이해해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만롱주라는 간단한 법기를 개발했다. 나머지 갑원부와 천과부는 지금까지 전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었다.

    그러나 천연성 시장에서 우연히 비슷한 그림자 꼭두각시 부적을 볼 기회가 있어 갑원부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갔다. 안 그래도 괴뢰술에 능한 한립이었으니 앞으로 연구를 계속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천과부는 금속 속성의 공격형 부적이다.

    기록되어 있기로는 이 부적을 부릴 수 있다면 진선계의 천과인(天戈刃)을 불러낼 수 있어 그 위력이 가히 바다를 가르고 땅을 뒤엎을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부적 제련법이 너무 오묘해서 화신기 수사인 한립의 수준으로는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한립은 옥패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천연성에는 중, 고계 수사들이 무수히 많았고 법력과 신통이 그를 넘어서는 자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니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해 두는 것이 중요했다.

    아쉽게도 네 장의 부적들 중 대부분은 지금 제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일화청부를 제련했을 때 연허기 수사의 이목까지 피했으니 만일 한두 장만 더 지니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부적들은 조급히 생각 말고 천천히 연구를 해나가면 그만이었다.

    파앗.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이 손목을 털어 저물탁에서 푸른빛을 내뿜었다. 빛이 가시고 땅 바닥에 크기가 제각각인 비단함들과 자기병이 나타났다.

    그가 허공에 한 손으로 손짓하자 비단함 중 하나가 날아들었다. 비단함 안에는 붉은 빛을 띠는 짐승 가죽이 들어 있었는데 영기의 빛을 반짝이는 것이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한립은 요수 가죽을 허공으로 던지고 제련에 들어갔다.

    푸확!

    그가 두 손을 모으고 수결을 외우자 푸른 기운이 요수 가죽을 뒤덮었고, 푸른 색이 순식간에 새빨간 색으로 변해 활활 타올랐다.

    괴이한 일이었다.

    요수 가죽은 새빨간 화염 속에서 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찌를 듯한 영기의 빛을 뿜어내며 점점 투명하게 변했다.

    한립이 이번에는 다른 옥함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옥함 안에서 다양한 색의 가루가 나왔고 화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영기의 빛으로 변해 요수 가죽에 달라붙었고, 투명한 요수 가죽은 표면이 점점 다양한 색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한립은 열 손가락으로 법결을 튕겨대며 눈을 감았다.

    이제 밀실 안에는 가끔 불길 속에서 무언가 ‘타닥’ 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그동안 며칠에 한 번씩 밀실 안에서는 둔중한 굉음이 들려왔다. 그런 것이 열댓 번 반복되다 드디어 고요가 찾아왔다. 다시 보름이 지나 밀실 문이 열리며 한립이 걸어 나와 즉시 대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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