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화. 천보상인과 만롱주(萬瓏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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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태현전을 나와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성벽을 넘고 있을 때, 태현전 모처의 밀실에서 두 사람이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경매를 진행했던 하얀 장포의 적 노인이었다. 노인 앞에서 보라색 장포를 걸친 청년이 돌로 만든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입가에 핏방울이 묻은 것 마냥 새빨간 점이 있어 눈에 띄었다.
적 노인이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안심하시지요, 공자! 본 모습을 감추고는 있었지만 노복의 자광영목(紫光靈目)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음양화극결을 낙찰 받아 가져간 이는 여인이었고 공자께서 주신 용모파기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추한 얼굴이었지요.”
천연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연기대사이자 화신기 수사가 청년 앞에서 하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성 내의 다른 수사들이 보았다면 눈알이 튀어나올 듯 놀랐을 것이다.
붉은 반점 청년은 노인의 말에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적 노, 여인이 단번에 그렇게 많은 극품영석을 내놓고 공법을 거래해갔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엽 가 혹은 곡 가 사람일 걸세! 두 가문은 우리 롱 가처럼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숨겨진 진령세가(眞靈世家)로 여인들에게만 진령혈맥이 유전되지 않는가.
우리 롱 가가 삼경에 분포한 경매소들을 관할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엄청난 매장량을 지닌 극품영석 광산을 은밀히 지배하지. 두 가문 모두 인원이 많지 않고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어떤 진령혈맥이 유전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보니 그들 가문 중 한 곳의 선조가 천봉혈맥(天鳳血脈)을 지닌 반요였더군. 천봉혈맥이라면 우리 진룡혈맥처럼 영계에서 가장 강력한 혈맥 중 하나가 아닌가! 도박하는 셈 치고 미끼를 던졌는데 성공한 듯하네. 과연 진령세가의 제자들이 신분을 숨기고 한동안 천연성에서 머무는 것이 맞았어.”
핏빛 반점 청년이 자신 있게 말했다.
“공자의 뛰어난 지력 덕분입니다. 음양화극결이 천봉혈맥을 지닌 이에게 더없이 귀중하기는 하지요. 이런 오행지력을 조정하는데 특화된 최상급 공법이라야 완전히 천봉의 피를 격발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여인이 공법을 알아보고 사간 것부터가 상고시대부터 설치해둔 거대한 함정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얀 장포 노인이 빙긋 미소 지었다.
“선조의 지혜야 우리 후배들이 따라갈 수 없지. 게다가 본 공자 체내의 진룡의 피가 역대 선조들보다 훨씬 농염하지 않았다면 가문의 노괴들이 이번 일을 지지했을 리 있겠는가. 상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가문 소유의 묵기린 비늘과 평해과 등의 보물까지 함께 내놓아야 했으니까. 더불어 슬쩍 진령세가 제자들에게 소문을 퍼트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겠지. 다행인 것은 낙찰가가 상당하다는 것이야. 게다가 만년영초 다섯 개라니 큰 손해는 아니었네. 진령 비늘을 차지한 수사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있는가?”
“공자께서도 아시겠지만 노복이 수련한 자광영목은 평생 동안 단 세 번 밖에 펼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번을 그 자에게 쓸 수야 없지요. 다만 연허기 수사는 아니고 화신기 수사라는 것은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번에 내놓은 영초 말고도 더 많은 만년영초를 지니고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 설마 영초를 기르는데 뛰어난 민 씨 가문의 수사였을까요? 민 가의 혈맥은 진령가문처럼 강대하지는 못해도 영초를 기르는데 뛰어난 가문 아닙니까.”
침음하던 노인이 신중하게 의견을 밝혔다.
“민 가라,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됐네! 민 가는 천묘령황이 지명한 예속 가문이니 지금은 건드릴 때가 아니야.”
청년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현명하십니다. 비록 저희가 정말 삼황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겨우 영초 몇 뿌리 때문에 척을 질 상대는 아니지요.”
노인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에 자광영목을 써서 수행에 손상을 입었을 테지.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가 혈제(血祭) 의식을 치러 수행을 높여 주겠네.”
핏빛 반점 청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노인을 향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공자!”
그 말에 적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예를 취했다. 핏빛 반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에 잠겼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한립은 자신의 동부가 있는 산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 리 밖에 떨어진 저지대에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었다.
* * *
“금 형, 무슨 의도로 여기까지 몰래 따라온 것입니까! 제가 눈 밖에 날 행동이라도 한 것입니까?”
말을 하는 이는 옹 수사였고, 그와 대치하는 자는 옥궐각에서 처음 보았던 금 씨 성의 뚱뚱한 수사였다. 겉으로 보기에 친분이 있어 보이던 그들은 당장이라도 충돌할 기세였다.
“옹 현제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그저 우연히 지나다 아우님이 여기 있는 것을 보고 인사나 할 겸해서 온 것이지요.”
“우연히 지나다 들렸다고요. 제가 백치인줄 아십니까? 누가 이렇게 외진 곳에 인사나 하려고 은닉술을 펼쳐 십여 만 리를 따라 간답니까!”
옹 수사가 냉랭히 따졌다.
“허허, 그건 저도 참 궁금한 바입니다. 옹 현제는 어찌 자기 동부를 놔두고 이런 외진 곳에 와있는 것일까요? 기억대로라면 이곳을 차지하려고 필사적으로 대결까지 했었지요.”
금 수사가 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교활한 본색을 드러냈다.
“뭐라고요? 제가 어딜 가는지 금형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라도 있습니까?”
“자자, 그리 화낼 필요 없습니다. 이미 주인도 있는 땅에서 소란을 피우다 흔적이라도 남기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러지 말고 이곳에서 찾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귀띔해주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 수사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옹 수사를 떠보았다. 그러나 옹 수사는 어이없다는 듯 냉소하며 눈빛은 흉흉하게 빛났다.
파앗.
돌연 금 수사 뒤쪽 허공에서 비취색 빛이 반짝였고 가느다란 녹색실이 바르르 떨며 거대한 그물로 변했다. 모든 것이 아무 조짐도 없이 이루어져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금 수사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웃음을 머금고 옹 수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옹 수사는 내색은 안 했지만 크게 기뻐하며 소매 속으로 손을 움직였다.
투명한 남색 비도가 홀연히 나타나 그물이 상대를 구속하는 순간 베어 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물이 금 수사 머리 위에 도착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펑!
금 수사 머리 위로 영기의 빛이 발산되며 금색 기운이 물밀 듯 솟아나 그물을 막은 것이다. 금빛과 초록빛의 교전에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금 노마, 당신!”
“과연 명 노괴 답게 직접 나서셨습니다.”
각기 다른 목소리가 초록빛과 금빛에서 들려왔다. 전자는 의외라는 듯 놀라고 있었고 후자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차분했다.
허공에서 금색 거대 손과 녹색 그물이 동시에 떨어져 나와 빛이 가시고 각각 작은 소인(小人)과 비취색 작은 교룡으로 변했다. 비취 교룡은 당연히 옹 사내의 사부가 제련한 화신이었다.
그리고 키가 반 척 밖에 안 되고 금색장포를 걸친 소인은 얼굴이 흐리멍덩하게 빛나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분혼술(分魂術)! 금 노괴, 천겁을 피하기 위한 도겁분혼(度劫分魂)까지 이용하다니. 차질이 생겨 다음 번 대겁을 넘기지 못할까 두렵지도 않은가 봅니다.”
비취 교룡이 소인을 노려보며 조소했다.
“그건 명 수사께서 걱정할 것 없습니다. 천보상인이 누굽니까? 막대한 보물을 지니고 인요 양쪽에서 수만 년 넘게 위세를 떨쳤던 분입니다. 그 중 두세 가지만 얻어도 다음 겁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소인이 낮게 키득거렸다.
“어떻게 천보상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입니까!”
비취 교룡이 화들짝 놀라 일갈했다. 그동안 금 수사와 옹 수사는 우두커니 서서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제가 어찌 알았는지 아실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 일은 우리 두 사람 이외에는 알지 못하니까요. 그러지 말고 저희 둘이 힘을 합쳐 보물을 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힘을 합치자고요? 정말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있다면 알아서 찾으면 될 게 아닙니까.”
소인의 말에 비취 교룡이 냉소했다.
“제자를 통해 알게 된 소식이라 구체적인 정보는 모릅니다. 그거야 명 형에게 들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인은 유유자적이었다.
“날 위협하는 겁니까!”
“감히 그럴 리가요. 제가 합작을 제의할 때는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보물을 찾아 공평하게 나누면 서로간의 의가 상할 일도 없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게 무슨……. 헛, 누가 옵니다.”
비취 교룡이 열 받아 무어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표정이 달라져 하늘을 쳐다보았다. 금색 소인의 두 눈도 비취 교룡이 보고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땅 주인이 돌아오는 모양이군요. 수사께서는 합작을 할지 말지 빨리 결정하십시오.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 천연성의 노괴들의 눈에 띄면 허탕치고 말 것입니다. 천연성 규정에 따르면 영지에서 발견한 보물은 그 주인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금색 소인의 장난스런 말투도 진중해졌다. 비취 교룡이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좋습니다, 잠시 힘을 합치기로 하지요! 하지만 똑같이 나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구체적인 합작 조건은 장소를 옮겨 이야기 합시다. 제자의 말을 들으니 저 화신기 수사의 의식이 상당히 강력하다고 하니 이곳에 오래 머물 일이 아닙니다.”
“허허, 그 말만 기다렸습니다. 가시지요!”
금색 소인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허공을 쥐자 보라색 우산이 나타났다. 가볍게 흔드니 우산이 보라색 광채로 변해 그와 금 수사를 휘감아 사라졌다.
“자풍산(紫楓傘)! 금 노마가 저런 영보까지 꺼내다니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었구나. 우리도 그만 가자!”
비취 교룡이 보라색 우산을 보고 중얼거린 후 울적한 얼굴로 제자를 불러 다섯 색깔의 작은 깃발을 꺼냈다. 이제 저지대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함을 되찾았다.
* * *
한식경 후, 멀리서 푸른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들었고 그 안에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바로 한립이었다.
푸른 빛줄기는 저지대 상공 위를 몇 차례 돌다가 멈추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그는 조금 의아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 극히 미약하게 영기의 파동을 느꼈고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소인과 비취 교룡의 본체는 연허기 수사였지만 이곳에 나타난 이들은 그 분혼과 화신에 불과했다.
대연결을 익힌 한립은 의식이 화신기 수사들을 월등히 초월해 거의 연허 초기 수사와 맞먹었다. 그러니 아무리 민첩하게 달아났어도 그에게 들키지 않는 것은 어려웠다.
한립은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들이닥쳤으나 아무래도 한 발 늦은 듯했다. 즉시 의식을 퍼트려 백여 리 내를 살살이 수색했지만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일순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허 공에서 고민하던 한립이 피식 웃으며 갑자기 푸른 빛줄기로 변해 자신의 동부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때 벌써 만 리 밖으로 벗어난 비취 교룡과 금색 소인은 자신들의 행적이 들킨 것도 모르고 작은 산 위에서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립은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인근의 금제를 전부 발동한 후 물건을 챙겨 연기실(煉器室)로 들어갔다.
그렇게 삼일 밤낮을 두문불출하던 그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손에 은빛 찬란한 팔각형 모양의 이상한 진법 원반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물탁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콩알 크기의 옥구슬을 꺼냈다. 표면에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은색 문자가 적힌 다양한 색깔의 구슬들이었다.
선계 문자인 은과문이 적힌 구슬들은 한립이 인계에 있을 때 금궐옥서 잔본을 연구해서 그 중 하나를 응용해 창조한 특수한 법기 ‘만롱주(萬瓏珠)’였다.
제련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공격이나 방어능력은 전무했다. 그 대신 금궐옥서의 부적술을 결합했기에 구슬을 중심으로 수십 리 범위를 감시할 수 있었다.
감시 범위 내에 영기의 파동이 생기면 한립은 백만 리 밖에서도 진법 원반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그냥 구슬을 아무렇게나 묻어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법 원반은 반드시 특수한 진법 안에 설치해야 했고, 만롱주는 원반을 중심으로 복잡한 배열을 그리며 초대형의 진법을 이루어야 했다.
진법의 크기는 한립이 얼마나 많은 구슬을 묻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다. 보통 이렇게 방대한 지역을 감시하려면 진법을 유지하는데 드는 영석의 소모 또한 엄청났다.
영석이 꽤 있는 한립도 감시 진법을 쉼 없이 발동하면 몇 년 내로 가산을 탕진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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