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3화. 심한입체(心寒入體)
*
허 여인은 모두 자신만 쳐다보자 불안한 마음으로 소매를 펄럭여 하얀빛을 내뿜었다. 하얀빛은 빙글 돌아 그녀의 머리 위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비검으로 변신했다.
그녀가 수련해온 본명 법보인 빙정검이었다.
그녀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녹파인에 무슨 짓을 해놓았든 시간만 주어진다면 만년현옥을 주입해 새로 제련한 빙정검으로 얼려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해보라 하니!’
허 여인은 비검을 방출하고도 무턱대고 휘두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얼굴로 한립을 쳐다봤다. 이에 한립은 빙정검과 녹색 비도를 번갈아 살폈고 불쑥 손을 뻗어 비검을 끌어왔다.
쉬익!
허 여인의 본명 법보가 부르르 몸을 떨며 통제를 벗어나 한립의 수중에 들어갔다.
칼자루를 쥔 한립은 다른 손으로 가볍게 검신을 튕겨 봉황이 우는 것 같은 긴 울림을 방출하게 했다.
어찌나 듣기 좋은지 천상의 소리 같았다. 세모꼴 눈의 노인이 그것을 보고 움찔하다 피식 냉소했다.
수행이 그들 정도에 이르면 법보의 위력을 키우는 공법이나 비술을 펼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수사의 본명 법보의 위력을 증가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영력이나 공법이 서로 충돌해 하나로 융합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개 화신 초기 수사가 잠시 만지작거려서 비검의 위력을 얼마나 높일 수 있겠는가.
노인이 제자의 본명 법보를 강력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도 얼마 전 우연히 얻은 현묘한 영부(靈符)로 보름간 제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녹파인을 얼어붙게 만들어 봉인하려면 반드시 빙한(氷寒) 속성의 기운을 지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한립의 행동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좋은 검이군!”
한립은 노인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이어 검을 잡은 손에서 은색 화염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가 비검을 휩싸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본래 투명하던 비검이 은백색으로 바뀌고 검신의 표면에 비상하는 불새 문양이 새겨졌는데 원래 그런 모습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한립이 서령천화를 강제로 빙정검에 주입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서령천화는 다양한 영력을 잡아먹는 불가사의한 신통을 지녔고 태음진화와 태양정화가 융합되어 극한(極寒)과 극열(極熱)의 속성을 동시에 띠었기에 빙정검에 융합되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런!’
그것을 본 노인의 눈이 커진 것으로 보아 꽤나 놀란 듯했다.
쉬익.
한립이 손바닥을 움직이자 비검이 가볍게 날아갔다. 허 여인이 기쁨에 차서 서둘러 검결을 맺었고, 비검을 다시 통제한 다음 주술을 외우며 열댓 번 손가락을 튕겼다.
연달아 법결이 날아가 비검에 흡수되었고 동시에 온몸의 법력이 검에 주입되었다.
우웅!
동시에 비검이 울어대며 표면에 은색 화염이 일어나 찰나의 순간 한 장 크기의 은색 불새로 변했다. 그러자 전당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바닥에도 하얀 서리가 끼었다.
허 여인이 경탄을 금치 못할 때 불새는 이미 날개를 펄럭이며 머지않은 거리의 녹색 비검으로 쇄도했다.
한립 덕분에 빙정검의 위력이 엄청나게 강해지자 왜소한 사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수결을 맺었다.
녹색 비도가 영기의 빛을 크게 뿜었고 빙글 돌아 뿔이 달린 녹색 교룡으로 변해 흉흉히 날아갔다.
쿵!
굉음이 터졌다.
녹색 교룡과 불새의 충돌로 녹색 빛과 은색 화염이 뒤섞이는가 싶더니 불새가 입을 벌려 한 입에 녹색 교룡의 절반을 뜯어 먹었다.
“악!”
왜소한 사내는 소리를 지르며 울컥 피를 쏟았고 겁에 질려 다른 술법을 펼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불새가 펑! 하고 터져 은색 기운으로 남은 교룡을 둘러쌌다.
촤륵.
은빛이 크게 번지고 열댓 장 높이의 거대한 얼음덩이가 허공에 등장했다. 얼음에 갇힌 녹색 교룡은 애달프게 울다 흩어졌고 그 자리에는 빛이 암담해진 비도가 나타났다.
비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가느다란 빛이 얼음 속에서 소리 없이 파고들었고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본명법보와 스무 장은 떨어져 있던 왜소한 사내가 그의 비도가 얼음 속에 봉인되자 뻣뻣한 시체처럼 쓰러져 의식을 잃은 것이다.
서령천화가 어떤 역천의 신통을 지녔는가!
연허기 수사들도 불의의 습격에 허를 찔렸던 기운인데, 겨우 원영기 수사의 법보가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허 여인이 그것을 보고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은색 기운이 응결해 다시 비검으로 바뀌었고 즉시 그녀 쪽으로 날아왔다.
도중에 은색 화염이 검신을 떠나 번뜩하고 사라졌다가 다음 순간 한립의 몸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와 동시에 황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신형을 움직였다.
제자 곁에서 나타난 그는 왜소한 제자의 몸이 온통 우윳빛 서리로 덮여있고 얼어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는 것을 보았다.
“한기가 몸과 마음에 스몄구나!”
황포는 놀라 소리쳤지만 그도 화신기 수사였다. 그는 곧바로 허공을 향해 소매를 털었고 붉은 빛이 가만히 떠있는 얼음덩어리를 휘감았다.
쿵!
열기를 머금은 기운이 폭발하며 얼음을 뒤덮었다.
전당의 기온이 급격히 올라갔고 거대한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 녹색 비도가 자유를 되찾고 쓰러진 왜소한 사내의 몸속으로 되돌아갔다.
한립은 서령천화의 진정한 위력을 숨기기 위해 비도의 위세를 꺾은 다음에는 빙정검 본연의 힘만으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령천화로 얼린 물체를 이렇게 쉽게 녹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약간의 실력을 노출해 상대가 스스로 물러나게 판을 깔아주었다.
그는 서령천화의 극한의 기운을 비도에 주입해 의식이 연계된 왜소한 사내의 몸에 침투하게 만들었다.
의식을 통해 몸에 한기가 침투하게 만드는 심한입체(心寒入體)의 신통은 그도 얼마 전에서야 서령천화를 통해 알게 된 괴이한 능력이었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니 영계의 전설적인 극한의 기운만이 보유한 능력이라고 했다. 역시 따로 손을 쓴 효과가 있었다.
이제 노인에게 한립은 실력을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인물로 인식 되었을 것이다.
노인은 서둘러 품에서 붉은 환단을 꺼내 제자의 입에 넣어주었고 차차 혈색을 찾는 것을 확인하고서 길게 숨을 토해냈다. 한립을 쳐다본 노인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 형의 놀라운 신통에 스스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자의 혼인 건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요. 그럼 이만!”
생각을 정리한 황포는 억지로 미소를 머금고 포권을 했다. 그리고 제자를 들고는 바로 전당을 떠났다.
한립은 담담히 포권을 하고는 노인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일순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허 여인이 다가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냉랭히 물었다.
“저 자의 배경은 어떠하지?”
허 여인이 멍해져서 한립이 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곁에 있던 벽안 거한이 금방 말귀를 알아듣고 서둘러 대답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황포 선배님과 그 제자는 모두 류사곡(流沙谷)이라는 작은 종문 출신으로 상고 거대 종문과는 연이 없습니다. 그 분이 류사곡에서 가장 수행이 높은 장로시고요.”
“그렇다면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허 선자, 임무 기간 외에 자네를 돕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세. 다시 한 번 분란을 일으킨다면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지?”
한립이 허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아들었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 번에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허 여인은 공손히 감사를 표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대문을 나섰다.
“그 은색 화염이 어떤 것이기에 심한입체의 신통을 부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듣기로 전설 속의 한염들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한 선배님께서 허 선자를 꽤나 챙겨주시는 것 같던데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이겠지요? 혹시 한염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벽안거한은 한립이 멀리 간 후에야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한 선배님은 저희 집안 조상님과 인연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저런 종류의 한염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당시 합체 후의 만수인을 집어삼킬 때도 보통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탁 형, 한 선배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캐묻고 다니는 것을 그리 좋아하시지 않는 듯합니다. 이런 의문은 앞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안 그랬다가는 괜히…….”
“…….”
허 선자가 작게 탄식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벽안의 거한도 안색이 달라져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때 한립은 천연성 시장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미리 알아둔 정보에 의하면 경매는 정오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지금 바로 가면 딱 맞게 갈 수 있을 것이다.
* * *
한립이 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비술을 이용해 이번에는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지닌 거한으로 변장하고 태현전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영석을 내고 차광패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들 화신기 이상의 수사였다. 심지어 그가 지켜보는 와중에도 연허기 수사가 셋이나 안으로 들어갔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앞으로 나아가 영석이 가득 찬 주머니를 건넸다. 호위병은 의식으로 주머니와 한립을 훑고 고개를 끄덕이며 옥패를 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 왼쪽입니다.”
그 말에 한립의 얼굴에 의혹이 번졌지만 그대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를 빠져나가자 놀랍게도 안쪽으로 곧게 이어지는 길 대신 구불구불한 길이 나왔고 중간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어두운 장소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어제의 태현전과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버린 듯했다. 보아하니 건물 내부의 금제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호위병이 미리 언질을 주었기에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잠시 후 그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한 식경 후, 한립은 독립된 어두운 석실 안에 있었다. 그곳은 한 장 크기로 세 면이 벽으로 막히고 한 면이 트여 있었는데, 옥으로 만든 탁자, 대나무 의자 그리고 탁자 위의 붉은 진법 원반이 전부였다.
이런 석실들이 백 장 높이의 허공에 듬성듬성 분포해 있었다. 뜻밖에도 전부 하늘을 나는 석실들이었다. 거대한 대청은 천 장은 될 법하게 넓어서 거의 천 개에 달하는 석실들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석실 표면에서 희미하게 푸른 주술문자들이 반짝였고 일정 거리마다 푸른 천등(天燈)이 걸려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경매소 주인은 수사들이 정체를 드러내기를 꺼린다는 점을 파악하고 은밀하게 거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듯했다.
한립이 기다리는 동안에도 수백여 명의 수사들이 대청 안으로 유입되었다. 수많은 석실들이 거의 들어찼다.
‘아!’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한립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최소 화신기 이상의 수사였으니 겨우 이 작은 경매소에 화신기 이상의 수사들이 천 명은 모인 셈이었다.
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계에서도 천연성이라 가능한 일이었지 삼경에서는 3대 주성을 제외하면 이렇게 많은 고계 수사들은 볼 수 없었다.
댕!
갑자기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열려 있던 대청의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닫혔다. 덕분에 안 그래도 어두웠던 대청이 더욱 깜깜해졌다.
곧 경매대 위로 몇 개의 머리통 만한 월광석이 떠올라 은근한 빛을 발산하며 시야를 밝혔다. 모두의 이목이 순식간에 경매대로 집중되었다.
열댓 장 너비의 경매대 위로 진법이 나타났고 하얀빛과 함께 하얀 장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 석실 속의 수사들이 들썩였다.
“적 대사!”
“어째서 이곳에……. 설마 이번 경매를.”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갑작스런 소란에 한립도 흥미가 일어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은백색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은 화신 중기 수사였고 인자해 보이는 얼굴과 형형한 눈빛이 신선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다른 이들이 그를 ‘대사(大師)’라고 칭하는 것으로 보아 연단 혹은 진법 등 복잡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인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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