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화. 부려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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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을 한 것이냐? 아니면 술법으로 변화한 것이냐?”
한립은 참지 못하고 궁금한 것을 제일 먼저 물어보았다. 그런데 검은 장포 한립은 무어라 말해야 할 지 모르는 듯 입만 뻐금거렸다.
그러나 곧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혼이 비록 지능이 생겼다고 해도 바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립이 자신의 뒤통수를 스치자 검은빛이 나타나며 한 촌 크기의 원영으로 변했다. 그의 두 번째 원영이었다.
법력을 회복하자마자 두 번째 원영도 다시 응결해 되돌렸다. 아직 원영 초기의 수행을 지녀 전투에서는 무용지물이었지만 꼭두각시에 깃들여 쓸 정도는 되었다.
원영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검은 장포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검은 장포의 한립은 온몸이 검은빛으로 반짝였고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립은 두 번째 원영을 조종해 언어와 공법 등 필요한 사항을 천천히 제혼의 의식에 주입했다. 두 번째 원영을 지니고 있는데다 제혼 자체도 그의 통제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장 한식경이 지나자 검은 장포 한립의 멍하던 눈빛이 또렷해졌다. 한립이 수결을 풀고 손짓했다.
그러자 두 번째 원영이 제혼의 몸에서 빠져나왔는데 빛이 어두워진 것이 원기를 크게 상한 느낌이었다. 원영은 순식간에 한립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대답할 수 있겠지?”
한립이 차분히 다시 묻자 눈을 깜빡이며 제혼이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주인님의 모습을 모방하여 인간의 몸으로 화형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변화술도 할 수 있습니다.”
처음보다 아는 것은 훨씬 많아졌지만 아직은 머리를 굴리거나 거짓말은 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한립이 길러온 덕에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지능을 갖추자 거부감 없이 아주 공손해졌다.
요수가 진화하자마자 한립의 모습을 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명혼주를 통해 의식이 연계되어 있었기에 제혼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명혼주를 검은 연기로 변화해 다시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변화술이라, 한 번 보여 주겠느냐?”
일단 제혼의 신통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한립의 말에 제혼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갑자기 울부짖으며 검은 장포가 찢어지고 온몸에서 기다란 털이 자라나고 몸이 두 장 가까이 불어나 거대 원숭이로 변했다.
그러나 한립은 말없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이건 변화술이 아니라 그냥 제혼 본체로 돌아간 거잖아!’
그가 내심 실망하고 있을 때 거대 원숭이가 콧김을 흥! 뿜으니 사방에서 바람이 일며 검은 뇌전이 번뜩였다.
그리고 거대 원숭이의 몸이 다시 부풀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털은 붉게 변하고 정수리에서 세 개의 굽은 뿔이 천천히 솟아났다.
미간 사이가 불룩 튀어 올라 갈라지며 핏빛 요수의 눈이 떠졌고 송곳니가 길어져 흉악해졌다. 놀랍게도 제혼의 등에 그려진 악귀처럼 변한 것이다.
키가 예닐곱 장까지 자라 석실이 가득 찼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혼의 등에 검은 뼈로 된 돌기가 세 개나 가시처럼 솟았다는 것이다.
새까만 돌기는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여 음산한 기운이 대단했다. 악귀 도안에 저런 것은 없었는데 그저 일전에 잡아먹은 귀왕의 두 손이 저런 식으로 바뀌곤 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여러 생각에 빠져 있는 중에 악귀가 된 제혼의 몸이 다시 흐릿해지며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작은 아기 원숭이로 작아져 펄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검은 누에고치로 달려가 다짜고짜 그것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우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누에고치를 전부 먹어 치운 아기 원숭이가 즐겁게 재잘거리다 한립의 어깨로 뛰어올랐다.
허물없고 정다운 태도였다. 한립은 제혼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다시 영수환으로 들어가게 했다.
일을 마친 그는 밀실을 나와 서금충 떼를 보러 갔다. 이제 서금충의 몸은 반 자는 될 법하게 거대해졌고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녹색 병을 꺼내 손끝으로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신비한 병은 영계에 와서 그 효력이 더욱 커졌다.
원래 7일이 지나야 녹색 액체 한 방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영계에 와서는 3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한 밤중에 액체를 형성하는 현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달빛을 흡수하며 보였던 기이한 현상들이 지금은 희미하게 하얀빛이 한층 감싸는 것으로 변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저계 법기로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영계의 일곱 개의 달이 뜨는 것과 인계를 월등히 초월하는 영기의 농도가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영약을 숙성시키는 기간이 훨씬 짧아질 테고 신비한 병을 더욱 은밀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동부 밖에서도 조심만 하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한립이 작은 병을 챙겨 넣고 서금충과 표린수까지 영수환에 넣고는 거처를 떠났다. 누군가 자신의 영지를 눈독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중요한 것을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푸른 빛줄기가 오색찬란한 독무를 뚫고 천연성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푸른 빛줄기는 곧 수십 장 높이의 성벽을 스쳐 전송진이 있던 푸른 거탑 앞에 도착했다.
거탑을 드나드는 수사들이 많지 않아 한립은 그들과 함께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조무귀의 말에 따르면 일단 천갑전(天甲殿)이란 곳에서 청명갑 한 벌을 수령해야 했다.
이 전투용 갑옷의 위력은 옹 수사 덕분에 직접 경험해 보았기에 받는 즉시 몸에 걸치고 병(丙) 56 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위쪽 통로를 직진해 일고여덟 층을 올라가서야 평범하게 생긴 전각 문 앞에 멈춰 섰다. 그 위에 고대 문자로 ‘병 56(丙 五十六)’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립이 하얀 금제 영기가 반짝이는 문을 향해 손을 뒤집자 푸른 옥패가 나타났다. 옥패가 푸른빛을 뿜자 문의 하얀빛이 바로 사라졌다.
한립은 가볍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의자와 탁자들이 놓인 대청이 있었고, 양옆으로 난 통로는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는 듯했다.
대청 안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수사 두 명이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립이 들어오자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한립도 그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중 하나는 비령전으로 그를 데려다준 푸른 눈을 지닌 탁 씨 거한이었다. 그들은 한립의 얼굴을 확인하고 서둘러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한 선배님 오셨습니까. 혹시 본 대(隊)의 신임 대장이신지요?”
“그래, 내가 56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네. 앞으로 협조 부탁하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손에 든 옥패를 던져주었다. 벽안의 거안은 움찔하며 옥패를 받아 자세히 살폈고 다시 두 손으로 돌려주었다.
“56대 탁충, 대장님을 뵙습니다.”
“동곽봉, 대장님을 뵙습니다.”
수척해 보이는 사내도 한립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예를 올렸다. 한립이 손을 저으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자네들뿐인가?”
“선배님께 아룁니다. 마 수사와 허 선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나머지 수사들은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상부에서 다음 순찰 구역을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사들을 전부 모이라 할까요?”
벽안 거한이 말했다.
“됐다. 그럼 나도 같이 기다리지. 천연성에 막 도착해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으니 그동안 자네가 본 대의 상황을 설명해 주면 되겠군.”
“선배님의 명이신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한립의 말에 벽안 거한이 호쾌하게 답하고는 소대의 구성원에 대한 소개와 56대가 주로 수행하는 순찰 임무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한립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금빛이 셋을 향해 날아들었다.
금빛을 본 탁충과 동곽봉은 시선을 마주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한립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쥐었다.
금빛은 작은 금색 검으로 변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붉은 옥간이 끼워진 비검전서였다. 그가 옥간을 빼들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온화한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허허, 금검전서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빈도가 늦은 것은……. 누, 누구십니까……?”
고상한 얼굴의 수사가 들어오다 청명갑을 입은 한립을 보고 당황했다.
“마 형, 새로 오신 한 선배님이십니다. 본 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탁충이 서둘러 그에게 한립의 신분을 설명해 주었다.
“한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마 수사,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이미 원영 후기를 대성했으니 화신의 경지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축하할 일일세!”
한립이 자세히 수사를 살피며 빙긋 웃었다.
“한 선배님께서 역시 혜안(慧眼) 을 지니셨습니다. 허나 그 마지막 한 걸음을 수백 년째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생에 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수사가 씁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한립은 옅게 미소 지은 후 말없이 붉은 옥간을 풀어 의식을 불어 넣었다.
잠시 후 한립은 의식을 회수하고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
“부려습지라…….”
“정말 그곳입니까?”
벽안의 거한이 한립의 중얼거림을 듣자 소리를 높였고 나머지 수사들도 안색도 달라졌다.
“문제가 있는가?”
“그곳은 이종족의 간자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입니다. 매년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장 위험한 구역이지요.”
벽안의 거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부대만 그곳을 순찰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부려습지는 매우 넓어 저희가 쉼 없이 날아도 한 바퀴를 도는데 보름이 넘게 걸리지요. 보통 네 개의 부대가 파견되어 순찰을 돕니다.”
이번에는 마 수사가 설명했다.
“우리 부대만 가는 것도 아니라면 불평해 어쩌겠는가. 더욱 주의를 기울이면 될 일이지.”
“한 선배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2년 전 12대의 대장 헌엄 선배께서 부려습지에서 이종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습니다. 대원들도 둘이나 죽었고요. 당시 헌엄 선배께서는 화신 중기였는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곽봉이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다른 이들의 말을 거들었다.
‘화신 중기의 수사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한립도 드디어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 그때 두 개의 통로에서 동시에 인기척이 들리고 수사들이 걸어 들어왔다.
사내 다섯에 여인 한 명이었다. 노인 둘, 부부로 보이는 중년 수사 한 쌍, 십대 소년과 얼굴에 붉은 기운이 어린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다. 그들은 쉬고 있던 대원들이었는지 금검전서가 왔다는 전갈을 듣고 모인 것이다.
그들은 한립을 보고 놀라다가 벽안 거한의 소개에 분분히 예를 올렸다. 한립도 그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한립은 슬쩍 의식으로 살펴보다 영 씨 성의 소년에게 잠시 눈길이 갔다. 소년이 마 수사, 거한 탁충과 마찬가지로 원영 후기를 대성한 수행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수행이 가장 약한 것은 오히려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두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다음 순찰 구역이 부려습지라는 것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난색을 표했다.
“이미 구역을 배정받았고 우리가 명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되었네. 앞으로 더욱 조심하면 될 일이야. 내일 출발이니 돌아가 준비들 하게.”
한립은 간략하게 분부를 내린 후 남은 방을 찾아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그가 사라지자 잠시 시선을 교환하다 마지막에는 벽안의 거한을 쳐다보았다.
“탁 형, 한 선배님께 부려습지가 얼마나 위험한 곳이지 말씀드린 겁니까?”
영 씨 소년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말씀드렸습니다. 한 선배님께서 귀담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귀담아 들었으면 또 어쩌시겠어요. 장로회에서 내려온 명에 항명이라도 할까요?”
중년 부인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다.
“항명은 안 되지요. 그래도 위험 하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더욱 신중히 처신하실 게 아닙니까. 우연히 강한 이종족을 만나더라도 청명위는 돼야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으니까요.”
마 수사가 기다란 수염을 쓸어내리며 근심을 드러냈다.
“모두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부려습지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작년에 이미 영족인(影族人)을 발견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또 다른 이종족을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부려습지는 1급 위험구역이니 이 번 순찰이 끝나면 두둑한 보상도 받을 테고, 긴 휴식도 얻을 수 있을 테지요. 아마 몇 년만 이곳에서 버티고 나면 앞으로 이런 위험한 구역으로는 배치되지 않을 겁니다. 한 선배님 말씀대로 다들 출발 준비나 합시다.”
벽안 거한이 침음하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다른 이들도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곧 흩어져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결을 맺고 있었다. 그의 몸은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였는데 특히 머리 뒤쪽으로 희미하게 금빛 후광이 깜빡거려 무척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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