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70화 (527/2,000)

770화. 옥궐각(玉闕閣)

*

노인을 배웅한 한립은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방으로 돌아와 밀실로 들어갔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아 명상에 잠겼다.

…….

한편, 푸르스름한 얼굴의 노인이 회랑을 나서자 다른 화신기 수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류 형.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정보는 무슨, 아주 입이 무겁습니다. 비승자라는 것을 인정한 것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제가 이것저것 일러주고 왔지요.”

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허허, 그렇게 다짜고짜 찾아가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어차피 우리도 딴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지내보자고 하는 것인데요. 비승자들은 보통 잠재력이 크지 않습니까.”

화신기 수사들이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한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악의가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     *     *

이튿날 아침, 밀실에서 조용히 참선하던 한립이 돌연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밀실을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영패로 어제처럼 대문을 여니 문밖에 하얀 장삼을 걸친 수사가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립이 즉시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는 바로 얼굴이 하얗고 수염이 없던 금갑 수사였다. 오늘은 문인의 복색을 하고 있어 속세를 벗어난 신선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한 수사, 그리 어려워할 것 없네. 이 형께선 일이 있어 오늘은 나 혼자 수사를 보러오게 되었어. 내 본명은 조무귀라 하네.”

조 씨 성의 연허기 수사는 어제보다 한결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한립은 내심 움찔하다 서둘러 ‘조 선배님’이라 칭하며 안으로 모셔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이제 어느 정도 천연성 사정은 이해했겠지. 긴 말할 것 없이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네는 비승수사이고, 두 가지 색의 뇌겁에서 오래 버텼으니 실력이 상당하다는 뜻일 걸세.

그래서 자네의 청명위 신분을 내 미리 신청해 두었네. 이것은 신분 영패이니 잘 지니고 다니고 이제부터 병(丙) 56대를 맡으면 될 것이야. 어제 전송전(傳送殿)에서 보았던 네 명이 이 소대에 속한 이들이네.”

조무귀가 앉자마자 이렇게 말하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푸르스름한 옥패를 건넸다.

“제가 이곳에 막 도착하여 아직 모르는 바가 많습니다. 이런 제가 청명위를 맡는 것은 너무 이른 일이 아닌지요.”

한립은 바로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말했다.

“걱정할 것 없네. 비승수사들은 누구나 본 성에 오면 청명위를 담당했고 대부분이 성과가 좋았지. 본 성의 상황이야 반년쯤 생활하다 보면 차차 익숙해질 테고.”

“선배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한립이 눈을 반짝이다 결국 옥패를 받아들었다.

옥패의 한 면에는 은과문이 새겨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병(丙) 56(五十六) 이라는 글자가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한립이 옥패를 받자 조무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천연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해주었다. 어떤 것은 류 노인에게 들은 것과 같았고, 또 어떤 것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됐으니 여기까지 하세. 이곳은 오직 비승수사들이 임시로 머무는 곳이니 오래 있기 그렇지. 원영 이상의 수사라면 천연성에 자기만의 동부를 가질 수 있네. 어떤 동부를 가질 지는 스스로 쟁취해야겠지만 말이야. 구체적인 이야기는 옥궐각(玉闕閣)에 가서 물으면 알게 될 걸세. 그리고 이건 본 성의 지도이니 자세히 살펴두게. 자네는 본 성에 새로 왔으니 첫 달에는 바로 부임하지 않아도 되지만 다음 달부터는 본인의 청명갑(靑冥甲)을 수령하고 책무를 다 해야 할 것이야.”

조무귀는 저물탁에서 하얀 옥간을 꺼내 한립에게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한립은 옥간을 꺼내 가볍게 이마에 대고 의식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천연성이 이렇게 크다니. 면적으로만 보면 천원성 등 인족의 3대 주성과 비슷하겠구나.”

의식을 회수한 그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한손으로 옥간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옥간을 챙겨 방을 나섰다. 일단 옥궐각으로 가서 거처를 확실히 정한 후에 생각할 요량이었다. 조무귀의 말을 들으니 거처를 구하는 일도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았다.

흥미가 생긴 그는 옥궐각의 위치를 떠올리며 푸른 빛줄기로 변해 비령전을 떠났다.

*     *     *

연달아 열댓 개의 거탑을 지나면서 한립은 묵묵히 오가는 수사들을 살펴보았다.

그가 머물던 거탑 주변에는 다양한 색의 전갑을 걸친 수사들이 빈번하게 나타났지만 그곳을 벗어나자 수사들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갑옷을 벗은 것인지, 아니면 아예 천연성 소속이 아닌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탑으로 왔다 갔다 하려면 전갑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탑의 아래쪽 층을 오가는 병사들은 노란색이나 하얀색 갑옷을 입은 연체사들이었다.

그중 노란 갑옷을 입은 이는 중계 연체사였고, 하얀 갑옷을 입은 이는 고계 연체사였다.

그들의 수는 거탑 중상층을 드나드는 검은색과 푸른색 갑옷을 입은 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을 본 한 립은 천연성의 전력이 바로 거탑을 드나드는 수많은 병사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노란색(중계 연체사), 하얀색(고계 연체사), 검은색(원영기 수사), 푸른 색(화신기 수사), 금색(연허기 수사)의 전갑 순으로 분명하게 전력이 나뉘었다.

이렇게 명쾌할 수가!

한립은 거탑과 갑옷 병사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자신의 목적지로 향했다.

반 시진을 더 가서 희미하게 거대한 성벽이 보일 때쯤 그가 둔광을 틀어 아래쪽의 희끄무레한 3층 누각 앞에 내려섰다.

그리 크지도 않을뿐더러 외관은 별 볼 일 없었지만 드나드는 수사의 수는 상당했다.

그가 잠시 서 있는 동안에도 일고여덟 명의 수사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누각 대문에 걸린 편액에는 ‘옥궐각’이라는 세 글자가 웅장한 필체의 고대 문자로 적혀 있었다.

편액을 보던 그가 누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1층은 대청으로 안에 수십 명의 수사들이 서서 앞에 있는 커다란 푸른 병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풍에는 지도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 위로 은색의 숫자들이 쉼 없이 반짝였다.

그 앞에 푸른 장포를 입은 기다란 얼굴의 중년인이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의식으로 내부를 훑은 한립은 다들 원영기 수사이고 푸른 장포 중년인만이 화신기 수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갑자기 왜소한 노인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공손히 푸른 장포 중년인에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 검은 철패와 저물탁을 두 손으로 바쳤다.

중년인이 철패를 보고 저물탁을 검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물탁은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사라졌고 철패는 다시 왜소한 노인에게 돌려주었다.

노인이 활기차게 병풍으로 걸어가 지도의 어딘가를 향해 철패를 비추자 검은 선 하나가 안으로 스며들었다.

2(二)라고 적힌 은색 숫자가 흔들거리며 3(三)이라고 바뀌었다. 이후 노인은 바로 자리로 되돌아갔다.

일다경 동안 열댓 명의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서 물건이나 영석을 바쳤다.

그러면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에 표식을 남길 수 있게 해주었지만, 두 명에게는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그동안 커다란 지도가 놀랍게도 천연성 곳곳의 영맥 지도라는 것을 알아챘다.

푸른빛이 짙은 곳일수록 적힌 숫자도 커졌고 거의 청록색에 가까운 곳에는 12(十二)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한립은 조무귀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대충 짐작했다. 적당한 동부를 찾으려면 다른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구조였다.

“선배님, 영지를 찾아 동부를 세우시려 하십니까?”

옆에서 누군가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맑은 목소리에 한립이 고개를 돌리자 호리호리한 예쁘게 생긴 여인이 공손히 서 있었다. 여수사의 수행은 극히 낮아 축기 정도였고, 시녀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적당한 곳을 찾아볼 생각이다. 그런데 이곳의 영산은 마음에 차는 곳이 없구나.”

“화신기 수사시지요. 1층은 흑철위 분들이 이용하는 곳이니 선배님은 2층으로 가셔야 합니다.”

한립의 말에 여인이 빙긋 웃으며 안내했다.

“내가 화신기 수사라는 것을 어찌 알아보았지? 네 수행에 그럴 수는 없을 것인데.”

오히려 흠칫 놀란 한립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놀라실 것 없으십니다. 제가 수행은 낮지만 영압반(靈壓盤)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선배님들께서 일부러 기운을 숨기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시녀가 바로 한 손을 들어 손목에 찬 둥그런 진법 원반을 보여 주었다. 원반의 표면에는 은과문으로 보이는 은색 문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골치가 아파졌다.

어느 인족 선배가 진법과 연기술에 관한 금궐옥서를 이렇게까지 해석했는지 천연성 곳곳에서 쓰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바깥에서 그가 쓰던 수법들은 쉽게 무력화될 테니 다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했다. 이러다간 남에게 음해를 당하고도 어떻게 당했는지 모를 것이다.

한립은 잠시 생각을 접고 여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대를 따라 2층에 이르렀다.

2층은 1층보다 좁았지만 훨씬 고상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병풍 지도가 있었지만 양 쪽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지금도 네다섯 명이 앉아서 지도를 살피고 있었는데 병풍 바로 옆에 보라색 장포를 입은 각진 얼굴의 거한이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의식으로 거한을 훑은 한립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상대는 연허 초기 수사였고, 나머지 이들은 화신기 수사였다. 그들 뒤에도 한 명씩 고운 여인들이 옥궐각 시녀의 복장을 하고 붙어 서있었다.

한립이 심호흡을 하고 멀리서 보라색 장포 거한에게 공수를 한 다음 시녀의 안내를 받아 의자에 앉았다. 그녀도 다른 시녀들처럼 공손히 한립의 뒤에 서서 입을 다물었다.

한립은 다른 이들을 휙 한 번 둘러보고는 시선을 청록색 천지인 지도에 고정했다.

똑같이 천연성 곳곳의 영맥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1층 지도 보다 은색 숫자가 낮았다. 거의 대부분이 1(一) 아니면 2(二)였고 기껏 해봐야 4(四)가 가장 높았다.

침음하던 한립이 잠시 후 시녀에게 명을 내렸다.

“인근 영지에 대해 잘 모르니 간단히 설명을 해줘야겠다.”

“예, 선배님. 지도에는 천연성에 속한 세 산맥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운데 취롱산(翠瀧山)은 영기가 가장 최고로 꼽혀 화신기 선배님들의 동부가 가장 많은 곳입니다. 또한 몇 가지 특수한 영약의 산지이기도 하고요. 이번에 이 산맥에 머물던 화신기 선배님들 중 두 분이 천겁을 넘어서지 못하셨고 한 분은 수명을 다하여 유명을 달리하셨지요. 규정대로 그분들의 영지를 회수해 경쟁자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천운산(天韻山)은 이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화신기 선배님들이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 많습니다. 물론 취롱산의 영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요.

마지막으로 경뢰산(璟籟山)은 본래 원영기 수사들의 영지였다가 최근에는 화신기 선배님들에게 배정된 곳입니다. 영기는 조금 부족하다 싶겠지만 머무는 선배님들이 드물어 가장 넓은 영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홀로 방원 만 리의 거대한 영지를 사용할 수 있지요.”

“그렇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한립의 시선이 병풍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시녀가 눈치 있게 다시 그의 뒤로 돌아가서 힐끗 한립을 보았다. 시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젊은 청년처럼 보이는 한립이 벌써 화신기 수사라는 사실에 호기심이 생겼다.

돌연 뚱뚱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리고 보라색 장포 거한에게 비단함과 푸른 옥패를 두 손으로 바쳤다.

“얼마 전에 얻은 4천 년 된 은선지(銀仙芝)입니다. 영지를 선택할 자격이 될지 살펴주십시오.”

“4천 년이나 된 은선지는 구하는 것이 쉽지 않지. 일단 보고 이야기하세.”

거한이 옥패와 비단함을 받아 확인했다.

비단함 뚜껑을 열자 은은한 은빛이 퍼졌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그윽한 초목의 향이 가득했다. 영약과 영초라면 볼 만큼 보았다는 한립도 인정할 만한 수준이었다.

“음. 4천 년에서 몇백 년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대충 비슷하구나. 자격은 되겠어.”

보라색 장포 거한은 비단함 안을 살피고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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