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71화 (528/2,000)

769화. 영지(靈地) 쟁투

*

뚱보는 보라색 장포 거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맙다고 한 후 옥패를 사용해 4(四)라고 적힌 점에 표시를 했다.

그러자 4였던 숫자가 푸른 실이 스며들며 5(五)로 변하였다. 취롱산에 위치한 가장 좋은 영지를 점찍은 것이다.

뚱보의 선택에 앉아 있던 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하지만 뚱보는 화신 후기 수사로 수행으로 따지면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이들의 선택을 지켜보려는 듯 유유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때문인지 수사 둘이 서둘러 결정을 마치고 나섰다. 그들은 각각 조금 영기가 떨어진다는 천운산에 영지를 하나씩 택했다.

두 사람은 선택을 마치고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남은 수사들은 아직도 고민 중인 것 같았다.

이때 한립이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보라색 장포 중년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방금 도착했는데도 빨리 위치를 정한 것이 의외라는 듯 다른 이들이 시선을 보냈다.

한립은 저물탁을 스쳐 하얀 옥함을 꺼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옥함을 중년인에게 건넸다. 보라색 장포 거한이 바로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한립을 위아래로 훑었다.

“본 성에 새로 왔다는 한 씨 성의 비승수사가 바로 자네인가?”

“소식이 빠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 수사는 처음으로 거처를 선택하는 것이겠지? 그런 경우 선물을 가져올 필요 없이 그냥 선택하면 되네.”

보라색 장포 거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해주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한립은 빙긋 웃으며 옥함을 다시 넣었다. 그가 새로 온 비승수사라는 말에 그곳에 있던 수사들이 놀라 쳐다보았다. 그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천연성에서도 비승수사는 일반적인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보라색 장포 거한은 한립의 옥패를 자세히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돌려줬다.

옥패를 돌려받은 한립은 주저 없이 병풍의 한 점을 향해 옥패를 들었다.

동시에 푸른빛이 나가 1(一)자를 그렸다.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이들이 일순 소란스러워졌다. 그가 선택한 곳은 영기가 가장 희박한 경뢰산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화신 초기인 그가 이 산을 택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경뢰산 영지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고 별 볼 일 없는 곳을 찍은 것이라 다른 수사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곳의 유일한 장점은 미흡한 영기 대신에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거리가 2만 리에 달해 다른 영지보다 두 배나 넓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영기가 농밀하지 않은데 넓어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련하는 데는 그만큼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이곳을 택해 거처를 만들 생각인가? 일단 선택하면 100년 동안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네.”

보라색 장포 거한조차 의외였던지 미간을 좁히며 충고했다.

“영계에 와서 머물 곳이 생긴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이곳이 조금 떨어지긴 해도 다른 이와 경쟁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 생각이라면 마음대로 하게. 하긴 이미 표식을 남겼으니 바꿀 수도 없고.”

보라색 장포 거한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한립을 훑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에 한립은 포권을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 돌아갈 셈이었다.

또 다른 수사가 일어나 보라색 장포 거한에게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1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올라왔다.

2층 수사들이 그의 얼굴을 보자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나 뚱보 수사만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붙였다.

“옹 수사 아닙니까! 어쩐 일로 영지 쟁투에 다 관심을 보이십니까?”

남색 장포를 입은 사내는 머리를 모두 틀어 정수리에서 감아 맸고 눈썹이 위로 뻗치고 눈빛이 서늘해 사나운 인상을 풍겼다.

“금 형도 거처를 옮기러 왔는데 저라고 못 올 이유가 있나요.”

사내가 뚱보를 훑으며 냉소했다. 화신 중기 수사가 후기인 금 씨 수사 앞에서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자 한립도 자연히 눈길이 갔다.

수행이 그들 정도에 이르면 중기와 후기 사이에는 엄청난 실력 차가 나기 마련이었다. 물론 한립처럼 여러 영보와 서령천화, 원자신광 등 역천의 보물을 지닌 경우라면 예외겠지만.

“옹 수사 농도 잘하십니다. 이미 최상의 영지에 동부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거처를 옮기다니요.”

금 수사는 두툼한 턱을 긁적이며 의혹을 드러냈다.

“최근에 새로운 비술을 익히느라 굉장히 넓은 영지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귀찮게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요.”

남색 장포 거한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충 답했다.

“아아, 그렇습니까?”

한립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슬쩍 미간을 좁혔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남색 장포 사내는 바로 보라색 장포 거한에게 걸어가 포권을 하며 공손히 인사했다.

“초 사숙님을 뵙습니다. 사부님께서 대신 안부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안부는 무슨. 명 노괴의 고약한 성품에 퍽이나 그랬겠구나! 네 사부가 겨우 여섯 번의 대천겁은 벗어났으나 이번 일곱 번째 천겁은 치르기 힘들 것이야.”

보라색 장포 거한이 냉소했다. 그 말에 눈썹이 치솟은 사내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공손히 답했다.

“사부님께서는 거처에서 2백 년간 폐관 수련을 하시며 영보 제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음 번 천겁을 위해서요.”

“영보라! 네 사부는 운도 좋구나. 저번 천겁 때 영보를 잃은 것으로 아는데 벌써 재료를 모아 다른 것을 제련하다니. 그렇다면 이번 천겁도 무사히 넘길 가능성도 있겠어. 다른 얘기는 그만 됐고 나는 임시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니 어서 영지나 선택하거라.”

“존명!”

눈썹이 치솟은 사내가 바로 병풍을 살피더니 한 지점에 떠오른 숫자를 보고 표정이 묘해졌다.

“이렇게 후미진 곳을 선택하다니……. 금 형, 제가 막 와서 이곳을 누가 선택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누가 택한 것인지 아십니까?”

“음?”

옹 씨 사내는 한 손으로 병풍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고개를 돌려 금 씨 수사에게 물었다.

금 수사는 그곳을 보고 무의식중에 한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것을 보고 남색 장포의 옹 씨 사내가 몸을 틀어 성큼성큼 한립에게 걸어갔다.

“당신이 이곳을 택한 것입니까?”

한립이 화신 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의 얼굴에 오만한 표정이 어렸다.

“수사께서도 그곳이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특수한 비술을 수련하기 딱 적당한 곳입니다. 눈치 있게 먼저 포기하시지요. 만일 겨루게 된다면 봐주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한립이 입을 열자 눈썹이 치솟은 사내가 음산한 말투로 대놓고 협박했다. 한립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싸우지 않으려고 굳이 영기가 희박한 곳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수련에만 매진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원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했는데 누군가 시비를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재빨리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다들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눈빛으로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선배님, 지금이라도 이곳을 포기하면 다른 영지를 고를 수 있습니까?”

한립은 평온한 얼굴로 보라색 장포 거한에게 물었다.

“안 되네. 영지의 수는 정해져 있어서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네. 이번에 실패하면 100년 후에나 영지 쟁투에 참여할 수 있지.”

보라색 거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사정을 봐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은 한립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100년 후에나 거처를 가질 수 있다니! 숙성시켜야 할 영약과 제련할 단약이 산더미 같은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필 그때 눈썹이 치솟은 옹 수사가 비웃으며 한마디 했다.

“100년을 기다리는 것이 경지가 떨어지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래도 고집을 부리시겠다면…….”

그 말을 듣고 한립은 화를 내기 보다는 오히려 실소했다.

“수사의 요청은 들어줄 수 없겠습니다. 수사께서 다른 곳을 선택 하시지요. 저도 옹 형과 화목하게 지내고 싶지만 대결을 하다 힘 조절을 못할까 심히 걱정되는군요.”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말 속에는 송곳 같은 일침이 숨겨져 있었다.

2층에 모인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한립이 처음에는 겸손하게 굴다가 이제는 서슴지 않고 상대를 도발해 다들 놀란 것이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보라색 장포 거한마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한립을 힐끗 보았다.

한립의 말에 사내는 열이 받아 표정이 살벌해졌다.

“배포가 대단하십니다. 수행도 낮으면서 감히 그렇게 말하는 이는 수백 년 만입니다. 그렇게 나오겠다면 사흘 후 영지 쟁탈전에서 봅시다. 서로 힘 조절이고 뭐고 할 필요 없겠군요.”

“예, 그때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상대가 화를 내건 말건 한립은 무심하게 답하고는 보라색 장포 거한에게 살짝 허리를 숙인 다음 표표히 2층을 떠났다.

옹 수사가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     *     *

“옹 현제(賢弟), 그런 영지는 대체 왜 빼앗으려는 것입니까? 안에서야 모두 듣고 있어 묻기 뭐했지만 지금은 우리 둘뿐입니다.”

금 수사가 넉살 좋게 웃으며 물었다.

“거짓이 아니라 정말 비술을 수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처를 옮기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한 거처를 놔두고 영기가 희박한 곳을 찾겠습니까!”

눈썹이 치솟은 옹 수사가 탄식하듯 답하자 금 수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옹 현제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면 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쟁탈전에서 사정 봐주지 않고 싸울 생각입니까?”

“왜 그러십니까? 혹시 금 수사께서 아는 분인지요.”

“알기는요! 다만 옹 현제가 모를까봐 말해주는 것인데, 한 수사는 이제 막 천연성에 온 비승수사입니다.”

“비승수사요?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본디 천연성에는 2, 3백 년에 한 번씩 비승수사가 들어오곤 했지요. 그러나 겨우 화신 초기 수사를 상대로 제가 적수가 되지 못할까봐 그러십니까? 어쩐지 기고만장하더라니. 하계에서 떵떵거리던 습관이 남아 있어 그랬군요. 영계에서도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봅니다.”

눈썹이 치솟은 옹 수사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지만 신랄하게 한립을 비난했다.

“하하, 그자의 수행이야 말해 무엇 합니까! 화신 초기 수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옹 수사의 신통은 저도 인정하는데요.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허나, 성 안의 비승 수사들이 제 식구를 싸고도는 것이 걸립니다. 가르침을 주는 것도 좋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세요. 안 그랬다가는 아무리 명 선배님이 계셔도 그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금 수사가 선심 쓰듯 충고했다.

“앞으로 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버릇을 고칠 생각입니다. 전투 중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자가 살고 말고는 그 때 가서 결정하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더는 할 말이 없군요. 나 역시 다른 자들과 겨뤄야 하니까요.”

“겸손하기도 하십니다. 금 형께서 최근에 기가 막힌 상고 보물을 얻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영보에도 비견될 만하다던데요.”

금 수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옹 수사가 다 안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에 금 수사는 안색이 달라졌다가 다시 태연자약한 얼굴로 돌아왔다.

“옹 현제가 그 일을 다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그려. 얼마 전에 보물을 하나 얻기는 했지만 영보와 비교하는 것은 조금 과장인 듯합니다.”

“그런가요?”

금 수사가 손을 흔들자 옹 수사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대충 답했다.

두 수사는 잡담을 나누다 금 수사가 먼저 인사를 하고 붉은 빛줄기로 변해 자리를 떠났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둔광을 보며 옹 수사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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