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7화. 은색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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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잠겨있는 한립과 달리 작은 짐승은 그와의 대치가 지겨워졌는지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흠칫 놀란 그가 장창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고 다른 손으로 서금충 떼가 담겨 있는 영수대 하나를 꺼냈다.
작은 짐승이 다시 달려들면 이번에는 영구 반지를 이용해 영수대를 개방할 작정이었다.
법력이 없어 술법으로 영충들을 지휘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든 갉아 먹고 보는 서금충의 본능을 생각하면 변이괴수 하나쯤 상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유일하게 걸리는 점이 있다면 영충들을 내보내면 의식을 방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다시 영충들을 불러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
작은 짐승이 낮게 울부짖더니 신형이 흐릿해졌고 갑자기 하나에서 둘, 그리고 둘에서 넷으로 불어나다가 별안간 서른 마리가 넘게 늘어났다.
그것들은 건너편 나무 위에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그를 향해 뛰어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립은 그제야 상대도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머니를 앞으로 던지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멀리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까마귀가 우는 소리 같으면서도 매섭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작은 짐승은 새의 울음소리를 듣더니 한립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그대로 방향을 틀어 깊은 밀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겨우 마음을 놓은 한립은 풀어 놓으려던 주머니를 회수해 품 안에 넣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 조금 전 전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방금 전투에서 평소보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고 희미하게 새로운 감각이 느껴질 듯 말 듯 머리를 맴돌았다. 이런 때야말로 깨달음을 통해 수련의 고비를 넘길 기회였다.
한립은 손목의 저물탁에서 푸른 장포를 꺼내 몸에 걸치고는 신형을 날려 반대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한립은 단숨에 백여 리를 벗어나 작은 골짜기에 동굴을 뚫고는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했다.
그렇게 삼일 밤낮이 흘렀다.
한립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간의 수확은 있었지만 수련 고비를 넘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육탄전으로 괴수들과 싸우면 경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차근히 경험을 쌓다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작은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동굴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며칠 전 상대했던 작은 짐승이 적당한 적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더 겨루다 보면 문득 깨닫는 바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몸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그다지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한립은 골짜기를 벗어나 작은 짐승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곧 실망했다.
쉬지 않고 주변 수백 리를 뒤졌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아예 산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적당한 목표가 없는지 찾기로 했다.
* * *
십여 일 후, 어떤 초대형 호수가 근처.
다양한 복색을 한 열댓 명의 연체사들이 뱀 괴수들에게 포위를 당해 등을 맞대고 죽어라 영구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에 뱀 괴수들은 입에서 핏빛 독무를 뿜어내며 몸을 활처럼 굽혀 연체사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입에 벽독단(辟毒丹)을 물고 있어 독무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뱀 괴수들의 날아드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힘이 강했기 때문에 몸통 공격은 막을 길이 없었다.
연체사들은 영구를 이용해 쇄도하는 뱀 괴수들을 맞춰 격추시켰지만 중상을 입힐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인족 연체사들은 힘이 빠지고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뱀 괴수들 뒤에서 무리를 이끄는 초대형 뱀 괴수가 그 모습을 보고는 쉭쉭 거리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때, 가까운 호수 표면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호수의 표면에 대량의 은빛이 번뜩이며 무수히 많은 물화살이 튀어 올라 호숫가에 쏟아져 내렸다.
푸푹! 푸푸푸푸푹!
연체사들은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뱀 요괴와 함께 벌집처럼 온몸에 구멍이 뚫렸고 질척해진 땅 위로 쓰러지며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오직 가장 뒤쪽에 서있던 거대한 뱀 괴수만이 기민하게 몸을 틀어 열댓 장 밖으로 물러나 물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 뱀 괴수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아래쪽에 있는 바위가 부서지며 은색의 거대 손이 흙먼지를 뚫고 솟아올라 괴수를 노렸다.
이에 거대 뱀이 즉시 커다란 입을 벌려 은색 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거대 손과 뱀 괴수가 부딪히자 엄청난 충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은색 거대 손은 멀쩡하고 뱀은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거리며 피를 내뿜었다.
은색 거대 손이 너무 단단해 뱀의 날카로운 이빨에도 잘리지 않은 것이다.
엄청난 고통에 피하려던 뱀은 다시 나타난 은색 손에 의해 그 기회를 잃고 말았다. 거대 손은 뱀의 머리를 쥐어 사정없이 으깨버렸다.
머리를 잃은 뱀의 몸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은색 손은 힘을 풀어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 순간 주위에 흩날리던 먼지가 사라지고 전신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사내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때 호수물이 출렁이며 한 척 크기의 수정처럼 빛나는 수인(水人)도 등장했다.
“수매! 과연 당신이었군요.”
은색 인영이 수인을 보더니 우렁차게 소리쳤다.
“철인, 본 존을 찾으러 온 것입니까? 아마 적멸도 함께 왔을 테죠.”
“안 그래도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낯선 웃음소리가 들리고 검붉은 화염이 은색 인영 곁에서 나타났다. 그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둘은 나와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렇듯 불쑥 찾아온 것을 보니 배신자와 관련된 일이겠군요?”
“맞습니다. 우리가 배신자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은색 인영이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답하더니 은빛을 반짝이며 신형이 줄어 화인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발견하고 잡지 못한 것은 문제에 봉착했단 뜻이겠군요.”
수인도 배신자를 찾았다는 이야기에 표정이 사나워졌고 몸을 이루는 물에 파문이 일었다.
“저희가 한 발 늦는 바람에 교활한 놈이 혼돈곡(混沌谷) 자광담(炙光潭) 속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자광담이 어떤 곳인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죠! 물 속성 신통을 지닌 수매 형만이 그 안에 숨은 배신자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자광담이라! 그 자가 거기로 달아나게 두면 어쩝니까. 그곳은 나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에요.”
화인의 설명에 수인은 조금 화가 난 듯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배신자를 추적하던 중 갑자기 요족들의 방해를 받아 그리된 겁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흑풍족 요족 수사더군요.”
“아니, 요족이 어찌 이 일을 알고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족에서 정보가 샌 것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와 요족간의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이에요! 아마 인족 수사들도 수색 중일 테지요. 혼돈곡은 천앵과 황석이 지키고 있는데 인족과 요족의 화신기급 수사들이 몰려들면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화인이 상대를 재촉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수령지체(水靈之體)인 나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 하는 자광담을 인간이나 요족들이 들어가겠습니까?”
“그래도 이곳은 인족과 요족들의 영역이니 자광담에 들어갈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들이 혼돈곡을 장악하면 신혈을 찾아 돌아가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보아하니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기령족에서 보낸 이들이 며칠 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중에 기령족 8대 현령(玄靈) 욱천이 포함되어 있고요.”
“욱천 현령!”
은색 인영과 화인이 동시에 소리를 높였다.
“이제 내 뜻을 알겠습니까? 기령족이 도착하면 배신자는 달아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며칠만 더 기다리시지요.”
“허나 그리되면 신혈이 기령족 손에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은색 인영은 달갑지 않은 듯했다.
“기령족 손에 들어가는 것이 인족이나 요족이 차지하는 것보다야 낫지요. 만일 신혈의 비밀이 알려지면 우리 영족이 얼마나 큰 손실을 보겠습니까? 우리 오행령족에서 영장급만 보낸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현령급 이상은 다른 녀석들과 대항하느라 이곳을 신경 쓸 틈이 없으니 말입니다.”
수매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을 들은 화인과 은색 인영의 몸이 불안정하게 번뜩이는 것이 그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신 걸로 압니다. 그쪽 상황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화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좋지 않습니다. 성령(聖靈) 대인들까지 몇몇 나섰지만 야차족(夜叉族)에서도 야차왕들이 여럿 움직였으니까요. 간신히 상대의 공격을 막고 있을 뿐입니다. 야차족은 태생적으로 천지지령(天地之靈)을 잡아먹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의 신통 중 적잖은 부분을 제압할 수 있어 우리 영족에게는 진정한 강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인족이나 요족의 저계들을 죽이는 것은 몰라도 괜한 일은 벌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이 둘까지 적으로 돌리면 본 족의 상황이 더욱 나빠질 테니까요. 우리 영족은 영계의 수많은 종족 중 본래 가장 약소한 축에 들지 않습니까.”
침묵하던 수인이 난감하다는 듯 답 했다. 그리고 화인과 은색 인영이 그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 * *
같은 시각 헐벗은 산언덕 위.
궁장 차림의 여인이 화형기 요족 수사에 둘러싸여 잿빛의 골짜기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환 선배님께 연락이 닿지 않는단 말이냐?”
“둔술에 정통한 이들을 몇 무리나 보냈으니 반드시 선배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이 누런 거한이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희는 이곳 입구를 잘 지켜 그 영족이 달아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환 선배님께서 오시면 두 영족 녀석들을 죽여주시겠지. 그리고 때가 되면 본 궁이 큰 상을 내릴 것이야!”
여인이 음침한 어조로 약조하자 요족 수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명을 받들었다. 흑풍족은 요족 칠대 왕족 중 하나니 그들이 큰 상을 내린다면 결코 작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말에 주변 요족 수사들의 사기가 단번에 고조되었다.
* * *
비취색 초원 위를 열댓 명의 수사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황량영군, 낙일성 성주를 포함한 원영기와 결단기 수사들이었다. 결코 약하지 않은 전력이었다.
“남 형, 영족들이 혼돈곡에 있을 거라 확신하십니까?”
근 씨 거한이 나란히 날아가고 있던 남 성주를 향해 물었다.
“분명 그럴 겁니다. 소식을 전해온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꽤 많은 이들이 영족과 요족 고계 수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는데 수행이 낮아서 나서지 못했다고 합니다. 혼돈곡이 그다지 멀지 않으니 며칠 내로 도착할 수 있겠지요.”
남 성주가 조금 들뜬 어조로 답했다.
“혼돈곡이라면 조금 이상한 곳 아닙니까? 많은 이들이 그 안에 들어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요. 누군가 골짜기 안에서 상고거인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문도 한동안 떠돌았고요.”
근 씨 거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그 소문을 듣고 직접 들어가 조사해 보았습니다. 전부 헛소문이 사실처럼 퍼진 것뿐이더군요. 그리고 실종된 수사들과 연체사들은 대부분 저계나 중계이니 그 안에서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다만 혼돈곡 자광담은 신비한 곳이라 저도 그 안을 조사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남 성주가 진지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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