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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64화 (521/2,000)

764화. 신혈(神血)

*

황량영군의 원영이 노란빛을 내뿜자 그의 녹색 검이 초록빛을 번뜩이며 튀어 나갔다.

작은 검은 한 쌍의 푸른 날개가 달린 괴상한 영수로 변해 거인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원영은 아래에 있는 커다란 하얀 인장을 향해 손짓했다.

쿵!

인장이 일격을 날리고 그대로 빙글 빙글 돌며 하얀 기운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의 무수히 많은 빛들이 인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인장의 본체는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 원래 크기보다 몇 배나 커져 있었다.

환천기는 둔광을 거두고 거인과 수십 장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합장했다.

쿠르릉 콰광!

양손 사이에서 커다란 회색 검이 나타났다. 이전과 똑같은 신통을 부린 것이었지만 위력은 달랐다.

환천기는 반요화된 얼굴로 냉랭히 거인을 쏘아보고는 한손을 들어 허공의 거대 나방을 가리켰다.

그의 손짓에 나방은 다채로운 빛깔을 내뿜으며 날개를 펄럭여 거대한 칼 속으로 들어갔다.

나방이 들어간 거대한 칼날이 음산한 빛을 내뿜자 환천기는 망설이지 않고 거인을 향해 천천히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름답고 아주 가느다란 선이 잇달아 퍼져나갔다.

지능이 낮은 거인도 황량영군과 환천기의 행동에 위기를 느꼈는지 길게 포효했다.

크하아아!

거인이 포효하며 하얀 빛을 번뜩이자 하얀 구슬이 튀어나와 달려들던 날개 달린 괴상한 요수와 충돌했다.

붉은빛과 가는 선이 오가며 요란해 보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거인은 머리 위의 하얀 인장을 향해 몸을 회전하며 돌방망이를 휘둘렀다.

후웅.

작은 산만한 돌방망이의 환영이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황량영군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거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인장을 향해 거침없이 주먹을 날렸다.

쿠아앙!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 같은 굉음이 터지고 거대한 인장에서 태양처럼 작렬하는 빛이 방출되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한립마저 두 눈을 감았을 정도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충격으로 주변 공기가 요동쳤고 한립도 몸을 휘청거리며 말려들 뻔했다. 깜짝 놀란 한립은 온몸의 법력을 움직여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멍하니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노란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떠오른 탓인지 전투 중이던 거인과 연허기 수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한립이 서서히 의식을 방출해 먼지구름 속을 살폈다.

그러자 안에서 외눈박이 거인의 괴성과 환천기의 웃음소리가 요란하고 복잡한 폭음들과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황량영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술법을 펼치는 중인지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한립이 문득 검은 그림자가 숨어 있던 곳을 살피고는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욱천이 사라졌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먼지구름을 살피다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아래쪽에서 참혹한 비명이 울렸고 쾅! 하며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 후 모든 소리가 딱 그쳤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소리 없이 아래쪽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먼지구름 속에서 환천기의 득의양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거인이 지능이 높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안 그랬으면 이리 쉽게 잡지 못했겠지요. 영족의 배신자를 삼켰을 테니 몸을 갈라 무엇이 들어있나 확인해봅시다. 헛고생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오, 그럼 환 형이 수고 좀 해주세요. 낙양정은 내가 제압했으니 일이 끝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잠잠하던 황량영군의 목소리도 들렸다. 먼지가 점차 가라앉자 드디어 그 아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외눈박이 거인은 온몸에 상처가 난 채 피로 가득한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었고 손과 발 하나가 잘려나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기다 머리는 이미 박살이 나서 절반 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인의 가슴에 한 장 크기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안에서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양기가 강한 보물로 일격에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아마 그것이 거인의 숨통을 끊어 놓은 마지막 공격이었을 것이다.

환천기는 반요화된 모습에서 이미 청순한 소년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얼굴이 약간 창백한 것을 빼면 전혀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하얀 비도를 조종해 거인의 배를 가르는 중이었다.

거인 시체의 한쪽 끝에서 황량영군이 하얀 수정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크기가 꽤 컸던 낙양정은 황량영군이 무슨 술법을 부린 것인지 조그맣게 변해 있었다.

“예전에 같이 만황세계에서 죽였던 얼굴이 둘인 거인이 훨씬 상대하기 힘들었지요. 얘기가 나와 말인데 상고거인들은 될 수 있으면 건들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상고짐승이나 천지영수들과 달리 커다란 몸을 제외하면 쓸 만한 게 없잖습니까. 이렇게 힘을 써 죽이고도 건질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환천기가 칼을 조종하며 혀를 찼다.

“그야 그렇습니다. 만황세계였다면 거인을 보았어도 멀리 돌아갔을 테죠. 허나 속단은 금물입니다. 7대 요왕 중 천규랑왕(天奎狼王)은 만황에서 머리 일곱 달린 거인을 죽이고 몸 안에 있던 만희예토(萬曦穢土)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기연 덕에 혼돈방에 오른 만희요탑(萬曦妖塔)을 제련해내 늑대 일족 중에서는 1대 요왕이 되셨지요.”

황량영군이 고개를 저었다.

“뭐, 그 말도 맞습니다. 상고거인들이 워낙 이것저것 삼키기를 좋아하니 운이 좋다면 뱃속에서 무엇을 찾아내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하지만 누가 그런 낮은 가능성 때문에 거인과 싸우겠습니까. 특히 상고거인들은 전부 무리 생활을 하는 흉물들인데요. 설마 벌써 잊으신 겁니까? 쌍면거인(雙面巨人)을 죽이고 머리가 셋인 삼두거인(三頭巨人)에게 쫓겨 달아나다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습니까.”

환천기가 그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황량영군도 옛 생각에 실소했지만 더는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푸확!

환천기의 비도가 거인의 배를 가르자 안에서 한 무더기의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암담하게 빛을 잃었는데 남색 옥사발과 선홍색의 반짝이는 작은 병만이 영기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옥 사발은 옅은 푸른빛을 만들어 작은 병을 감싸고 있었다.

“저것이겠군요.”

환천기는 남색 옥사발이 기령족의 기물 본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다만 옥사발이 영기를 머금고도 영성이 사라진 것을 보니 영족은 죽은 듯했다.

영족이 죽어가면서도 보호한 병이 그들이 찾는 물건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환천기가 희색이 만연해 작은 병을 집으려는데 멀리서 황량영군이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황량영군은 소리치면서 의식으로 한 줄기 서늘한 빛이 자신 뒤에서 기습하려는 기운을 감지했다. 그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튀어올라 화살처럼 솟구쳤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한 줄기 핏빛이 그의 발밑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어 한 척 크기의 인영이 인근에서 흐릿하게 나타나 작은 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그 모습을 보고 황량영군이 호통을 치며 열 손가락을 튕겼다.

피피핑!

파공음이 날카롭게 울리고 노란 검기 열댓 개가 날아갔다. 하지만 한 발 느렸다. 인영은 흡족하게 웃으며 작은 병을 빨아들여 핏빛 구름으로 변해 달아났다.

“욱천! 어딜 가려하시오!”

환천기가 몸을 틀어 인영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의식을 음직이자 돌연 핏빛 구름의 파동이 달라졌다.

한 장 크기의 거대 나방이 청록색 눈을 번뜩이며 날개를 펄럭인 것이다.

동시에 황량영군이 조종하는 열댓 개의 노란 검기들이 흉흉한 기세로 날아들었고 황량영군도 노란 빛줄기로 변해 튀어 올랐다.

핏빛 구름 속의 욱천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욱천 대인! 어서 신혈을 제게 주십시오. 은신술을 이용해 보물을 갖고 달아나겠습니다.”

움찔하던 욱천은 크게 기뻐했다.

‘역시 숨어 있던 것이 서염이었구나!’

욱천은 천부적인 신통으로 동족의 행적을 미세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어 모른 척했는데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한 손은 날아드는 검기들을 향해 뻗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작은 병을 꺼냈다. 이어 손목을 털어 작은 병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날아가게 했다.

핏빛 구름이 등나무처럼 꿈틀거리다가 핏빛 연꽃으로 변해 열댓 개의 검기들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작은 병은 열댓 장 밖으로 날아가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을 본 환천기가 순간 멈칫하다 즉시 회색 요풍(妖風)을 입에서 내뿜어 바람을 타고 한립이 숨어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한립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누군가 그곳에 숨어 작은 병을 챙겨 달아나려 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한립은 다가오는 요풍의 기세에 안색이 달라졌다.

은닉술을 펼친 채로는 공격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아마 저기에 휩쓸렸다가는 태일화청부의 위력도 바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찰나의 순간 욱천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달려드는 요풍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푹!

기다란 핏빛 검빛이 욱천의 손가락 끝에서 튀어 나와 요풍을 가르고 환천기를 노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환천기가 서둘러 허공을 쥐었다.

회색 요수의 발톱이 허공에 나타나 회색빛과 붉은빛이 교전했고 한립은 희색이 만연해 은닉술을 유지한 채 표표히 더 놓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로 그때 한립의 등 뒤에서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홍, 어딜 가려는 게냐!”

하늘이 노랗게 빛나더니 하얀 옥 인장이 나타나 열댓 장 크기의 거구로 변해 그를 내리눌렀다.

“헛!”

전광석화 같은 일격에 욱천도 놀라 헛바람을 내쉬었다.

한립은 옥 인장의 위력을 잘 알았다. 외눈박이 거인의 돌방망이에 두들겨 맞고도 멀쩡하던 보물이었다. 짧은 순간 안색이 수시로 변하던 한립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옥 인장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내리치자 은빛이 반짝이고 한립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뒤통수를 스쳐 푸른빛에 감싸인 작은 솥을 불러냈다.

솥뚜껑이 열리고 맑은 울음소리와 함께 무수히 많은 푸른 실들이 뻗어나가 그물처럼 인장을 밀어 올렸다. 거대한 인장이 푸른 실의 그물 위에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쿠르릉.

한동안 폭음이 끊이지 않았고 푸른 그물은 옥 인장 때문에 조금씩 찢겨 나갔다. 하지만 허천정도 통천령보였기에 엄청난 인장의 기세에도 쉽사리 밀리지 않고 있었다. 그 틈을 타 한립이 수결을 맺었다.

등 뒤로 천둥소리가 울리고 푸른색과 하얀색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비틀리는가 싶더니 하얀 실로 변해 머리 위의 작은 솥과 함께 사라졌다. 그제야 거대한 인장이 푸른 그물을 부수고 떨어져 내렸다.

이때 서른 장 밖에서 푸른 뇌전이 번뜩이며 한립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네가 어떻게 그런 보물을! 네 놈, 서염이 아니구나!”

핏빛 구름에서 욱천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이어 구름이 꿈틀거리고 몇 촌 크기의 소인이 구름 위로 나타났다.

욱천 현령이 대노한 기색으로 한립을 쏘아보았다.

“영족이 아니라 인족 수사라고!”

원래 한립이 있던 자리 바로 뒤에 노란빛이 반짝이며 황량영군이 나타났다.

그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환천기가 그 틈에 거대발톱을 움직여 붉은 검빛을 잡아 부서트리고는 연달아 빛을 번뜩이며 황량영군 옆으로 옮겨갔다.

연허기 수사들이 쳐다보든 말든 한립은 대꾸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수결을 맺으며 입을 벌려 피 한 움큼을 뱉어냈다. 그러자 농염한 핏빛 안개가 그를 감쌌다.

“어딜 달아나려고!”

욱천이 단번에 고명한 둔술인 것을 알아보고 일갈했다. 이어 발밑의 핏빛 구름을 움직여 돌진할 작정이었다.

“욱천 수사, 어딜 그리 급히 가시려고요. 명성이 자자한 혈살영련(血煞靈蓮)과 겨뤄보고 싶습니다만? 황량 형, 인족 수사라면 알아서 처리하시지요.”

환천기가 즉시 반 요괴로 변해 욱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걱정 마세요. 화신기 수사가 아무리 영보를 지녔다 한들 내 손바닥 안이지요.”

황량영군이 한립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 그는 단번에 허천정이 영보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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