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72화 (529/2,000)
  • 772화. 표린수(豹麟獸)

    *

    “흥! 일부러 저를 충동질해 비승 수사와 척을 지게 하려 하다니. 속이 새까만 자입니다.”

    “상대가 이미 너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저 녀석은 걱정할 필요 없지만 그 조부 되는 자는 만만치 않으니까.”

    빛이 반짝이며 한 자 크기의 청록색 교룡이 나타났다.

    “사부님, 안심하십시오. 영지를 얻은 후에는 전역을 봉쇄해 버릴 테니까요. 정말 무언가 눈치 챈 것이 아니라면 어쩔 도리가 없을 것 입니다.”

    옹 수사는 비취 교룡을 향해 예를 올리고 공손히 말했다.

    “그래, 네게 맡겨 놓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영보를 제련하는 중만 아니었다면 절대 분신(分身) 따위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야. 사부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비취 교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쇠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제자, 절대 사부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확실한 정보인지요? 어떻게 봐도 보잘 것 없는 영지인데 그런 분이 세상을 떠난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옹 수사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사실이라 장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확인해 봐야 한다. 사실이라면 이 사부는 남겨진 보물과 공법으로 앞으로 다가올 천겁을 걱정 없이 치를 것이며, 너는 연허기에 이를 가능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다. 그러니 사흘 후의 쟁탈전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상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면 사정 봐줄 것 없이 죽여서라도! 이후에 조금 성가셔질 테지만 보물과 공법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문제지.”

    비취 교룡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비승수사들은 전투에 능하니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의 수행이 화신 초기라지만 만일을 대비해 천혼령(千魂鈴)을 잠시 빌려 주마. 사흘간 제련해두면 잠시라도 부릴 수 있을 게다. 이만하면 성공하겠지.”

    비취 교룡은 침음하다 입을 벌려 음산한 기운을 분출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검은 방울에는 빼곡하게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교룡의 말을 들은 옹 수사는 크게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가 소매를 털자 남색 기운이 날아가 방울을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러자 비취 교룡은 몇 가지 당부를 남기고 옹 수사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한립은 옥월각을 나선 후, 비령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도를 따라 성 중심으로 반나절을 날아갔다. 그리고 만 리 고공에서 성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성은 천연국(天淵國)이라고 불려야 할 것 같았다. 성의 면적이 인계의 작은 국가와도 맞먹을 정도로 넓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지대는 앞뒤는 성벽으로, 양옆은 거대한 선진(仙陣)으로 된 농무로 뒤덮여 있어 진령이라도 함부로 침입할 수 없었다.

    그 중 만황세계를 마주한 성벽이 가장 협소해 백여 장 정도 늘어서 있었는데 진법 주술이 수천 장 높이의 벽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멀리서 봐도 경외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 거대한 벽이 인족과 요족의 경비병들이 밤낮으로 순찰을 도는 구역이었다. 성벽 뒤로 백만 명 이상의 인요(人妖)족 대군이 상시 주둔하며 거대한 탑에 기거했다.

    이런 삼엄한 경비 덕에 천연성 건립 이래로 단 한 번도 이종족의 기습이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사다리꼴 모양의 다른 쪽 성벽은 몇 천리에 걸쳐 이어져 있었지만 높지도 않고 삼엄하게 지켜지지도 않았다.

    평소 삼경칠지에서 드나드는 인족과 요족의 수가 굉장히 많았는데 대부분이 위험을 무릅쓰고 만황세계로 가려는 이들이었고 일부는 물건을 매매하러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니 이곳이 크게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진정한 의미의 천연성을 제외하면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산맥과 곳곳에 보이는 작은 범인들의 촌락이 전부였다.

    수사들이 모여 사는 다른 구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범인들의 촌락에서는 천연성에 필요한 물건들을 제공했고 저계 수사와 연체사들을 공급했다.

    물론 요족들을 위한 지역에는 수많은 요수 떼와 저계 요수들이 서식해서 천연성에 저계 병력을 보충해주었다.

    비록 인족과 요족이 영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고 공동으로 천연성을 지킨다고 하지만 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양 종족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천연성은 거대한 빛의 장막으로 중간을 가로막고 인족과 요족을 각각 관리했다.

    성 바깥의 구역도 암묵적인 경계가 있어 각자가 따로 살고 있었다. 아마 인족과 요족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공간은 성 중심부의 장로탑(長老塔)밖에 없을 것이다.

    이 탑은 다른 거대한 탑들보다 두 배는 더 컸으며 천연성 최고의 전력들이 모여 있었다. 합체기에 이른 열댓 명의 인족과 요족의 장로들이 회의를 하고 공동으로 결정을 내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천연성의 병사들은 이 탑을 신비하게 우러러봤다.

    *     *     *

    한립은 장로탑에서 이십 리쯤 떨어져 구름으로 뒤덮인 거대한 탑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상시 인족과 요족의 장로들이 꼭 한 명씩은 주둔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이상했다.

    인계에서는 화신기 수사만 해도 아주 신비로운 존재여서 평범한 수사들은 평생 한 번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천연성에는 연허기 수사 뿐만 아니라 합체기 수사도 이렇게 가까이에 머물러 있다니 언제고 지도를 받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계의 기운을 씻어내고 이곳에서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생각을 마치니 눈썹이 치솟은 옹 수사와의 영지 쟁탈전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연허기 수사와 교전해본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푸른빛을 내며 한립이 빛줄기로 변해 비령전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에 이른 그는 금제를 펼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밀실로 들어가 가부좌를 했다.

    사흘 후의 일전에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처리할 일이 있었다.

    한립이 소매를 털자 정교하게 세공된 은색 팔찌가 드러났다. 영계에서 저물탁과 함께 이름을 날리는 영수환(靈獸環)이었다.

    영수환은 내부가 몇 개의 공간으로 나눠져 있어 다른 영수와 영충을 몇 종류나 담아둘 수 있었다. 그래서 낙일지묘에 다녀온 후에는 서금충과 제혼수를 이곳에 담아 두었다.

    다른 손으로 고리를 스치니 주먹 크기의 노란빛이 튀어나와 푸른 밧줄에 꽁꽁 묶인 한 자 크기의 작은 짐승으로 변했다. 바로 낙일지묘에서 영족이 잡으려 한 변이 표린수였다.

    서염의 기억을 통해 이 짐승이 보통의 표범과 똑같이 생겼지만 사실은 기린(麒麟)의 피를 이어받은 변이형태의 종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 성체가 되지 못했는데도 원영기 수사에 비등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법력을 회복하는 동안 한립은 이 짐승을 굴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야성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지능이 발달한 상태라 죽어도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수환 속에 넣어 두고 시간을 두고 야성을 제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겠는지 며칠 전 영수환에서 짐승이 굴복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나 한립도 겁을 치르고 연달아 여러 가지 일을 겪느라 변이 표린수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작은 짐승은 영수환에서 나오자 한립을 향해 구슬피 울었다. 뜻밖에도 청록색 눈에 애걸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다 커다란 고양이처럼 작고 날렵한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이제 네 몸에 금제를 걸 것이다. 받아들인다면 구속에서 풀어주겠지만 거부한다면 다시 100년 후에나 보게 되겠지.”

    한립의 거침없는 말투에 작은 짐승은 몸을 떨며 머리를 연신 끄덕였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열댓 개의 가느다란 은색 침을 꺼내 짐승의 몸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그리고 선홍색 부적을 꺼내 입에서 피를 한 움큼 뱉어낸 후 손가락 사이에 끼고 가볍게 흔들었다.

    푸확.

    부적이 핏빛 안개로 변해 흩어지지 않고 떠올랐다.

    한립은 주술을 읊으며 한 손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그러자 원영이 작은 솥을 밟고 모습을 드러냈다. 원영은 나타나자마자 입을 벌려 녹색 빛덩이를 뿜었다.

    핏빛 안개가 녹색 빛덩이를 보고 즉시 달려들어 하나로 합쳐지더니 초록빛과 붉은빛을 머금은 화염으로 변했다.

    그때 원영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화염에 연달아 법결을 던져 넣자 화염이 격렬히 몸을 떨더니 꿈틀거리며 주먹 크기의 악귀 머리로 변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흉악한 모습이었다.

    원영의 작은 손이 짐승을 가리켰다.

    휘이이이.

    악귀 머리가 입을 쩍 벌리고 스산하게 울부짖으며 작은 짐승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자 작은 짐승은 비명을 지르며 눈꺼풀이 축 쳐져 의식을 잃었다.

    동시에 짐승의 몸에 초록빛과 붉은빛의 기이한 빛이 맴돌며 깜빡였다. 그것을 본 한립은 만족한 얼굴로 한 손을 뻗어 허공을 쥐었다.

    펑!

    둔탁한 폭음이 울리고 작은 짐승을 휘감은 푸른 밧줄이 끊어져 흩어졌다.

    그 후, 한립은 두 눈을 감고는 밀실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사흘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넷째 날 이른 아침.

    불덩이 한 줄기가 문밖의 금제를 뚫고 그대로 응접실로 들어와 반짝이다 방향을 틀어 밀실로 향했다. 그러나 밀실 문 앞에 이르자 돌연 하얀 기운이 출렁이며 불덩이를 막았다.

    불덩이는 그 앞을 빙글빙글 돌며 계속 들어가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밀실 대문이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인영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나 한 손으로 불덩이를 쥐었다.

    3일간 폐관한 한립이었다. 그가 불덩이에 의식을 주입하니 옥궐각에서 보내온 영지 쟁탈전에 관한 전음부였다.

    “광무전(廣武殿).”

    한립이 중얼거리며 두 손을 합장해 불덩이를 꺼트렸다.

    *     *     *

    두 시진 후.

    거대한 전당 앞에서 한립이 의복을 휘날리며 하얀빛의 장막 안에 떠 있었다. 빛의 장막에는 금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팔짱을 끼고 서서 냉랭한 눈빛을 보냈다.

    한립은 거의 한식경을 미동도 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오히려 금갑 거한이 수시로 하늘 위의 태양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 끝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남색 빛줄기가 쇄도해 순식간에 빛의 장막에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법보를 제련하다 조금 늦고 말았습니다. 제가 쟁탈전 시간을 넘긴 것은 아니겠지요.”

    빛이 가시자 옹 수사가 금갑 수사를 향해 예를 올렸다.

    “더 늦었으면 자격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운 좋은 줄 알거라. 바로 시작한다.”

    금갑 수사는 옹 수사를 훑어보다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그가 수결을 맺어 하얀빛의 장막에 금색 법결을 넣자, 빛이 장막이 진동하며 옹 수사 앞에 협소한 통로가 열렸다.

    “감사합니다.”

    옹 수사는 희색이 만연해 남색 찬란한 빛줄기로 변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과 마주하자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나타나다니 배포가 두둑합니다. 화신 초기 수사가 나를 상대하겠다니.”

    옹 수사의 말에 한립은 그저 입꼬리를 끌어올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한립의 모습을 보고 옹 수사가 분노하며 억눌렀던 살심을 키웠다.

    “잘 듣거라. 영지 쟁탈전은 아무런 제약은 없지만 금제만 벗어나지 않으면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 한쪽이 졌다고 승복하지 않으면 내가 나설 일은 없을 것이야.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버티지 말고 빨리 인정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소리지! 영지 쟁탈전으로 사망자가 나오는 일은 많지 않지만 중상을 입어 경지가 떨어지는 일은 허다하다. 이의가 없다면 즉시 시작한다.”

    금갑 수사가 무표정하게 규칙을 말하며 한립과 옹 수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주시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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