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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66화 (523/2,000)

766화. 천겁 강림

*

그때 한립은 2천 리 밖의 어느 산기슭에 있었다.

그는 전혀 다른 얼굴의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중년인의 모습을 하고 체구도 몇 촌이나 작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는 영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누가 보아도 평범한 연체사로 보였다.

한립은 가부좌를 하고 청석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한참 후 그가 두 눈을 뜨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드디어 체내에 남아 있는 약간의 화령기를 전부 제거했군. 이제 그들이 제 눈으로 확인하러 오지 않는 이상 별 수 없을 것이야.”

그러나 그는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용모와 기운을 바꾸었다 해도 발각될 위험은 존재했다.

그는 바위에 서서 산 위로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덩굴과 관목으로 완전히 가려진 절벽이 눈앞에 들어왔다.

한립은 주변을 살피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금색으로 빛나는 주먹으로 암벽을 연달아 강타했다.

쿵! 쿵! 쿵!

암석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몇 장 깊이의 동굴이 나타났다. 신형이 흐릿해져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 그는 동굴 입구의 천장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자 돌과 자갈이 무너져 동굴 앞을 막았고 동굴 안은 깜깜해졌다. 하지만 한립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을 뒤집어 미리 준비해둔 월광석을 꺼내 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월광석이 동굴 천장에 박히자 시야가 훨씬 밝아졌다. 한립은 깨끗한 자리에 앉아 영구 반지를 반짝여 저물탁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선홍색 빛을 내뿜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평범했고 자기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병 같았다. 한립은 부드럽게 병을 만져보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영족 서염이 지니고 있던 신혈에 대한 기억을 다시 살폈다.

잠시 후 미간을 좁힌 그가 저물탁에서 손바닥 크기의 푸른 옥 사발을 꺼내 선홍색 병을 열고 기울였다. 그러자 병 입구에서 보라색 빛이 맴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일고여덟 방울의 보라색 액체가 천천히 흘러 나왔다.

그것들은 사발에 떨어지자마자 흩어져 서로 융합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하던 한립은 그제야 손가락을 뻗어 그중 하나를 건드리려 했다.

그 순간, 보라색 액체가 튀어 올라 안으로 스며들 듯 손끝을 감쌌다. 그러나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손끝에 금빛을 반짝여 피부와 보라색 액체를 차단했다.

그 후 가볍게 털어내자 액체는 다시 옥 사발로 떨어졌다.

“맞아, 영족의 신혈이 확실해.”

한립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보라색 액체를 다시 작은 병에 담아 조심스럽게 저물탁 안에 보관하고는 동굴 안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법력이 없어도 곡기를 끊어도 살 수 있는 벽곡(辟穀) 능력은 그대로였기에 먹고 마시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 한 줄기가 한립이 있는 작은 산을 훑었고 그들은 영기가 없는 그를 자연스럽게 지나쳐 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이런 의식들이 빈번하게 오갔다. 하루에 열댓 번도 넘게 수색을 하는 듯했다.

보름이 지나자 횟수가 두세 번으로 줄었고, 두 달이 지나가자 하루 한 번으로 줄었다. 의식이 확연히 약해진 것이 수색 인원이 교체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한립은 동굴을 나서지 않았다. 결국 반년이 지나자 미약한 의식마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동굴 속에서 한립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기뻤다.

퍽!

다시 몇 달이 지나자 그는 동굴 앞을 막아 놓은 돌덩이들을 부수고 걸어 나왔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가 동굴을 들어가기 전과 차이가 없자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산을 내려갔다.

얼마 후, 그는 수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     *

1년 후, 낙일성 인근의 작은 성에 낯선 청년 연체사가 나타나 한 무더기의 물건을 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음에도 신혈에 관한 일은 점차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퍼져나갔다.

그날 세 종족이 만나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 그곳에 있던 몇몇 수사들과 연체사들로 인해 증명되면서 시끄러워진 것이다.

황량영군과 다른 연허기 수사들이 나섰지만 겨우 화신기 수사가 갖고 달아났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황량영군 역시 그냥 포기할 수 없었던지 낙일성으로 돌아와 몇 년을 조사했다. 보물을 갖고 달아난 수사의 신분이라도 알아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신통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그를 아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1, 2년 후 황량영군마저 낙일성을 떠났고 환천기와 약조한 대로 만황 세계로 가며 더는 이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혈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되었다.

몇 년 후, 인가와 아주 멀리 떨어진 높고 웅장한 암벽 속에서 한립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핏빛 작은 병이 나뒹굴었고,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가부좌를 한 자는 꼼짝하지 않아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제외하면 석상처럼 보였다.

백여 년의 시간은 영계 범인들에게는 일생이 끝날만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법력이 높은 수도자들에게 백 년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     *     *

백여 년 후의 어느 날.

큰 늑대를 탄 무장한 기병들이 짐승 마차 몇 대를 호송하며 산자락을 넘고 있었다.

그 중, 한 마차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씩씩한 예닐곱 살의 사내 아이 그리고 비슷한 연배의 여자 아이가 타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목 아래로 드러난 근육과 피부는 젊은 청년처럼 광택이 나고 탄력이 넘쳤는데 소매 아래로 드러난 두 손은 늙은 나뭇가지처럼 주름이 져있었다.

기이한 것은 노인의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몇 촌 가량으로 길고 아주 예리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붉은 광택을 띠어 신비로운 느낌을 받게 했다.

마침 노인과 마주 앉은 아이들도 신기하다는 듯 그의 손을 보고 있었다. 노인은 굳이 숨기지 않고 아이들을 향해 미소 지었는데 짐승 마차의 창가로 발굽 소리가 들리며 사내가 외쳤다.

“화 어르신께 아룁니다. 전방에 파견한 이들이 돌아왔는데 천운산(穿雲山) 주변 천 리에 있는 모든 짐승 무리와 요수들을 소탕했다고 합니다.”

“그래, 잘됐구나. 이제 본 상호도 새로운 상로를 개척할 수 있겠어. 앞으로 십여 년 동안은 큰 문제없을 테지.”

노인이 한 손을 들어 천천히 창문의 천을 들어 올렸다. 기골이 장대한 중년 기병이 새하얀 털의 변이늑대를 타고 공손히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허나 단 한 마리의 요수도 남아있지 않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느냐. 은닉술에 능한 요수라면 요기반(妖氣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요기반 외에도 몇몇 산사들을 모셔 의식으로 산 전체를 살펴 봐달라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확실히 요수의 흔적은 없답니다.

기병은 안색이 조금 달라졌으나 즉시 대답했다.

“오, 그렇다면 됐구나. 수사들의 수행이 결단기 정도겠지만 이 산에 그 이상의 고계 요수가 존재할 턱이 없겠지. 알았으니 계속 가자꾸나.”

노인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문의 천을 내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꽈광 꽈과광! 쿠르릉!

돌연 하늘이 터져나갈 듯 굉음이 들려왔고 쿠르릉 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홀연히 먹구름이 몰려 든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몰아치며 주변이 어둑해졌다.

“이게 무슨…….”

중년 기병이 서둘러 구름 속으로 높이 치솟은 거대한 산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마차 벽을 세 번 두드렸다.

그러자 마차가 즉시 멈추었다.

노인이 마차 문을 열고 바닥에 내려서서 기병과 마찬가지로 산꼭대기의 높은 하늘을 응시했다. 그러다 그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천겁! 수사가 천겁을 치르고 있구나! 이상한 것이 소천겁이나 대천겁은 아닌 것 같은데…….”

천둥소리와 번개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노인이 의아하다는 듯 넋을 놓았다.

산의 정상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금색과 은색의 뇌전이 그치지 않고 울리며 그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먹구름 아래로 하얀 돌풍이 휘몰아쳤기에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가 꺾여 날아다닐 정도였다. 이제 행렬이 전부 멈춰 서서 기병들이 눈을 크게 뜨고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현상을 구경했다.

그리고 일부 마차에서는 몇몇이 날아올라 노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화 어르신, 저건 어느 고인의 천겁입니까? 소천겁은 아닌 것 같은데 연허기 선배께서 은거하고 계셨던 걸까요?”

노란 장포를 입은 청년이 무리의 우두머리인지 노인 곁으로 내려와 공손히 물었다. 하지만 말투에 담긴 흥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계에서도 연허기 이상의 수사들은 마주치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대천겁도 아닐세. 대천겁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떨어지는 벼락들이 전부 금색과 보라색이더군. 위력도 이것보다 훨씬 강했고.”

“하지만 소천겁 벼락도 금색과 은색을 띠지 않습니다. 푸른 벼락이었죠. 사문의 장로들께서 소천겁을 치르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 확실합니다.”

노란 장포 청년도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소천겁이라고 치기에는 훨씬 맹렬하고 요수의 화형지겁이라고 볼 수도 없네. 요수들의 화형뇌겁은 일률적으로 은백색 벼락이 내려치니까 말이야.”

청년을 비롯한 결단기 수사들은 노인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다고 하자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돌풍은 더욱 강해졌고 거대한 산맥을 중심으로 방원 수백 리에 광풍이 불어 보통 사람은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화 노인은 잠시 침음하다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수사의 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가기로 한 것이다. 멀리 허공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다시 금색과 은색이 섞인 벼락이 발작하듯 더욱 거세졌다.

먹구름이 요동치며 드디어 한 줄기씩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벼락이 별안간 폭우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더욱 괴이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은색 뇌전이 산꼭대기에 떨어져 내리며 폭발하자 거대한 산이 싹둑 잘려 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금색 뇌전은 산꼭대기에 닿자 괴이하게 사라졌다.

꽈과광!

이어 산 중턱에서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며 은색 뇌전보다 더 큰 폭음이 암석 안에서 들려왔다.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화 노인과 결단기 수사들은 다들 깜짝 놀랐다.

‘금색 뇌전은 대체 뭐지? 암석이 전혀 막아주지 못하고 곧장 겁을 치르는 이에게 떨어지다니. 이것은 대천겁의 벼락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설마 새로운 유형의 대천겁인가? 다들 가슴이 쿵쿵 뛰는 가운데 눈부신 푸른빛이 산중턱을 빠져나왔다.

그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은 겁을 치르는 대단한 신통을 지닌 수사일 것이다. 그가 나타나자 미친 듯이 쏟아지던 금색과 은색의 벼락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방향을 틀어 푸른빛 속의 인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긴 울음소리가 들리고 푸른 빛 속의 인영의 머리 위에 거대한 솥이 나타나 저절로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서 푸른 실들이 빼곡히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푸른 실을 타고 은색 벼락이 전부 솥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금색 벼락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지나쳐 아래에 있는 인영에게 내리꽂혔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푸른빛 속의 인영은 잠시 놀란 듯 했지만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가 손을 마주쳤다 펼치자 사발 굵기의 금색 벼락이 격렬하게 번뜩이며 거대한 뇌전 그물을 이뤄 머리 위에 펼쳐졌다.

순식간에 똑같은 색깔의 금빛 뇌전이 부딪쳐 폭발했고 금빛으로 반짝이며 사라지는 뇌전들이 하늘 위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화 노인은 그것을 보고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영계에서 벼락 속성의 공법이 한둘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뇌전은 천겁의 천뢰(天雷)을 만나면 막기는커녕 흡수되어 고스란히 주인에게 되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겁을 치르는 수사는 천겁의 벼락과 똑같은 벼락 신통을 익혀 그것으로 천뢰를 막아냈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먹구름 속에서 떨어지는 벼락은 끝이 없는 듯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손가락만 했던 뇌전이 이제는 팔뚝만큼 커졌다.

그러자 푸른빛 속의 인영도 안색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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