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화. 진섬액과 옥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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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가 어린 눈빛으로 만년현옥 덩어리들을 살피던 허 선자가 다시 깊이 예를 올렸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젓고 다시 눈을 감았다.
허천정, 한수, 극염 등의 보물들은 전부 빙백선자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 덕을 톡톡히 보았으니 그녀의 후인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도 이후 심마(心魔)에 빠졌을 때 훨씬 마음을 편하게 해줄 것이다.
갑자기 큰 보물을 얻은 허 선자는 눈치 있게 한립을 방해하지 않고 물러났다. 멀리서 벽안 거한 등의 대원들이 한립과 여인의 행동을 몰래 주시하고 있었다.
한립이 옥함을 건네자 평소 냉랭한 성품이었던 여인이 희색이 만연해 허리를 숙였으니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녀에게 다가가 뭐냐고 질문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한립의 명에 따라 순찰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그 후로는 다른 이종족을 만나지 않았고 정해진 경로를 다 돌자 그들을 데려갈 금정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대원들은 두 번에 걸쳐 선박을 타고 천연성으로 돌아왔다.
한립의 부대는 이종족을 마주친 데다 만수인이 길들여 놓은 만황 짐승을 포획했기에 후한 보상을 받았다. 규정에 따르면 순찰을 한 번 돌고 오면 반년의 휴식이 주어졌다.
그렇게 교대로 순찰을 한 지 십 년이 지나야 순찰구역을 바꿀 수 있었다. 한립은 첫 번째 순찰을 마치고 하계의 기운을 씻어내는 ‘멸진단’을 받아 복용했다.
이후 소대의 대원들은 그에게 인사를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허 수사가 한립에게 인사를 하다 그의 관심을 끌만한 소식을 전했다.
“선배님, 이틀 후면 본 성의 경매소에서 3년에 한 번 열리는 만황 물품 경매회가 있습니다. 가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만황 물품? 허 수사도 관심이 있는가?”
“아닙니다, 이런 경매는 최소한 선배님처럼 화신기 수사는 되어야 참가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원영기 수사는 경매에 참가할 자격조차 없지요. 게다가 만황물품은 굉장히 고액에 거래되는 터라 그럴 만한 여력도 되지 않고요. 선배님께서 가보시면 좋을 것 같아 말씀 드린 것입니다.”
허 수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 했다.
“알려주어 고맙네. 기회가 된다면 가서 견문을 넓히도록 하지.”
한립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떠나가는 허 선자를 보며 눈이 가늘어졌다.
영계에 온 후로는 적당한 단약 제조법과 영약을 구입할 기회가 없어 순찰을 마치는 대로 적당한 곳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만황 물품이 거래되는 경매라니 구미가 당겼다.
한립은 천천히 청석 거탑을 떠나 시장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천연성의 시장은 규모가 거대했고 삼경과 칠요지의 진귀한 재료들이 모여들어 없는 것이 없었다.
거기다 틈틈이 만황 물품이 유입되니 북적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천연성 현지 호위병들은 물론 외부에서 유입되는 손님들까지 하루 종일 드나드는 사람들이 끝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족과 요족의 구역을 나누는 경계에 거대한 전당이 세워져 있어 인간과 요족도 그곳에서 자유롭게 재료나 만황 물품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게는 불필요한 물건이 다른 쪽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경우도 빈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매소는 이 전당 건물의 편전에 위치했다.
한립은 시장의 어느 골목에 내려 인근 상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선배님,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저희 가게가 규모는 작아도 영약이라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약방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고 결단기 수행의 중년 장궤와 축기기 점원이 서 있었다. 그들은 청명위 복장을 한 한립의 등장에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섰다.
“화신기 수사의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단약방이나 영약이 있느냐?”
“화신기 선배님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약방이 두 종류 있습니다. 필요한 재료가 워낙 진귀해 저희가 전부 들여놓지는 못했지만요.”
“오, 그럼 어디 보여 보거라.”
한립은 차분히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예,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요.”
장궤가 공손히 답했다.
그는 점원을 시켜 한립에게 앉을 자리를 내주고 차를 대접하게 한 후 재빨리 건물 뒤로 향했다.
고풍스런 대나무 의자에 앉아 점원이 내온 영차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유유자적 그 자체였다.
잠시 후, 중년 장궤가 안에서 나와 두 손으로 저물탁을 바치곤 공손히 섰다.
한립이 손을 들어 저물탁을 스치자 하얀색과 남색 옥간이 나왔고, 곧이어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옥함과 작은 병들이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였다.
한립은 먼저 두 개의 옥간을 빨아들여 의식을 불어넣었다.
“진섬액(眞蟾液)과 옥청단(玉淸丹).”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의식을 회수했다. 필요한 재료들이 듣기만 해도 진귀한 영초에 대부분이 2, 3 천년은 되어야 했다.
진섬액은 벽안진섬(碧眼眞蟾)이라 불리는 만황세계 상고짐승의 피가 가장 중요한 재료였다. 다행인 것은 그것을 제외한 보조 재료들은 무난하다는 것 정도?
둘 다 화신기 수사가 쓸 수 있는 영약이지만 옥청단은 화신 초기 수사에게 쓰이는 것이라 중기만 되어도 효과가 급감했다.
그리고 진섬액은 약성이 너무 강해 화신 후기 수사에게 적당했고 중기 수사가 복용하면 패도적인 기운 때문에 위험할 수 있었다.
한립이 눈을 감고 두 가지 영약의 효과, 제련법, 성분 등을 곰곰이 정리한 다음 비단함과 병에 든 재료들을 확인했다.
장궤의 말대로 두 가지 영약 모두 절반 넘게 필요한 재료가 비었다. 벽안진섬의 피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나머지 재료들이야 다른 약방에 가면 구할 수 있겠지만, 벽안진섬은 만황고수(蠻荒古獸)이니 찾기 쉽지 않겠지?”
“선배님께 아룁니다. 옥청단은 꼭 이곳에 적힌 대로가 아니어도 덜 자란 영초로 대체해서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약효는 떨어지겠지만 영석을 주고 구입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진섬액에 필요한 벽안진섬의 피는 원체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끔 시장에 나오지만 눈에 띄는 대로 다들 사가니까요. 규모가 큰 약방에서도 가장 빨리 팔리는 재료 중 하나이니 시장에서 구입하려 하신다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허나 곧 경매회가 열리니 그곳에서 운이 따르기를 기대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그럼 이것들은 전부 구입하지.”
장궤가 솔직히 답하자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계산을 좀 하겠습니다. 약방 두 장에 영석 10만, 천년 금지(金芝) 3개에 영석…….”
장궤가 될 듯이 기뻐하며 탁자에 올린 물건의 가격을 일일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일다경이 지나 그곳을 나선 한립은 멀리 가지 않고 다른 약방으로 향했다. 이렇게 인근에서 약방과 영약을 취급하는 가게는 거의 다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다른 곳에도 일고여덟 종류의 약방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벽안진섬의 피와 같은 찾기 어려운 재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단약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재료라면 무엇이든 거침없이 사들였는데 진귀한 영초가 아니라 씨앗이나 묘목을 위주로 사들였다. 그렇게 큰 출혈을 감수하고 나서야 필요한 수량을 맞출 수 있었다.
이제 다른 건 몰라도 옥청단은 거처로 돌아가 신비한 액체로 재료들을 숙성만 시키면 바로 영단을 만들 수 있었다.
화신기 수사에게 효과가 있는 단약을 제련하는 일은 쉽지 않아 연단술에 능한 그라도 여러 번의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허나 신비한 병이 손에 있으니 재료 걱정 없이 연습할 수 있겠지!’
진섬액도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이번 경매회에 참가해 필요한 재료를 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중의 영석을 꽤 써버려서 몇 가지 물건을 처분해 경매 전에 보충해야 했다. 영계는 특히 영석의 수량이 풍부해 물건 가격이 인계의 몇 배를 초월했다.
물론 인계에서는 아무리 영석이 많아도 화신기 수사에게 필요한 약방이나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거리를 지나 아무도 없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체형과 외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자줏빛 얼굴의 거한으로 변신한 한립은 성큼성큼 거리로 나와 회생당(回生堂)이라고 적힌 가게로 들어갔다.
영계의 시장에서는 천년 영초들이 인계만큼 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7, 8천 년 된 영초들을 내놓자 회생당에서도 주저 없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영석을 꺼내 주었다.
한립은 영석을 챙기자마자 누군가 따라붙을까 신속히 그곳을 떠났다. 그는 시장의 다른 거리를 돌며 거래되는 법기, 보물 그리고 다양한 연기 재료 및 부적 등을 구경했다.
정말 별세계가 따로 없었다.
영계는 진귀한 재료가 풍족해서인지 법기와 법보 등의 품질이나 위력이 인계의 보물을 초월했고 심지어 큰 상점에서는 영보 모조품 급의 이보(異寶)도 심심치 않게 판매했다.
부적들도 어찌나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은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런 부적 중에는 은과문으로 작성된 것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보조형이나 방어형 부적이라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흠.’
그중에서도 희미하게 사람의 모습이 새겨진 부적이 한립의 흥미를 끌었다.
가게 주인에게 들으니 그것은 천령경에서 온 물건으로 괴뢰부(傀儡符)라 불리는 은과문 부적이었다.
괴뢰부는 부적에 봉인된 그림자 꼭두각시를 소환할 수 있었다.
꼭두각시의 능력이나 위력은 전적으로 부적을 제련하는 실력과 부적을 조종하는 수사의 수행에 따라 달라져서, 완벽한 괴뢰부라면 주인의 공법과 수행을 그대로 모방할 수도 있다고 했다.
구경을 마친 한립은 속으로 금궐옥서의 잔본을 떠올렸다.
은과문 부적의 놀라운 가격을 보니 돌아가는 대로 그곳에 기록된 괴뢰부 제련법의 원리를 제대로 깨우쳐 봐야겠다는 의욕이 생긴 것이다.
생각난 김에 한립은 즉시 부적 상점을 찾아 은과문 부적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넉넉히 구입했다.
일을 마친 그는 그제야 이번 일정의 목적지인 인족과 요족 구역 중간에 위치한 태현전(太玄殿)이란 거대 석전으로 향했다.
경매는 이틀 후에 시작이었지만 요족 시장에 쓸 만한 물건이 없나 미리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요족은 인족의 경매에 참가하지 하지 않고 태현전 근처에서 필요한 물건만 거래했기 때문이다.
안에서 요족과 인족이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래를 하고 싶은 인족 수사들은 태현전으로 들어가 반드시 손바닥만한 옥패를 수령해야 했다.
옥패를 지니면 하얀 기운이 온몸을 둘러싸 가렸고 잠시 수행이 억제됐다.
또한 태현전 자체에 설치된 금제의 보조로 경거망동하며 법력을 쓰려는 수사를 석전 밖으로 전송시켜 버리기도 했다. 그런 자들은 일정기간 동안 다시 그곳을 들어갈 수 없었다.
요족들은 검은 깃발을 수령했고 그것이 변한 요기의 구름으로 용모를 숨겼다.
그밖에도 전각 안에는 인족과 요족 반반으로 이루어진 연허기 금갑 수사 넷과 화신기 청갑 수사 열 명이 머물며 그곳을 관리했다. 이렇게 강대한 전력을 배치해 웬만한 일에는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한립도 전각 밖에서 많은 영석을 주고 호위병들에게 옥패를 받아 허리에 찬 후에야 긴 통로를 지나 둥근 대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족히 수백 장은 될 법한 거대한 대청이 있었고, 반대편에 그가 들어온 문과 똑같은 문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백여 명의 하얀 기운과 검은 기운에 휩싸인 인족과 요족들이 듬성듬성 분산되어 돌아다녔다. 살펴보니 그래도 하얀 기운에 휩싸인 인족들이 많은 편이었다.
서른 댓 명 가량은 대청 양쪽에 몇 가지 물건을 깔아놓고 묵묵히 가부좌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서서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수사들은 물건을 살피다 마음에 들면 소리 없이 전음으로 주인과 대화를 했고, 일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하다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쑥덕거리기도 했다.
‘일단은 저리로.’
한립은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살피다 가까운 노점으로 걸어갔다. 노점 주인은 하얀 기운에 휩싸인 인족 수사 같았고, 그의 앞에는 두 가지 이상한 물건이 놓여있었다.
은은한 녹색의 식물 가지와 주먹 크기의 핏빛으로 반짝이는 수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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