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화. 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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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 수사도 침울한 얼굴로 노란 둔광을 빛내며 빛의 장막을 나섰다. 그는 떠나기 전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허공을 박차고 그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내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둔술의 속도는 줄지 않아 한식경 만에 완전히 낯선 하늘을 날아갈 수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옹 수사가 갑자기 둔술을 멈추었다.
“어찌 된 것이냐? 어찌 기운이 이리 어지러운 것이야! 설마 영지 쟁탈에 실패하고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니겠지?”
익숙한 목소리가 냉랭히 울리며 주변 허공에서 청록색 빛이 반짝였다. 곧 한 자 크기의 비취 교룡이 나타나 서늘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대의 신통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제자 기대를 저버리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지켜보던 천위께서 나서주셔서 겨우 참살당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비취 교룡을 본 옹 수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상대는 화신 초기 수사가 아니었더냐! 네 신통도 본래 빠지지 않고 천혼령까지 쥐어 보냈는데 실패를 했다고? 언제부터 이리 쓸모없는 물건이 된 것이야!”
“제자는 정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자는 알 수 없는 신통을 부리는 데다 솥 형태의 영보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금강결을 대성한 연체사였습니다.”
사부의 서늘한 일갈에 식은땀이 흘러내린 옹 수사가 다급히 해명했다.
“영보를 갖고 있었다고? 게다가 금강결을 대성해?”
“예, 조금의 거짓도 없이 전부 사실입니다.”
옹 수사는 교룡이 흥미를 보이자 겨우 마음을 놓았다. 생각을 정리한 비취 교룡이 갑자기 발톱을 세워 허공을 쥐었다.
검은빛에 휩싸인 천혼령이 옹 수사의 몸에서 빠져나와 교룡의 수중에 들어갔다. 교룡이 방울을 살피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옹 씨 사내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는 말은 법체쌍수(法體雙修)의 길을 가는 자란 뜻이구나! 그런 수련법은 상고시대에나 융성했지, 지금은 법술과 연체술을 동시에 익히는 자가 손에 꼽힌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아 무궁무진한 세월이 걸리니까 말이야. 둘을 동시에 수련하면 처음에는 동급 수사를 월등히 초월하지만 일정 경지에 이르면 보통 수사의 수행을 따라오지 못하지. 게다가 연체술은 필요한 자질이 다르지 않더냐. 내가 알기로 법체쌍수를 대성해 합체기에 이른 이는 고대로부터 천원성황 등 몇 명뿐이었다. 그자도 아마 본래 연체사였다가 나중에 수사가 되었든지 아니면 뭔가를 주워 먹고 육체가 강인하게 변한 것일 테지! 그렇지 않고서야 막다른 길을 향해 가겠느냐.”
“그자는 이미 금강결을 대성했습니다. 설마 육체를 단련할 수 있는 연체술이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금강결을 대성했다는 것은 범인이 연체술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만일 더욱 정진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고마계의 마공이나 요족의 공법을 수련하는 것일 게야. 하지만 둘 다 이종족의 공법이기에 감수해야할 위험이 크다. 상대가 법력과 육체를 모두 단련해서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화신 중기인 네가 적수가 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문제는 어찌 천혼령을 이리 만들어 놓았냐는 것이야. 주혼을 멸하고 나머지 혼백들도 6, 7할을 없앴다.”
“제자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방울 속에 빨려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제를 깨고 나왔으니까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교룡의 스산한 말투에 옹 수사가 다시 서둘러 해명했다.
“천혼령이 혼돈만령방에 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화신 후기 수사도 가둘만한 물건이다. 보아하니 그 녀석이 혼백과 상극인 보물을 지니고 있거나 극양(極陽) 혹은 극강(極剛)의 신통을 지니고 있나 보구나. 됐다, 천혼령이야 다시 요수의 혼백을 잡아다 채우면 그만이니! 그렇다고 이대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겠지.”
한참 사내를 쳐다보던 교룡이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거두었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미 영지가 그 녀석에게 돌아갔으니 도처에 금제를 펼치면 보물을 찾기 어려워질 텐데요.”
옹 수사가 고개를 숙이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 넓은 영지에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심오한 금제를 펼칠 수 있겠느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일단 내 본체가 폐관하고 있는 곳으로 오거라. 내 신물(信物)을 가지고 벗인 공양도를 찾아가면 몰래 숨어들 수 있는 미천오색번(迷天五色幡)을 빌릴 수 있을 게다. 오행의 기운을 뒤섞고 물체를 무형으로 만드는 기묘한 신통이 있는 보물이다. 이러면 공 노마에게 큰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인데……. 앞으로 갚을 일이 팍팍하겠구나.”
비취 교룡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옹 수사는 감히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서 고개만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한립은 막 천연성의 성벽을 넘어 평원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대결도 끝났으니 곧바로 영지로 향한 것이다. 그의 신통에 순식간에 만 리를 날아갔고 녹음이 푸르른 초대형 산맥을 앞에 두었다.
바로 경뢰산(璟籟山)이었다.
그는 산봉우리 하나에 올라 수십 만 리에 달하는 산맥지대를 내려다보았다.
옥궐각에서 보았던 세 산맥 중 가장 떨어지는 곳이지만 그래도 화신기 수사를 위한 곳이었기에 영기의 농밀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인계의 수련 성지들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한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푸른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는 고공에서 쾌속으로 질주하면서 의식을 사방에 퍼트려 주변의 모든 것을 꼼꼼히 확인했다. 가는 동안 네다섯 곳에 금제가 설치된 것이 다른 수사들의 거처가 있는 곳 같았다.
한립은 근처에 기거하는 수사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가 산맥을 거의 절반 가량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지도에 표시된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2만 리가 넘는 영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를 제외하면 다른 수사의 기운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한립은 서두르지 않고 영지를 차분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정 거리마다 하얀 진법 깃발들을 투척해 지하 깊숙이 묻고 다녔다. 저계 법기여서 약간의 환각 작용을 일으켜 다른 수사들의 주의를 끄는 것 말고는 다른 기능은 없었다.
이곳은 이미 주인이 있으니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한립은 한가롭게 자신의 영지를 돌아다녔다.
반나절 후, 영지에서 몇 개의 소형 영석 광산과 천연 영약들이 자라는 곳을 찾아냈다. 영석 광산이며 영약의 품질이 고계 수사인 한립의 눈에는 차지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곳곳을 빠짐없이 살핀 그가 결국에는 고공으로 떠올라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단 말이지.’
별다른 것이 없는 곳인데 옹 수사가 죽을 힘을 다해 이기려고 했던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특수한 비술을 익히기 위해 그저 넓은 영지가 필요했단 말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전투에 지고 울적해 하는 상대의 얼굴로 보아 절대 그런 간단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넓은 영지가 이곳만 있는 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달려들며 죽이려고까지 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이곳을 샅샅이 뒤져봐야 할 듯싶었다. 결정을 내린 한립은 이제 거처에 대해 생각했다. 영지 대부분이 비슷했지만 그나마 영기가 농밀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 결정한 곳으로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두 산봉우리 사이에 오색찬란한 안개가 끼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커다란 습지인지, 땅속 진흙에서 계속 화려한 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백여 장 높이까지 독무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안개에 기이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지 의식에 제한을 둬 속을 살피기 어려웠다. 한립도 명청령안의 능력을 이용해 겨우 독무 깊은 곳에 형성된 암석 골짜기를 찾을 수 있었다.
두 개의 커다란 산이 맞닿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형성된 은밀한 지형이야말로 한립이 원하는 이상적인 거처인 동부를 건설하기에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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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찬란한 안개 깊은 골짜기 속.
그는 암벽에 구멍을 뚫고 비검들을 이용해 간단히 두 개의 기다란 통로를 만들었다.
그는 골짜기의 두 개의 암벽에 각각 다른 동부를 팔 계획이었다. 하나는 다른 수사들의 눈속임으로 쓰고, 다른 하나는 진짜 그의 수련 장소이자 영충과 영수, 그리고 영약을 기르는 곳이 될 것이다.
천기부는 규모가 작았기에 굳이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동부를 만든 후에는 바로 인계에서 가져온 영초와 영목들을 전부 약재밭에 옮겨 심었다.
오랜 세월 길러온 서금충도 따로 밀실을 만들어 넣어두었다. 서금충은 이제 하나하나의 체형이 놀랍도록 크고 생김새도 흉악해서 성체가 될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그리고 표린수는 따로 쾌적한 굴을 마련해주고 그 안에서 수련하도록 해주었다.
그런 다음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텅 빈 영수용 밀실로 들어가는 한립의 표정이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손목의 영수환을 밀실을 향해 내밀자 빛이 반짝이며 검은 기운이 빠져나와 한 장 크기의 무언가로 변했다.
둥근 무언가는 누에고치 형태의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새까만 빛이 그윽하게 퍼지자 누에고치 표면에 핏빛의 악귀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이 달리고 눈이 세 개인 흉악한 악귀.
누에고치는 제혼수가 변한 것이었고, 표면에 나타난 악귀는 평소 제혼의 등 뒤에 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한립은 턱을 문지르며 웃음 지었다.
영지 쟁탈전에서 어두침침한 음혼공간에 빨려 들어가자 무수히 많은 혼백들이 응결해 거대 귀왕의 통솔에 따라 그를 덮쳐왔다
그것을 보고 한립은 주저 없이 제혼을 방출했다.
제혼은 천성적으로 혼백을 잡아먹는 신통을 지녀 밖으로 나오자마자 콧김을 흥흥 풀어대며 노란 기운으로 악귀들을 집어삼켰다.
귀왕은 조금 까다로워 한 번에 끌어당기지는 못했지만 한립이 풍뢰시를 이용해 귀왕의 뒤를 노렸고 벽사신뢰로 공격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부상을 입은 귀왕은 혼백을 응결하지 못했고, 한립과 싸우는 와중에 제혼에게 흡수당했다.
수많은 혼백을 잡아먹고 마지막에는 화신기 수사와 비견되는 귀왕까지 삼키더니 안 그래도 다음 경지로 나아가기 직전이었던 제혼이 고비를 넘기고 검은 누에고치로 변한 것이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한립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남은 혼백들은 신경 쓰지 않고 파멸법목으로 공간에 강제로 구멍을 뚫고 탈출한 것이다.
이제 검은 누에고치는 일정한 시간만 흐르면 진화에 성공할 것이다. 천천히 누에고치를 살피던 한립은 잠시 후 밀실을 나서 이번엔 약재 밭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구곡영삼, 용린과 등 영목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영계에서도 귀한 영약들이라 굉장히 소중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그가 공들여 키운 현천선등이었다.
현천선등은 인계에서 과실을 맺어 한립이 과실을 취하자 갑자기 말라붙더니 잿더미로 사라지고 말았다.
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미리 잘라 놓은 몇 개의 뿌리까지 같이 시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현천선등을 기르려 했던 그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한립은 다른 이들이 지니고 있던 현천선등 뿌리 조각도 사라졌을 거라 짐작했다.
‘하나의 세계에 천지법칙(天地法則)은 유일무이하다는 뜻일까.’
똑같은 현천선등이 두 개일 수 없듯, 두 개의 천지법칙이 한 세계에 공존할 수 없었다.
연기기, 축기기, 결단기, 원영기 수사들은 차치하고 영계의 화신, 연허 수사들도 천지법칙에 순응해서 천지원기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천지법칙을 장악하는 것은 아마 합체기 다음이자 중경계의 끝인 대승기는 되어야 할 듯했다. 아니면 천지 진령이라는 존재들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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