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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59화 (516/2,000)

759화. 서염(噬炎)

*

한립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멸선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비록 3 대 1이지만 그에게 바로 살수를 펼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살 가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립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 없이 세 명의 영족을 올려다보았다.

“욱천 대인, 바로 저 자입니다. 인족 고계 연체사이니 아마 혼돈곡 위치도 알 테고 법력이 없어 손을 쓰기도 적당할 것입니다.”

붉은 빛의 청년이 한립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구름을 밟고 선 사내를 향해 공손히 고했다.

“오, 그럼 저 자로 하자꾸나.”

핏빛 구름 위의 사내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년은 한립을 향해 교활한 미소를 보내며 몸을 굴려 불 뱀으로 변해 날아들었다.

‘날 죽이려는 것인가!’

한립은 깜짝 놀랐지만 이대로 당할 수 만은 없었다. 갑자기 그의 온 몸이 요란하게 반짝였고 금강결이 온 몸을 돌았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멸선주 두 개를 발동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핏빛 구름 위의 사내가 한립이 무언가 하려고 하자 입 꼬리를 꿈틀하더니 한립을 향해 손끝을 들었다.

푸훅.

그러자 한립은 무형의 거대한 압력에 짓눌렸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멸선주를 발동했다가는 그도 꼼짝없이 그 힘에 휘말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금강결을 폭발적으로 끌어내 거대한 압력에 맞섰다. 하지만 무형의 압력이 워낙 센 것이 문제였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땅에 엎지는 것은 피했으나 쿵! 하며 말뚝처럼 두 다리가 땅에 박히고 말았다. 온 몸이 마비가 된 듯 저렸고 조금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흠?”

핏빛 구름 위에 선 사내는 도리어 한립의 엄청난 힘에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러나 한립도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손짓이 이만한 위력을 발휘한다면 상대는 결코 화신기 수사는 아닐 것이다.

그럼 영족의 현령급 존재가 나타났단 말인가?

붉은 빛이 반짝이고 초소형 불 뱀이 한립 앞으로 다가왔다. 한립이 꼼짝 못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한립은 분노에 차 괴성을 질렀고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것을 본 사내는 드디어 미소를 지었고 내밀었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내리누르던 압력이 사라지자 한립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위로 몇 장 정도 솟구쳤다가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후 몸이 눈을 찌를 듯한 금빛으로 빛났고 두 손을 불끈 쥐더니 주변 수풀을 헤집으며 우뚝 선 거대한 나무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쿠쾅! 쾅! 퍼퍽!

그럴 때마다 거목의 허리가 뚝뚝 끊겨나갔다.

굉장한 기세였다.

처음에는 핏빛 구름 위 사내도 그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한립의 폭주가 한 식경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고 이어지자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욱천 대인! 서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요?”

곁의 있던 소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닐 것이다. 서염의 본체는 서염주(噬炎珠)였으니 겨우 연체사의 신념을 집어 삼키는 것은 일도 아닐 게야. 또한 서화주의 기운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핏빛 구름 위 사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들은 영족 소녀도 안심했다. 그러나 아직도 거목이 갈대처럼 꺾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소녀는 즐겁게 기다렸고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한립이 수풀 깊은 곳에서 무표정한 얼굴에 멍한 눈빛을 하고 걸어 나왔다.

“서염, 느낌이 어떠하냐?”

사내가 한립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물었다.

“좋습니다. 인족의 육체가 퍽 쓸 만합니다. 그저 의식이 평범한 이들에 비해 조금 강한 편이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말하는데 목소리는 뜻밖에도 영족 청년의 것이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연체사가 평범해 보이지 않았는데 혹여나 네게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했다.”

“평범하지 않다니요, 어차피 힘만 센 연체사 나부랭이 아닙니까? 욱천 대인, 이미 혼독곡 위치도 알아냈습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듯합니다. 바로 가보시겠습니까?”

“급할 것 없다. 화광이 변이 표린수를 쫓으러 갔으니 곧 돌아올게야. 조금만 기다려 보자꾸나.”

그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자리에 서서 입을 다물었다.

반 시진 가량 지나자 멀리서 파공음이 들려오며 하얀 빛줄기가 날아들어 그들 앞에서 빙글 돌며 멈추었다.

빛이 가시자 하얀 소인이 작은 짐승을 꽁꽁 포박한 채 남색 사슬을 쥐고 허공에 유유히 떠 있었다.

“이, 이 인족은…….”

하얀 소인은 한립을 보며 움찔 놀랐다.

“걱정 말거라. 이미 서염이 의식을 집어 삼킨 후니까 말이야.”

“그랬군요. 그럼 잘되었습니다. 영수환(靈獸環)을 지니고 있지 않아 불편했는데 맡겨두면 되겠군요.”

하얀 소인이 얼굴이 밝아져서 한립에게 들고 있던 남색 사슬을 건넸다.

한립은 별 다른 말없이 사슬을 받아 들었고 손가락의 반지가 빛을 뿜으며 작은 짐승이 사라졌다.

“서염, 혼돈곡 위치를 안다니 네가 앞장 서거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더는 지체할 수 없다. 본족이 신혈을 차지할 좋은 기회야. 평소 같았으면 오행 영족 녀석들이 우리에게 신혈을 넘게 주겠느냐? 신혈 몇 방울이면 우리도 족인(族人)들을 대량으로 늘릴 수 있겠지.

그러니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실패란 절대 용서 할 수 없어. 화광은 오행영족에서 나선 이들과 합류해 소식을 알리고 나머지는 바로 혼돈곡으로 향한다. 서염, 혼돈곡에 이르면 너는 인족에 섞여 상황을 보아 대처한다.”

욱천이 신중하게 명을 내렸다.

“예!”

한립과 다른 이들이 숙연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출발한다.”

핏빛 사내의 호령을 끝으로 그들은 수풀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     *     *

엿새 후, 한립은 혼돈곡 밖의 어느 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일고여덟 명의 범상치 않은 인족들과 같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들은 다들 결단기 수사 혹은 고계 연체사들이었다.

그들은 멀리 보이는 혼돈곡 입구를 보며 어두운 얼굴로 말이 없었다.

“손 형, 황량 선배님과 남 성주님 등이 오늘 직접 나서서 영족과 교전할 거란 말이 사실입니까?”

회색 장삼의 중년인이 문득 생각이 났는지 빈랑나무 잎으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사실입니다. 남 성주님 곁에 머무는 수사의 비검전서를 통해 들은 이야기니까요. 우리 외에 다른 이들도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다합니다. 이 번 일전은 반드시 선배님들이 승리할 것입니다. 혹시나 요족들이 어수선한 틈에 끼어들까 우려하여 우리를 소집하신 것이지요.”

손 노인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황량 선배님과 남 성주님이 친히 내린 명이니 따라야지요. 허나 한 형과 이 형은 어째서 도중에 합류한 것입니까?”

노인이 한립과 얼굴이 하얀 편 문사에게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수행을 높이기 위해 낙일지묘에 들어온 것인데 화신기급 이상의 전투를 그냥 지나칠 수야 있습니까. 거기다 남 성주께서 후한 상을 약속 하셨고요.”

한립이 자연스레 답했고, 나머지 문사의 답도 그와 비슷했다. 노인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에 모인 대다수가 이런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딘가에서 하늘을 찌를 듯 기다란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무수히 많은 요기(妖氣)들이 나타나 융합하더니 회색 안개를 형성하며 하늘을 뒤덮었다.

삽시간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피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엄청난 요기는 당연하다는 듯 혼독곡 입구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매복해 있던 인족들은 전부 어안이 벙벙해졌다.

진작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수사들은 제 눈으로 영족 두 명이 요족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을 보았고, 심지어 화형기 고계 요수들도 여러 마리가 죽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강력한 요기를 뿜으며 지원군이 나타나다니?

숨어 있던 인족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혼돈곡에서 쿠르릉!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땅과 하늘에 무언가 등장한 듯 황토 먼지가 입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하늘에는 한 장 크기의 녹색 나무 새들, 땅에는 예닐곱 장 높이의 돌로 만든 석상이 나타났다.

나무새 꼭두각시들은 부자연스런 비취색을 띠는 것을 빼면 살아있는 새처럼 활력이 넘쳐 보였고 진짜 새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석상들은 두꺼운 몸과 하얀 빛의 두 눈을 빼면 아무 것도 없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고 머리 모양은 각양각색이었다.

수많은 나무와 돌로 만든 꼭두각시들의 등장에 이전에 요족과 영족의 전투를 보지 못했던 인족들은 식겁했다. 그러나 한립은 멀리서 꼭두각시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때 비취색 나무 봉황과 온몸이 회백색인 석상이 무리 속에서 앞으로 나섰다. 나무 봉황의 머리에서 녹색빛이 반짝이자 한 자 크기의 초록치마를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석상이 손을 펴자 그 위로 비슷한 크기의 노인이 나타나 지팡이를 쥔 채 엄청난 기세를 뿜어대는 요기를 쳐다보았다.

“소 수사, 거기 있으면 이야기나 나눕시다.”

늙은이가 입을 열자 거대한 종소리처럼 그의 목소리가 십여 리 내 인족과 요족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상대편의 회백색 요기가 꿈틀거리더니 어득한 불덩이가 빠져나와 궁장 여인으로 변했다.

“황석공, 나를 불러서 어쩌자는 거죠? 혼돈곡을 우리에게 양보하려고요?”

“혼돈곡을? 그럴 리가! 불과 보름 전에 우리에게 대패해 쫓겨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겨우 화신 초기 요족 수사가 우리 중계 영장 두 명을 상대할 셈입니까? 그러지 말고 돌아가시죠. 인족이 어부지리를 얻게 할 작정이 아니라면 말 입니다.”

비취색 묘령의 여인의 목소리가 맑고 듣기 좋았다.

“아이가 당신들 상대로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노부는 어떠한가?”

요기 뒤쪽이 꿈틀거리고 또 다른 요족 수사가 천천히 떠올랐다. 여윈 어깨에 반짝이는 나방을 얹은 청수한 얼굴의 환 씨 소년이었다.

황석공과 천앵, 두 명의 영장은 소년을 보고 안색이 급변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황석공이 소리쳤다.

“환창기, 당신이 어찌 이곳에…….”

“쯧쯧, 너희가 노부를 알아보기는 한 모양이구나. 아직 연허기에 이르지 못 했을 때도 너희 둘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 만 년이 흘러 벌써 오행지체(五行之體)를 이루었는데 너희는 아직도 영장에 머물고 있다니! 보아하니 영족은 수명이 긴 것을 제외하면 우리 요족이나 인족의 저력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 약한 다른 종족들이 그랬듯 영계에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에게 귀순하면 얼마나 좋으냐. 서로에게 득이 될 테니 말이야.”

환 씨 소년이 차분히 말했다.

“환 수사가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영족이 강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영계에서 오늘 날까지 살아남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겨우 요족 장로가 본족의 존망을 논할 자격이 된다고 보십니까?”

황석공이 그의 평가에 분노해 겁먹었던 마음도 잊고 외쳤다.

“노부야 영족 일족의 앞날에 대해 거론할 자격이 없지. 허나 이것은 우리 족장 대인의 말씀을 그대로 읊은 것인데 어쩔 텐가.”

소년은 화내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꿈 깨셔야 할 겁니다. 우리도 대인들을 모시고 있는데 어찌 아무렇게나 다른 종족에 귀의하겠습니까.”

천앵이 냉랭히 말했다.

“뭐 그렇다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네. 황량 수사, 남 성주와 함께 이제 슬슬 나오실 때가 되었지요? 노부가 알기로 어제 이곳에 도착했는데 지금까지 숨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안하고 거저 이득을 취하시려는 것입니까?”

환 씨 소년이 냉소하고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려 허공을 향해 일갈했다. 그 말에 입구에 있던 영족과 주변에 숨은 인족들 모두 화들짝 놀랐다.

잠시 후 하얀 빛이 반짝이고 너비가 서른 장 가까이 되는 옥으로 만든 배가 두둥실 나타났다. 옥으로 만든 배 위에는 황량영군 일행들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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