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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61화 (518/2,000)
  • 761화. 태일화청부(太一化淸符)

    *

    가장 마지막으로 붉은빛에 휩싸여 골짜기로 들어간 것은 뜻밖에도 한립이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 본래 법력이라고는 전혀 없던 그가 농염한 불 속성 영기를 뿜어내며 쾌속으로 날아간 것이다.

    마치 법력을 전부 되찾은 듯했다.

    한립은 골짜기로 들어서자마자 이 곳이 왜 혼돈곡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골짜기 안은 하늘이고 땅이고 할 것 없이 전부 회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눈을 늘게 뜨고 몇몇 인족과 요족 수사들이 깊숙한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은색 불덩이가 빠져나와 치솟더니 큰 불새로 변해 그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서염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태음진화라고 불러야 할지……. 됐다 됐어! 처음에는 태양정화를 융합하고 나중에는 서염이라는 영족까지 삼켰으니 서령천화(噬靈天火)라고 부르자. 인계에 있을 때 자라극화를 태음진화에 복속시켜 위력을 높여놓아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거꾸로 당할 뻔했구나.”

    한립은 눈앞의 은색 불새를 보며 애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서염이라는 영족이 체내에 들어온 후에 의식을 잡아먹혔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불 속성 영력이 밀려들자 법력 고갈로 잠복해 있던 태음진화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태음진화는 본래 다른 화염들을 집어삼키는 본능을 지니고 있었기에 한립이 조종하지 않아도 바로 불 뱀과 하나로 뒤엉켰다.

    이것이 끝이었다면 화신기 수사였던 서염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한립이 본래 화신기 수사에 대연결을 수련해 의식이 일반 수사보다 강했던 탓에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초계 영장에 불과한 그가 한립의 몸에 들어간 것 자체가 호랑이 입에 제 머리를 집어넣은 꼴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서염이 태음불새와 투쟁하는 동안 한립은 바로 의식을 움직여 그의 의식을 속박했다.

    그리고 상대를 집어삼킨 뒤 태음불새로 하여금 영족의 본체인 검붉은 서염주마저 융화시켰다.

    이렇게 되니 상대의 본원(本源)은 물론이고 기억마저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고, 서염의 기운과 말투를 모방해 다른 영족들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서염을 연화한 덕에 영족들이 낙일지묘에 온 목적과 영족 배신자가 갖고 달아난 신혈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놀라면서도 크게 기뻤다.

    영족의 배신자는 관심 없었지만 신혈이라는 것에 숨겨진 비밀은 정말 대단했다.

    신혈은 성령(聖靈)급 영족이 스스로 사라진 후, 본체의 본원에서 생겨나는 신비로운 액체였다.

    이것을 천지영물 위에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즉시 지능이 발달해 저계 영족으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모든 영족들이 이렇게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스스로 노력해 영족이 됐다.

    하지만 그래도 신혈은 영족에게 세력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보물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기령족 하나가 신혈을 지킬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때 한 병을 훔쳐 인족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인족의 어떤 물건과 교환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이것뿐이었다면 한립은 놀라기는 했어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신혈이 인족 수사와 연체사에게도 크게 이로운 액체라는 것이었다.

    수사들은 신혈을 원료로 혈양단(血陽丹)이라는 영약을 제련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복용하면 원영기 이상의 수사들도 백여 년의 수련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영약이었다.

    그리고 연체사의 경우 신혈을 온몸에 바르면 ‘혈정전의(血晶戰衣)’라는 기괴한 비술을 수련할 수 있었다.

    일단 수련만 하면 위력이 금강결 이상이었고 심지어 한동안 연허기 이하의 모든 공격에서 무사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혈정전의는 전투 중에 착용하는 옷처럼 위력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일회성 비술에 불과했다.

    그밖에도 신혈을 고계 연체사가 복용하면 순간적으로 의식을 자극해 높은 확률로 수행의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당연히 이종족의 영물을 그대로 복용하는 데는 그만한 위험도 따랐다.

    연체사의 수행이 낮고 의식이 약할수록 영물의 반서를 당해 발광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고비를 넘기려는 연체사들은 천심단(天心丹) 같은 임시로 의식을 증폭해 주는 영단 묘약을 필요로 했다.

    한립은 서염의 기억에서 알아낸 정보를 정리하며 쾌재를 불렀다.

    화신기 수사의 의식에 연체사의 공법을 익히고 있는 그에게는 딱 맞는 영약이 아닌가!

    전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가늠할 수 없었고, 소천겁이 언제 강림할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법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또 하나 그가 혼란한 틈을 타 한몫 잡아보려 나선 것은 태음불새가 서염을 집어삼킨 후에 몸 안에 정순한 불 속성 영력이 흡수되어 잠시 법력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 수준의 6, 7할 정도였지만 농도 짙은 법력을 감안하면 일반 화신기 수사와 맞먹는 정도였다.

    한립은 그 영력을 체내로 퍼트려 술법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영력은 그가 수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서 쓰는 만큼 다시 채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불 속성 영력이라 자유롭게 운용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신통과 보물들이라면 동급 수사는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강제로 흡수한 불 속성 영력이라 지금 사용하지 않아도 천천히 유실되어 사라질 것이다.

    ‘아마 한 달쯤 후면 다시 범인처럼 돌아갈 테지.’

    한립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릴 수 없기에 누구보다 먼저 신혈을 손에 넣기로 마음먹었다.

    서염의 기운을 이용해 현령급 존재인 욱천을 속이고 그의 명에 따라 다른 사람들 틈에 잠입했다. 이제야 겨우 그들과 떨어져 혼돈곡에 들어왔으니 눈에 불을 켜고 신혈을 찾을 차례였다.

    한립이 눈앞의 서령 불새를 향해 손짓하자 은색 불새가 날개를 펄럭이며 암벽으로 날아갔고 가볍게 울며 그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이에 한립은 한 손을 뒤집어 손가락 사이에 담황색 영부(靈符)를 꺼내 들었다.

    파앗.

    그것을 붙이자 온몸이 노란빛을 발산했다. 수결을 맺은 그는 신형이 흐릿해지며 토둔술을 써서 땅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두 다리가 한 자 정도 땅속으로 내려가고는 더는 내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무언가 그를 밀어내고 있어 더는 가라앉지 못했다.

    ‘혼돈곡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더욱 괴이하구나. 주의해야겠어.’

    놀란 한립은 주저하다 저물탁에서 은색 문자가 반짝이는 보라색 부적을 꺼냈다. 영계에서도 소수의 사람만이 익히고 있는 은과문(銀蝌文)이었다.

    그것은 천란수 분신이 금궐옥서의 잔본을 해석한 것과 스스로 깨달음을 더해 어렵게 제련해낸 선가(仙家)의 부적이었다.

    금궐옥서 잔본에 적혀있는 영부 중 가장 간단한 은닉용 부적으로 고생 끝에 간신히 일부 재료만 수집해서 비슷하게 만들어낸 미완성의 영부였다.

    너무 귀하고 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어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란한 틈을 타 신혈을 슬쩍할 계획이었기에 일반적인 은닉술로는 동급의 존재를 속이기 어려웠다.

    한립은 부적을 꺼낸 후 가볍게 흔든 후에 놓아주었다. 그러자 보라색 부적이 터지며 은과문이 떠올라 그의 몸 주변에서 맴돌다가 다시 안개로 흩어져 순식간에 한립을 휘감았다.

    잠시 후, 은빛 안개가 흩어지자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골짜기 입구에서 또 파공음이 들려오며 몇 개의 둔광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립이 숨어 있는 곳을 지나 산골짜기 깊은 곳으로 가버렸다. 이에 한립이 희색을 드러냈다.

    그는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인족과 요족 수사들이 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특히 행각승 복장을 하고 있는 화신기 수사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황도 묘했다. 마치 진짜 안개가 된 것처럼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았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웠다.

    그는 슬쩍 수결을 맺어보고는 대량의 영력을 소비하는 비술이나 법보는 아예 쓸 수 없다는 것도 알아냈다.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다.

    ‘허나 상관없다.’

    동급 존재의 눈만 속일 수 있다면 일단 만족이었다. 이 ‘태일화청부’는 제련이 완성된 것이 아니었으니 이만한 것도 다행이었다.

    금궐옥서의 잔본을 모두 깨우쳐 진정한 선가 영부들을 제련해 낼 수 있다면 이런 결점들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한립은 금궐옥서의 나머지 신묘한 선부 영부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가 순조롭게 법력을 회복하고 영계에서 첫 번째 소천겁을 무사히 보낸 후의 일이었다.

    한립은 재빨리 마음을 정리하고 골짜기 안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혼돈곡은 그다지 넓지 않아 백여 리 밖에 되지 않았다. 자광담이 산골짜기 중심부에 있었고 그 주변으로 회색 안개가 짙게 드리워있었다.

    한립은 이미 연못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또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의식을 퍼트리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폭이 1리 되는 깊은 연못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열댓 명의 고계 인족과 요족 수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인족에는 어두운 얼굴의 남 성주와 행각승이, 요족에는 흑풍족 궁장 여인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마른 청년 셋이 보였다.

    한립은 시선을 연못으로 돌렸다. 연못은 물이 맑고 투명한 것을 제외하면 무척 평범해 보였다. 그가 연못을 살펴보는 동안 남 성주는 눈앞의 마른 청년 셋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은월랑족에 머리가 셋 달린 변이 늑대요수가 나타나 일족의 도움을 받아 그 머리들이 각각 세 명의 분신이 되었다지. 전부 원영의 수행을 지녔고 협공을 하면 화신기 존재와 필적한다던데……. 그게 당신들인가?”

    세 청년이 남 성주의 말에 미소 짓더니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저희 형제를 다 알아봐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예, 저희가 바로 그 머리 셋 달린 늑대입니다. 그간 성주의 명성을 흠모해 왔으니 이번 기회에 실력을 겨뤄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흥, 노부는 한가하게 그럴 시간 없소. 소 수사, 홀로 골짜기로 뛰어들다니 이제 어쩔 작정입니까?”

    남 성주는 검고 여윈 청년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고 여인을 향해 물었다.

    “어쩔 작정이라니요? 환 선배님 말씀대로 영족이 먼저 연못 속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가기 전에 막으러 온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소 수사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이곳에서 연못 바깥을 지키며 다른 영족들을 막겠습니다.”

    남 성주가 여인과 연못을 번갈아 보다 웃음을 흘렸다. 궁장 여인이 멈칫하며 남 성주와 행각승 및 원영기 수사들을 찬찬히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수사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제가 직접 들어갔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데 남 형께서 오셨으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설마 저같이 연약한 여인더러 저곳에 들어가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듣자니 남 형은 벽수옥서각(闢水玉犀角)을 지녔다던데요. 그렇게 기묘한 물건이라면 자광담에서 버티는데 큰 도움이 될 것 아닙니까.”

    “나보고 들어가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자들을 데리고 혼돈곡에서 물러나면 노부가 그리하리다.”

    남 성주는 얼굴을 굳혔고 어투도 삭막해졌다. 궁장 여인은 남 성주가 이리 나오자 표정이 달라지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이곳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남 성주가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행각승 노인과 전음을 주고받더니 여인을 보는 눈빛이 점점 적대적으로 변했다.

    요족은 여인과 검고 마른 청년 셋을 제외하면 화형기 요수 세 명이 다였고, 인족은 남 성주와 행각승 외에도 원영기 수사가 일고여덟 명은 되었으니 싸운다면 우위를 점할 것이다.

    밖에서 영족들이 막고 있으니 단시간 내로 지원을 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물건을 차지한다면 공평하게 나누자는 약속은 아무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선배들 간에 오갔던 협의가 그저 서로의 체면을 챙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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