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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78화 (535/2,000)

778화. 거대한 괴수와 괴인

*

그렇게 시간은 흘러 다음날이 되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뜨고 대청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수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예를 올리는 그들에게 손을 휘젓고 시선을 낯선 여인에게 돌렸다.

여인은 스물 몇 살 정도로 어려 보였고 옥처럼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에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한립은 문득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한 선배님, 이쪽이 허 선자입니다. 아, 허 선자 역시 비승수사의 직계 후예이지요.”

마 수사가 웃음을 머금고 소개했다.

‘비승수사의 후예!’

한립은 관심이 갔지만 겉으로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인도 그저 인사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 모였으면 출발하세.”

주저 없이 명을 내린 한립이 석전을 나서 인근의 전송석전으로 향했다.

그곳은 다른 부대 수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황금 선박과 금정주(金庭舟) 한 대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근거리를 이동할 거라 이런 영기(靈器)는 필요하지 않았다.

한립은 신분 영패를 내주고 부대원들과 기다리다, 서너 명씩 무리를 이루어 전송진 위에 섰다. 그러자 하얀 빛 속에서 11명의 수사들은 천연성에서 아주 낯선 곳으로 전송되었다.

파앗.

한립은 벽안 거한 등과 전송진 위에 나타났다. 잠시 가벼운 현기증에 주춤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훑었다.

이곳은 한 눈에 보기에도 규모가 크지 않은 석실로 발밑의 전송진은 단방향 전송진법이었다. 그리고 사방의 벽에는 각양각색의 주술 문자가 반짝이며 금제로 둘러싸여 있었다.

미리 도착한 부대원들이 전송진을 둘러싸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전송진을 걸어 나오며 한립은 석실 문으로 가 푸른 옥패를 비추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뻗어 나가 석실 문의 주술 문자들을 빛나게 했고 문이 열리며 작은 통로가 나타났다.

한립이 말없이 먼저 푸른빛으로 변해 그곳을 빠져나가자, 나머지 수하들도 즉시 둔술을 펼쳐 그를 따랐다. 마지막 수사가 석실을 떠나자 석문이 반짝이며 서서히 닫혔다.

그때 한립은 벌써 통로를 나서 작은 산 위에 서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앞쪽은 황량한 구릉 지대였고, 뒤쪽은 백 리 밖에 거대한 성벽이 있었다. 성벽을 빼곡하게 메운 주술문자들 때문에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엄청난 영기의 빛이 보였다.

한립은 한참 성벽을 지켜보며 이채를 띄었다.

그가 알기로 천연성과 만황세계가 맞닿은 거대한 성벽에는 성문이랄 것이 없었다. 인족이든 요족이든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 안의 전송진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립이 순찰을 돌 구역은 그쪽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시야 가득 크고 작은 언덕과 녹음이 푸르른 곳이 나타났다.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에 만황세계에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지도에 따르며 소위 부려습지란 곳은 이곳에서 만 리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지형이 특수하고 의식이 제한되는 곳이라 이종족들이 잠복해 천연성의 동정을 감시하곤 했다.

그러니 천연성 쪽에서도 어쩔 수 없이 수사들을 파견해 빈번히 이곳을 순찰 도는 것이다. 하지만 천연성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이 종족들은 각각이 신통이 뛰어나고 은닉술이 능했기에 자주 사상자가 나왔다.

그래서 천연성은 다른 몇몇 구역과 같이 이곳을 1급 위험 구역으로 정했고 수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한립의 부대는 이곳에서 몇 년을 보내야 했으니 앞으로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게 틀림없었다. 그는 묵묵히 이런 생각을 하며 뒤따르는 수사들을 훑었다.

“출발!”

십여 개의 빛줄기가 하늘을 갈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멀리서 여정의 목적지를 볼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녹색 선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워질수록 녹색 선이 대량의 안개가 산맥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둔광을 멈추고 그가 한 손을 뒤집자 특수한 법반(法盤)이 나타났다. 한립의 손짓에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진법 원반은 붉은 빛을 뿜었다.

다른 수사들도 똑같이 생긴 법반을 꺼내 술법을 펼쳤다. 이 물건의 이름은 이령반으로 천연성이 매년 순찰을 도는 호위병들을 위해 만든 법기였다. 이것으로 일정 거리 내의 이종족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단점은 이종족이 위치한 방향만 알려준다는 것과 특수한 신통을 지닌 이종족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되었다.

한립과 부대원들은 법기를 꺼내 놓은 채 천천히 짙은 안개 속으로 진입했다.

…….

안개 속으로 들어간 한립 일행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백 장 밖을 벗어나지 못했고, 미무(迷霧)가 환영을 일으켜 마음을 어지럽혔다. 부려습지는 정말 괴이한 곳이었다.

그러나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질퍽한 진흙 아래에 사는 규충이라는 기이한 곤충이었다. 지네처럼 마디마디가 나뉘어져 있었고 몸에 수많은 가늘고 긴 입이 달려서 독무를 뿜어댔다.

이 독무에 당하면 법보는 부식되었고 수사의 호신 영광(靈光) 역시 뚫리곤 했다. 한두 마리면 별 것 아니겠으나 무리를 지어 서식하는 곤충이라 수십 마리가 떼로 움직였고 저공비행 능력까지 지녔다.

곤충 떼가 진흙 위로 솟아오를 때마다 대원들은 한동안 허둥거려야했다. 순찰 임무로 나온 것만 아니었어도 하늘 높이 날아올라 습지를 휙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야 이종족의 흔적을 어찌 찾겠는가!

심지어 한 번은 그들이 초대형 무리를 건드렸는지 높지 아래에서 3, 4 백 마리가 솟아 오른 일도 있었다.

한립이 원자신광을 펼쳐 곤충들을 허공에 붙들고 화염으로 깨끗이 불살라 버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부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이를 통해 그를 믿지 못하던 몇몇 수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물론 습지의 위험은 규충 말고도 허다했다. 은두수(銀頭獸)라는 고대 짐승은 습지의 울창한 밀림 속에 숨어 있다 달려들고 몸을 분열할 수 있는 신통을 지녀 상대하기 성가셨다. 행동이 느리고 자기 구역이 확실해서 그곳만 벗어나면 더는 쫓지 않아 다행이었다.

부려습지로 진입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이 왜 1급 위험 구역으로 분류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립 일행은 항상 주위를 경계하며 혹시 모를 위기에 대비했다.

*     *     *

한립의 부대가 습지로 들어선 지 20일이 지났다.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지만 이종족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마 수사 등 몇몇은 내심 한숨을 돌렸고, 긴장감이 가득하던 부대의 분위기도 부지불식간에 풀어졌다.

오늘도 부대원들은 이령반을 들고 하루 종일 습지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고계 수사였지만 시시각각 주위를 경계하며 순찰을 도는 일은 심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로감을 느꼈다.

그때 전방에 백여 장 크기의 맑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주변의 자갈들 위로 비취색의 푸른 대나무가 곧게 서 있었고 청량한 바람에 댓잎이 흔들리는 모습이 운치 있었다.

대원들의 눈이 맑아졌다. 벽안 거한은 다른 대원들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속도를 높여 한립에게 다가갔다.

“한 선배님,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지. 다만 경계를 늦추지 말고 이상이 없는지 일단 확인하게.”

공손한 물음에 한립이 반대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오는 동안 한립은 거의 명을 내리지 않았고 대원들의 의견을 대부분 들어 주었다.

그래서 다른 수사들도 한립과의 동행에 익숙해진 참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벽안 거한이 미소를 머금고 뒤쪽의 수사들에게 손짓했다.

노인 두 명과 부부 수사가 도처로 흩어져 주변을 살폈다. 그들의 이령반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곧 일행 전부가 안심하고 자갈 위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기에 각자 흩어져 깨끗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하고 소모한 심력을 회복하려 명상에 들어갔다.

한립은 대연결을 수련한 화신기 수사로 그들처럼 순찰이 고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달리 호수 주변을 거닐며 풍경을 살폈다.

호수는 물이 그다지 깊지 않았지만 맑아서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손가락 굵기의 가는 은색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을 쳤다.

‘흠…….’

그것을 본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주위를 살피다 십여 그루의 비취색 대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고요했다.

열 명의 대원들과 푸른 대나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움직임이 없었다.

한립이 시선을 돌려 호수 표면을 힐끗 보고는 침음했고 순간 그의 동공이 수축했다가 평소대로 돌아 왔다. 그가 몸을 돌려 대나무 쪽으로 걸음을 뗐다.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 소매 속의 손가락을 튕겼고, 붉은 빛을 반짝이는 실 줄기가 소리 없이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흔적이 남지 않았다.

유유히 대나무에 이른 한립은 그 중 한 나무에 서서 차분한 눈길을 보냈다. 그의 행동에 그 주변에 앉은 영 씨 소년과 허 씨 여인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입에서 금빛을 분출해 번개처럼 대나무를 베었다.

스걱.

사발 굵기의 청죽이 허리춤에서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헛!”

그 순간 영 씨 소년과 허 선자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반절 밖에 남지 않은 대나무의 절단면에서 어두운 녹색 액체가 비린내를 풍기며 몇 자 높이로 솟아오른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거의 동시에 땅이 흔들리고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땅 속을 울려댔다는 것이다.

나머지 대나무들이 부들부들 몸을 떨고 거대한 문어발처럼 굽어져 한립을 덮쳐왔다.

그 순간 한립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호수 위에 나타나 냉랭한 시선으로 미친 듯이 날뛰는 초록색 촉수들을 내려 보았다.

주변에 흩어져 정좌를 하고 있던 대원들도 깜짝 놀라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성질 급한 몇몇은 비검이나 비도를 날리기도 했다.

채챙!

그러나 촉수를 향해 날아간 비검과 비도들은 쇳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벽안 거한 등이 놀라 다른 법보로 공격하려하자 호숫가의 회백색 자갈들이 새까맣게 변했고 하나하나가 머리통만한 어두운 보라색의 비늘조각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놀랍게도 거대한 짐승의 몸통이었다. 짐승은 둥그런 형태로 코나 입을 찾을 수 없었고 등에 십여 개의 기다란 촉수를 지니고 있었다.

호수에 바짝 붙어 엎드려 있어 자갈밭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짐승은 무슨 신통을 지녔는지 수사들의 의식을 그곳으로 이끌리도록 만들었다.

“공격!”

호수 위의 한립이 짧고 분명하게 명했다.

벽안 거한 등은 정신을 차리고 분분히 다른 보물들을 꺼내 각양각색의 영기의 기운을 흩날리며 거대 짐승을 향해 날렸다.

상고 짐승은 전혀 달아날 기미가 없는 듯 등 쪽의 촉수들을 마구 휘둘러 녹색 그림자를 형성해 몸을 보호했다.

콰콰쾅!

녹색 그림자와 보물들이 충돌해 폭음이 터져 나왔지만 강한 촉수가 수사들의 공격을 모두 다 막아냈다.

그것을 본 영 씨 소년이 두 손을 합장했다가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붉은 색과 노란색이 섞인 기이한 빛이 분출되어 주먹 크기의 뇌화(雷火)로 변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몸이 은빛 한광으로 빛난 허 선자는 수많은 얼음 속성의 뇌광(雷光)을 뿜었다. 두 종류의 뇌화가 섞여 대단한 기세를 드러냈고 사방이 천둥소리에 파묻혔다.

다른 수사들이 그것을 보고 희색을 띠었다. 그러나 한립은 나서지 않고 무표정하게 수하들의 공격을 지켜보고 있었다.

“흥!”

누군가의 냉소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어 괴이한 바람이 아래에서 불어오더니 점점 하늘로 솟구치는 돌풍으로 변해 쏟아져 내리는 뇌화들을 휘몰아쳤다.

콰콰쾅!

굉음이 지나가자 돌풍과 뇌화도 함께 사라졌다. 영 씨 소년과 허 선자는 동시에 안색이 달라졌고 지켜보던 벽안 거한도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때 아래쪽에서 거대한 짐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번에는 그 위에 괴인(怪人)이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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