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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55화 (512/2,000)
  • 755화. 영족의 출현

    *

    ‘어떤 신분이기에 규룡존자와 황량영군의 직전제자들 앞에서 이리 당당하단 말인가!’

    서 씨 노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립의 말을 들은 전 씨 청년은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리고 려 씨 여인도 서 노인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함과 어느 선배님 문하에 계신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 조부님과 아는 분일지도 몰라서 말입니다.”

    “그냥 홀로 떠도는 몸이라 사부 같은 분은 없습니다. 이름은 말해도 모를 것이고요.”

    여인의 말에 한립이 피식 웃으며 대충 답했다.

    “그런가요? 말하기 싫으시면 됐습니다. 그럼, 천심단(天心丹) 한 병과 수사의 은심석을 교환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잠깐이나마 의식의 힘을 키워 연체사의 한계를 극복하고 고비를 넘기게 해주는 영단입니다.”

    려 여인이 고민하다 손을 뒤집어 청록색 자기병을 꺼내들었다.

    “천심단? 려 사매, 황량 선배님의 독문 비법으로 제조한 단약을 겨우 은심석과 바꾸다니요. 낭비입니다.”

    진 씨 청년이 펄쩍 뛰며 말렸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서 씨 노인도 표정이 달라졌다. 그저 전흥만이 그런 약을 처음 들어본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임시로 의식을 강화하는 단약이라……. 수사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겠군요.”

    “수사들은 본래 의식이 강해 효과가 미미할 겁니다.”

    려 여인이 뜻밖의 질문에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건 려 수사가 지니고 계시오. 저는 거래하지 않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이번에는 려 여인도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서 노인이었다.

    천심단은 연체사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비를 뚫는 명약으로 영구 재료와 거래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남는 장사가 없었다.

    기이한 독에 당하지만 않았어도 노인은 자신이 은심석을 빼앗아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게다가 천심단을 대수롭게 않게 내놓는 것으로 보아 여인은 황량영군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노인이 놀라든 말든 한립은 이미 두 물건의 가격을 묻고 있었다. 노인은 상대의 실력을 보고 가격을 부풀리지 않고 원래 가격을 말했는데 평범한 범인에게는 거액의 액수였다.

    한립은 곧바로 팔찌 형태의 저물탁(儲物鐲을 꺼내 고계 영석 더미를 꺼내 주었다. 두 재료를 사기에 넉넉한 수량의 영석이었다.

    인계에서 들고 온 대량의 저계, 중계 영석을 교환한 것들이었다. 주인장도 손목에 찬 저물탁으로 영석을 담으면서 거래는 마무리되었다.

    한립이 비단함을 가지고 문밖으로 나가자 전흥이 조마조마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청년은 고민하는 기색이었으나 상대의 신분을 알 수 없어 그냥 떠나게 두었다.

    려 여인은 한립의 뒷모습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반대로 궁우각을 나선 한립은 손에 넣은 재료가 모두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았다.

    사실 두 재료 중 회색 광석이 더욱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영구 재료로 쓸 수 있는 변이재료라서 무척 구하기 힘든 광석이었다.

    영구 제련술을 익히고 우양성의 장서들을 대부분 익혔기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지 평범한 영구사였다면 있어도 제대로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립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 효과를 볼 수 있는 재료라 흡족했다.

    그 후 며칠간 한립은 전흥을 따라 낙일성의 다른 특수 상점들을 돌았고 필요한 몇 종류의 재료를 더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흥을 보내고 눈에 띄지 않는 영구상점을 찾아 하루 종일 제련을 하며 두문불출했다.

    *     *     *

    한 달 후, 차분한 얼굴로 낙일성을 떠난 그는 보름이 넘어서야 거대한 협곡 앞에 도착했다.

    낙일지묘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거대한 협곡은 선명한 붉은 기암괴석이 잔뜩 박혀 있어서 보기만 해도 놀라웠다.

    그 주변으로는 수사나 연체사들이 삼사오오 무리를 지어 무어라 떠들어 대거나 가부좌를 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부분 수행이 그리 높지 않아 충분한 일행이 모집되면 대협곡 안으로 진입할 모양이었다. 물론 미리미리 일행을 구해놓은 무리는 이곳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수행에 자신 있는 고계 수사와 연체사들은 두려움 없이 홀로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에서 높게 비행을 하지 않았는데 고계 요족 수사의 눈에 띄거나 주변에 서식하는 수많은 조류형 요수들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     *     *

    한립이 협곡 입구에 서 있자 열댓 개의 의식이 그의 몸을 훑었다.

    그는 자신이 고계 연체사인 것을 알아보고 무리에 합류하라 요청하는 이들을 연달아 거절하고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이 협곡은 인족 지역에서 낙일지묘로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입구 중 하나였다. 수사들은 각종 기이한 진법으로 다른 입구를 봉쇄해 놓고 이곳을 주시하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지 살폈다.

    이곳을 감시하는 수사들은 보통 몸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가장 수행이 낮은 자가 결단기였고 화신기 수사들도 종종 머물렀다.

    협곡을 거닐며 한립은 그간 들은 낙일지묘의 정보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는 지금 푸른 장포 아래에 먼지가 낀 듯 희뿌연 갑옷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긴 창을 메고 있었다. 창 자루는 거무튀튀했지만 말미에 푸른 수정이 여러 개 박혀 있어 그윽한 빛을 뿜어냈다.

    장창의 날은 은은한 은색이었는데 무슨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교의 힘줄로 만든 밧줄을 손목에 여러 번 둘러 소맷자락 아래 잘 감춰두었다.

    그리고 당연히 한립의 최후의 수단이자 낙일지묘에서 그의 목숨을 지켜줄 비장의 무기인 멸선주도 저물탁 안에 들어 있었다. 멸선주가 있다면 연허기 수사를 만나지 않는 한 살아서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협곡은 가면 갈수록 넓어졌고 백여 리를 걸어간 후에는 길마저 끊겼다. 한립이 그 자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작게 탄식했다.

    ‘의식을 방출할 수 없으니 불편하기 그지없구나.’

    주변 환경을 알 수 없었으니 마음 가는 대로 방향을 정해 걸어가야 했다.

    며칠 동안, 가끔씩 튀어나오는 작은 짐승과 뱀 그리고 곤충류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이나 요수는 마주치지 않았다. 워낙 넓은 곳이다 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닷새 후 그의 앞에 원시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수목들은 전부 3, 40장에 이렀고 이파리가 얼마나 큰 지 해가 전혀 들지 않아 어둡고 서늘했다. 게다가 때때로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원시림을 관찰하다가 걸음을 떼고 몇 번 번뜩인 끝에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강력해진 육체로 범인 시절 수련한 라연보(羅煙步)를 펼치니 나무뿌리와 덩굴이 우거진 밀림 속에서도 귀신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연체사들이나 수사가 이런 광경을 보았다면 수풀 속에서는 그를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휙휙 나아가던 한립이 은빛을 번뜩이며 기다란 무언가를 쏘아 보냈다.

    은빛 실이 두꺼운 나무를 돌자 그 뒤에서 스산한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피비린내가 풍겼다. 뿔이 달린 노란 곰이 나무 뒤에서 나타나 한립을 향해 쇄도한 것이다.

    한립은 여전히 신형을 번뜩이며 몇 장 밖으로 향했다.

    푸학!

    그 순간 거대한 곰이 몇 걸음을 내달리지 못해 피를 뿜으며 허리가 잘렸다. 그리고 그 뒤로 곰이 숨어 있던 거목이 반으로 갈라져 곰에게 떨어졌다. 한립이 일격에 거대한 나무와 곰을 동시에 베어버린 것이다.

    지교의 힘줄을 제련해 만든 은색실은 굉장히 날카로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립이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사흘 후 어떤 산맥 깊숙한 곳에서 연달아 굉음이 울리더니 날카로운 비명과 괴성이 울리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뒷짐을 진 한립이 십여 장 높이의 나무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는 스무 마리는 넘어 보이는 푸른 원승이 시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원숭이들은 얼굴이 동그랗고 컸으며 털이 아주 단단했다. 그리고 몇 촌 길이의 기다란 송곳니가 험악한 인상을 주었다.

    시체들은 전부 조각이 나거나 가슴이나 목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바닥은 핏물로 가득했다.

    그러나 가장 섬뜩한 것은 열댓 장 밖에 두꺼운 거목 줄기에 붉은 털을 가진 머리 셋 달린 거대 원승이가 검은 창에 심장이 뚫려 꽂혀 있는 것이었다.

    큰 머리 하나와 작은 머리 두 개를 가진 거대 원숭이는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를 흘리며 막 숨이 끊어진 듯했다.

    “여기서 결단기 요수를 만나다니, 낙일지묘의 명성이 헛되지 않구나!”

    한립이 거대 원숭이 시체를 보다 중얼거리고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가락의 반지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검은 창이 진동하며 다시 돌아왔다.

    창이 사라지자 거대 원숭이 시체도 아래로 추락했다.

    한립은 한 손으로 장창을 받아들고 신형을 움직여 그림자처럼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곳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한참 후, 주변의 어떤 거목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비취색 빛 덩이가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키가 한 척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소인(小人) 이었다.

    소인은 녹색 치마를 입고 아름다운 얼굴에 굴곡진 몸매를 지닌 미녀로 사람을 딱 10분의 1로 줄여 놓은 듯했다. 그녀는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천앵, 어째서 공격하지 않은 겁니까? 인족 고계 연체사에 불과한데 우리가 힘을 합치면 가뿐히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또 다른 노란 빛이 관목 수풀 사이에서 유유히 떠올랐다. 그 안에도 비슷한 크기의 노란 장포를 입은 노인이 하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황석공!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인족이나 요족을 잡기위해가 아닙니다. 본 족의 배신자를 잡아 신혈(神血)을 회수하는 것이 급선무예요. 되도록 괜한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초록 치마 여인이 노인을 보며 담담히 답했다.

    “기껏 해봐야 원영기 수사 정도의 실력일 텐데, 우리 같은 영장(靈將)들이 둘이나 나선다면 죽이는 거야 누워서 떡 먹기 아닙니까? 영족과 인족, 요족은 본래 적인데 기회가 되면 죽여 놔야지요.”

    노란 장포 노인이 불만을 드러냈다.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으면 저도 나섰을 겁니다. 허나 수상한 자를 건드려 괜히 일을 망칠까 염려가 되어 주저한 것입니다.”

    “수상하다라,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한 것입니까?”

    “정말 저자가 그냥 연체사로 보입니까?”

    눈을 반짝이던 여인이 의미심장하게 반문했다.

    “아니면요? 영구를 들고 결단기 요수를 죽였고 아무런 영력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체사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제 본체가 앵두나무여서 기운에 조금 민감한 편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저자는 의식이 강대했어요. 무려 저보다도요. 인족 연체사가 그런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화신기 수사 정도는 되어야겠지요.”

    “그 말은 화신기 수사가 연체사인 척 가장해서 이곳을 돌아다닌단 소리입니까!”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상대의 몸에 영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인족의 공법들 중 상당수가 우리 영족(靈族)의 천부적인 신통과 맞먹지 않습니까! 이상한 술수를 부려 영기를 감추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아무튼 지금 우리의 목적은 배신자를 찾아 신혈을 되찾는 것이니 괜한 일을 벌이지는 맙시다.”

    여인이 진지하게 당부했다.

    “맞는 말입니다. 화신기 수사라면 우리 둘이 힘을 합쳐도 반드시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지요. 만일 공격했다 상대를 놓치면 큰일 아닙니까. 그런데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주 교활하기 짝이 없습니다. 중, 고계 요족들이 골머리 좀 썩겠어요. 동급 존재라도 화신기 수사가 연체사인 척하고 다닌다면 방심하다 큰 코 다칠 것 아닙니까.”

    노란 장포 노인은 고소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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