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화. 혼돈만령방(混沌萬靈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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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천지물(玄天之物)이라 불리는 역천의 존재.
수백 년간 노력해 얻은 현천선등의 열매인 현천지물을 떠올리자 한립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영계로 비승하면서 법력을 전부 잃어버려 지금까지는 자세히 연구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천연성으로 돌아가 임무를 수행할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현천선등의 과실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립은 동부 바깥에 꼭 필요한 금제만 설치하고 밀실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었다.
손을 뒤집자 새하얀 옥함이 나타났다. 옥함의 표면에는 일고여덟 장의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 각 자의 영기의 빛을 반짝였다.
한립은 잠시 망설이다 부적을 뜯어내고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몇 촌 크기의 하얀 빛을 반짝이는 물체가 들어 있었다.
한립은 그것을 꺼내 가까이에서 보기도 하고 손끝으로 문질러 보기도 했다.
열은 노란색에 가늘고 긴 타원형 물체는 표면이 매끄러웠고, 한쪽은 뭉툭했는데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평평해 짧은 나무 몽둥이 같았다.
또한 짙은 초록색으로 알 수 없는 문양이 퍼져 있었고 금속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한 재질에 약간의 탄성도 있었다. 이 괴상한 나무 몽둥이가 한립이 현천선등에서 얻은 과실이었다.
영목들을 맡아 기르던 꼭두각시의 기억에 따르면 과실이 처음부터 이렇게 생겼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하얀 원형의 과실이었는데 녹색 액체로 오래 배양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고심하던 한립이 과실을 들고 손끝에 푸른빛을 일으켜 표면에 살짝 가져다댔다.
츠츳.
그러자 푸른빛이 흔들리고 금제에 닿은 것처럼 흩어져버렸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역시 뭔가 있어.’
이전에는 영기를 배척해서 어떤 종류의 영력도 주입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그가 이번에는 손바닥에 금빛을 일으켜 힘껏 쥐었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한립의 다섯 손가락이 가볍게 나무 방망이를 파고든 것이다. 마치 밀가루 반죽 같았는데 손가락을 떼자 원상태로 회복됐다.
그가 입을 벌리자 가느다란 금실이 나와 방망이를 휘감고 돌아왔다. 청죽봉운검이 변한 검사(劍絲)가 허상인 것처럼 방망이 표면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는 표정이 달라지며 손끝을 튕겨 금색 뇌전을 쏘아 보냈다.
펑!
뇌전이 튕겨나가 밀실의 한쪽 벽에서 터졌고, 석실이 잠시 진동했다.
쿠구구구쿵-
화륵.
이번에는 은색 화염을 불러내 주저 없이 방망이를 향해 던져 넣었다. 그러나 은색 화염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화염들은 몇 장 밖에서 응결해 서령불새로 변했다.
불새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현천지물을 노려보며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다급히 무어라 지저귀는 것이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손을 뻗어 방망이를 빨아들였다. 서령천화는 음과 양의 기운이 조화된 화염이었다. 그런데 나무에서 얻은 과실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척 이상했다.
현천지물의 신묘함이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후 한립은 화염, 극한(劇寒)의 기운, 바람의 칼날들 다양한 속성의 공격을 해보았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이 ‘나무 방망이’는 시종 일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심지어 궁여지책으로 서금충을 데려와 풀어 놓기도 했지만 서령 불새와 똑같이 기겁하며 멀리 달아났다.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갉아대던 서금충이 깨물어 볼 생각도 안 한 것이다. 하다못해 파멸법목으로 공격해 보기까지 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여러 가지 신통을 써본 한립은 머리를 긁적이기만 할 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온몸의 법력을 눈으로 끌어 모았고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빛이 폭발적으로 일렁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명청령안으로 투시가 가능했는데 안에는 콩알 만한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립은 명청령안이 통하는 것에 감동했다. 그러나 콩알만 한 점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그마치 십여 일 동안 현천지물만 연구했다.
마지막 며칠은 밀실에 몇 가지 현묘한 소형 진법을 펼쳐 제련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마지막 날 밤, 현천과실을 손에 든 한립의 얼굴에 초조함이 사라지고 평온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런 역천의 보물은 기연을 얻지 않으면 갖고 있어도 사용할 방법이 없겠구나.”
오랫동안 무력하거나 초조하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 일을 통해 마음을 단련한 기분이었다. 그는 이제 내일이면 천연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음을 정리한 한립은 한결 맑은 정신으로 현천과실을 바라보았고 시선이 의도치 않게 짙은 초록색 문양으로 향했다.
돌연 그의 눈이 번뜩였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주 기가 찬다는 얼굴이었다.
문양의 색깔과 형태가 무언가를 연상시킨 것이다. 현천과실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7, 8할 정도 비슷했다.
“어찌 지금에서야 이 생각이 난 것이지?”
한립이 저물탁을 열자 안에서 평범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가 나타났다. 가죽주머니를 쏟아내자 녹색 작은 병이 손바닥으로 굴러 나왔다.
신비한 병이었다.
한 손에 신비한 병을, 다른 손에는 현천과실을 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크기나 생김새는 완전히 달랐지만 짙은 초록색 문양은 꽤 비슷했다.
설마 두 물건이 연관이 있는 것일까? 신비한 병이 다른 현천과실로 제련한 것일지도?
한립은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작은 병의 재료와 현천과실의 재료는 달랐지만 둘 다 지금까지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재료였으니 또 다른 현천지물일 가능성도 있었다.
가볍게 숨을 토해낸 한립이 현천 과실을 땅에 내려놓고 신비한 병의 뚜껑을 열었다. 녹색 액체 한 방울이 소리 없이 나무 방망이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를 기쁘게 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녹색 액체가 푸른빛을 번뜩이며 흔적도 없이 현천과실 안으로 스며든 것이다.
한립은 명청령안으로 다시 한 번 과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했다. 그러자 녹색 액체가 안으로 흘러가자마자 중심부의 하얀 점으로 향했다.
잠시 후, 하얀빛의 점이 조금 굵어졌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한참을 더 관찰하던 한립은 하얀 점이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명청령안을 거두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현천과실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신비한 녹색 액체뿐이었다. 과실 속의 하얀 점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녹색 액체로 계속 키워 나가야 할 것 같았다.
한립은 조심스럽게 작은 병과 현천과실을 챙겨 넣었다.
그가 현천과실과 씨름하고 있는 사이 천연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녹색 액체가 현천과실의 하얀 점에 닿은 순간, 천연성에서 수억 만 리 떨어져 있는 인족 천령경(天靈境).
고공에 떠 있는 작은 섬에서 주술문자가 가득 적힌 벽이 갑자기 금빛을 발산하며 청아하게 울어댔다. 옥벽의 울음소리는 하늘 높이 울려 퍼져 섬 전역에서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옥벽 아래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녹색 장포 수사 두 명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금빛입니다. 또 다른 통천령보가 세상에 나타난 것일까요.”
수사 하나가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수사도 말없이 옥벽을 보며 즐거워했다.
곧 섬 곳곳에서 열댓 개의 빛줄기가 옥벽을 향해 모여들었고, 순식간에 옥벽 아래는 열댓 명의 푸른 장포를 입은 수사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모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듯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옥벽의 금빛이 점점 옅어지자 수사들이 긴장했다.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수사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옥벽의 금빛 문자들이 모호해지면서 낯선 문자가 나타났다. 흥분한 수사들은 금색 문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는 다들 눈을 부릅떴다.
“현천영물(玄天靈物)입니다. 현천 영물이 세상에 나타났어요! 현천참령검(玄天斬靈劍)이 3위를 차지했어요. ……세상에, 영계에 또 한 번의 진령의 겁이 도래하려나 봅니다.”
흰 머리가 성성한 녹색 장포 노인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에 다른 수사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엄습하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잠시 후 옥벽의 금빛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평온하게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줄기들이 섬을 떠나 삼경칠지로 흩어졌다.
옥벽 위쪽에는 열댓 장 크기의 은색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금색 고대 문자로 큼지막하게 ‘혼돈만령방(混沌萬靈榜)’이라고 적혀 있었다.
* * *
같은 시각, 영계 만황세계의 몇몇 규모가 큰 이종족 금지(禁地)에서도 옥벽이 금빛으로 빛나며 다양한 종족의 문자로 똑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족과 요족의 고위층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와 관련된 명령들이 연달아 전달됐고 특수한 경로를 따라 수많은 이들이 비밀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똑같은 영계였지만 암암리에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일의 원흉인 한립은 이런 사정은 까맣게 모른 채 동부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동부를 떠나 천연성으로 갈 예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동굴 밖의 하늘이 밝아지려는데 한립이 묘한 기운을 감지하고 반갑게 눈을 떴다. 그는 바로 몸을 일으켜 밀실을 나서 영수와 영충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딜 간 거야?’
석실 밖에 뚫린 작은 창으로 안을 본 한립은 멍해졌다. 검은 누에고치가 이미 갈라져 있었고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석실 천장에는 먹처럼 새까만 구름이 몰려들어 그윽한 검은 빛을 반짝였다. 한립은 잠시 당황했지만 차분히 행동했다.
그가 석실 문을 향해 법결을 던져 넣자 푸른빛이 반짝이고 무형의 금제가 사라졌다. 천천히 올라가는 석문 아래로 한립이 들어갔다.
한 장 크기의 먹구름은 그가 들어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그가 수결을 맺으며 입을 벌려 어두운 잿빛 구슬을 꺼냈다.
진작 연화시켜 둔 명혼주(鳴魂珠)였다. 한립이 주술을 외며 손끝으로 명혼주를 가리켰다.
그러자 초록빛이 반짝이며 구슬의 표면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렸다.
쿠르릉- 꽈광!
석실 위의 검은 구름은 그제야 반응을 보이고 천둥소리를 내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에 구슬이 공명하며 초록색의 눈부신 빛을 내뿜자 한립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먹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명혼주의 소환을 거부하는 기색이 느껴졌던 것이다.
진화한 제혼은 육익상공처럼 그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력을 회복한 한립이 그 것을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는 온몸의 법력을 응결해 명혼주에 각양각색의 법결을 던져 넣었다. 구슬이 구슬프게 울며 초록빛이 점점 암담해졌다.
그때 허공의 먹구름 속에서 커다란 벼락이 내리치며 검은 뇌전이 거무튀튀한 인영으로 변했다.
검은 인영은 한립 앞에 떨어져 내리며 핏빛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뚫어져라 명혼주를 노려봤다.
순간 한립은 가슴이 철렁했다.
검은 인영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의 마음은 놀람과 의혹으로 가득 찼다. 상대는 검은 장포를 입은 또 한 명의 한립이었다.
의복의 색깔이 다른 것을 제외하면 체격이나 복색까지 한립과 완전히 똑같았다.
심지어 한립의 표정을 보고 그것마저 따라 하고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너는 제혼인가?”
검은 장포의 한립이 그 말을 듣고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인! 나, 나…… 제혼!”
목소리가 웅웅 울리며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더듬거렸다.
명혼주가 있어 상대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라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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