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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52화 (509/2,000)
  • 752화. 전갈

    *

    한립은 수사 일행과 헤어진 후 천동상호는 너무 눈에 띤다고 생각해 방 부인 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성으로 숨어들려 했다.

    어차피 혈주문서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의 목적지는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이었던 우양성이었다.

    수많은 연체사들이 동경하는 성이었으니 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흑풍족 요수 여인이 시체를 조종해 넘겨준 증표인 단검은 고민할 것도 없이 부숴버리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우양성으로 가는 도중 금강결 5성 경지를 다지려는 순간 갑자기 매복해 있던 몇 마리 요수들의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공법을 운영하던 중 공격당해 요수들은 전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도 금강결의 반서를 당해 수행이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그 순간 우연히 우양성에서 장사를 하던 범 뚱보를 만났고, 그가 품에 지니고 다니던 진귀한 단약 덕분에 한립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다 보니 한립은 고맙기도 하고, 또 마침 몸을 숨길 곳을 찾고 있던 터라 범 뚱보를 따라 우양성으로 가 음지에서 융흥경매상이 세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는 진법에 대한 지식과 화신기 수사의 견문을 지니고 있었기에 약간의 연습 끝에 손쉽게 영구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우양성에 머물며 수십 년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그 사이 금강결 6성에 이르기 위한 고비를 만난 그는 1년 정도 허비해 금옥종의 산문을 찾아 이미 결단기 수사가 된 금포 사내를 만났다.

    결단기 수사는 한립이 금강결 5성을 대성한 것을 보고 크게 놀랐지만 약조를 어기지 않고 구현명옥담에 몸을 담글 기회를 주었다.

    호숫물의 불가사의한 효과에 힘입어 그는 겨우 며칠 만에 고비를 넘겼고 10년만 더 수련하면 한층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우양성으로 돌아와 스무 해 넘게 수련한 끝에 이번에는 7성으로 넘어가기 위한 고비를 맞았다.

    마지막 고비는 수련만 해서는 넘기기 어려울 테니 이번에는 연체사들 특유의 방식에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인간들이 거주하는 성에서 멀리 떨어진 야생의 땅으로 들어가 강력한 요수를 죽이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멀리 떠나기 전에 먼저 청라사막에 숨겨 두었던 보물들을 전부 가져가야 했다.

    지금 그의 연체술 수행이라면 목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이제 보물을 챙길 때가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     *     *

    안원성 폐허 근처에서 반나절 간 휴식을 취한 한립은 다시 청라사막으로 향했다.

    한 달 넘게 걸어 잿빛의 모래 위에 이른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막이 고요해도 너무 고요했다,

    모래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찾을 길이 없었다.

    청라사막 전체가 죽은 듯 했다.

    의아한 얼굴로 한립은 경계심을 키웠고 저물대를 묻어둔 곳으로 걸어갔다.

    사막의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보물들을 묻어 놓을 당시 법력을 이용하지 않아도 찾을 수 있게 특수한 방법을 취해 놓았기에 찾아 가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저건!’

    십여 일 후 한립은 청라사막 어딘가에서 열댓 장 크기의 하얀 물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거대한 곤충의 허물이 수정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등 뒤로 여섯 개의 얇은 날개가 달린 거대 지네 형태의 껍데기였다.

    “육익상공? 말도 안 돼. 이렇게 빨리 진화할 리가 없을 텐데.”

    한립이 거대한 지네의 허물을 보며 아연해했다. 그가 다가가 그 주위를 몇 바퀴 돌고는 소매를 펄럭여 은빛을 날렸다.

    텅.

    가벼운 소음을 내며 껍데기를 맞고 튕겨 나온 것은 은빛의 밧줄이었다.

    지교의 힘줄로 만든 기묘한 무기로 수십 년간 한립을 도와 적잖은 짐승들과 적들을 죽이며 세운 공이 혁혁한 물건이었다.

    그는 영구 제련법을 익히고 나서도 지교의 힘줄로 만든 무기를 개량하지 않았는데 첫째로 연체술이 크게 진보해 딱히 영구의 도움이 필요 없었고, 둘째로 밧줄이 손에 익어 개선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한립의 괴력을 생각할 때 평범한 곤충의 껍데기였다면 일격에 부서져 나갔을 것이다. 과연 날개가 여섯 개 달린 육익상공의 허물이었다.

    한립이 주변을 살피며 망설였다.

    ‘육익상공들은 총 12마리였는데 허물은 하나뿐이라니 나머지는 어디로 간 거지?’

    “설마…….”

    한립은 번뜩이는 생각에 표정이 달라졌다.

    그때 괴이한 울음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고 곧이어 벼락이 치고 먹구름이 끼며 번개와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것을 본 한립은 입 꼬리를 꿈틀하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식을 방출할 수 없어도 이미 서로의 의식이 연계되어 있었기에 기이한 천기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바로 육익상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충은 날개가 6개 달린 성충이 된 후 비바람을 부릴 정도로 대단한 신통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한립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정도로 능숙하게 천지원기를 다룬다는 것은 그 주인보다 수행이 높은 화신기를 대성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곧 또 다른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구름 반대편에서 오색찬란한 구름이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핏기가 가셨다.

    다채로운 색깔의 구름은 한 쌍의 날개가 달린 전갈 떼가 만들어낸 것이었고, 손바닥만 한 크기에 오색 반점이 난 전갈들이 하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갈 무리의 정 중앙에 몸집이 스무 장은 넘는 전갈왕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전갈은 날개는 없었지만 거대한 육체를 다채로운 독무로 떠받쳐들고 열댓 장 길이의 독침 꼬리를 휘두르며 괴이한 녹색 빛을 반짝였다.

    아래서 보고 있던 한립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전갈왕은 놀랍게도 몇 만 마리의 작은 전갈들이 응결된 모양이었다.

    한립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멀리서 바람이 거세게 일며 검은 구름 속에서 열댓 장 크기의 새하얀 지네가 흉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희미하던 의식 연계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랬던 거였어!’

    육익상공의 체내에 놀랍게도 12마리의 지네들에게 심어 놓았던 원신 표식들이 전부 감지되었다.

    12마리가 합체한 것이든 아니면 한 마리가 나머지를 전부 잡아먹은 것이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육익상공 성체는 이렇게 진화한 것이라고 치고, 그럼 수많은 전갈 떼는 어디서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이런 곤충 떼가 출몰했다면 천동상호 운송 행렬이 무사히 사막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어찌된 영문인지 고심하는 사이 검은 구름과 오색찬란한 안개가 멀리서 충돌했다.

    후두두득! 투투툭!

    영충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섞여 들려왔고, 전갈들은 검은 구름에서 분출된 하얀 삭풍에 얼어붙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나머지 전갈들은 입에서 다채로운 독기를 뿜으며 검은 구름으로 미친 듯이 돌진했다.

    그러자 검은 구름이 연해지며 그 안에 몸을 숨겼던 새하얀 지네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육익상공은 날개달린 전갈들이 뭉친 전갈왕보다는 작았지만 웬만한 요수들과 비교하면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흉악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머리가 검은 구름 깊은 곳에서 입을 벌리더니 커다란 빛기둥을 분출했다.

    하얀 빛기둥이 지나는 대기에서는 촤르륵, 하는 파공음이 들려왔고 빛이 번뜩이자 거대 전갈왕의 몸에 한 장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거대 전갈왕은 수많은 날개 달린 전갈들이 뭉쳐진 것이라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죽지도 않았다.

    도리어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날카롭게 울어대며 독침이 달린 꼬리를 육익상공을 향해 움직였다.

    녹색 빛이 폭발하고 꼬리가 환영처럼 수십 장 거리를 뛰어 넘어 지네의 머리 위로 날카롭게 쇄도했다.

    그리고 거대 전갈의 몸에 뚫린 구멍은 연동운동을 통해 재빨리 메꾸어졌다.

    육익상공은 거대한 꼬리가 날아드는 것은 개의치 않고 반투명한 6개의 날개를 미세하게 펄럭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독침이 달린 꼬리가 허공을 꿰뚫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 전갈의 위쪽 공간이 왜곡되며 새하얀 지네가 교통처럼 몸을 꼬며 나타났다.

    이에 여섯 날개가 또 한 번 흔들렸고 신형이 모호해져 튀어나가더니 머리끝부터 거대 전갈왕의 몸으로 파고들어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었다.

    그러자 우윳빛 한광이 거대 전갈왕의 표면에 퍼지기 시작했고 눈 깜짝 할 사이에 투명하게 얼어붙었다.

    멈칫하던 거대 전갈왕은 그대로 부서져나갔고 수많은 전갈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남은 전갈들은 더는 뭉치지 못하고 그대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별안간 다채롭던 독무가 사라졌다.

    육익상공은 그것을 보고도 전갈들을 쫓지 않고 그저 입을 벌려 하얀 삭풍을 불어냈다. 주변에 떨어진 날개 달린 전갈들의 시체를 전부 휘감아 삼키기 위해서였다.

    멀리서 보고 있던 한립도 조금 마음을 놓았다.

    ‘이제야 육익상공이 저렇게 빨리 진화한 이유를 알겠군.’

    그가 떠나고 이곳에 남아 먹어치운 전갈이 한두 마리는 아닐 것이다. 날개 달린 전갈 영충도 꽤 특별해 보였으니 대량으로 잡아먹어 진화를 촉진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청라사막에 들어온 이후 곤충은커녕 살아 있는 생명체를 하나도 보지 못한 것은 저 전갈 떼들과 육익상공이 전부 먹어치웠기 때문일 것이다.

    한립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거대 지네가 모래 바닥에 떨어진 전갈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는 한립이 있는 방향을 서늘하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한립은 가슴이 철렁했고 그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육익상공은 한 동안 울부짖다가 여섯 날개를 동시에 떨며 하얀 잔영으로 변해 그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몇 호흡 만에 한립의 머리 위에 도착해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밖으로 드러난 송곳니들이 서로 마찰하며 무서운 소리가 났다.

    한립은 묘한 시선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영충을 주시했지만 등 뒤로 소매를 펄럭이며 멸선주 두 알을 조용히 쥐었다.

    그러나 허공의 새하얀 지네는 낮게 울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그대로 먼 곳으로 날아가 하늘 저편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마치 한립을 지나는 행인 보듯 대한 것이다.

    그를 버려두고 육익상공은 홀로 떠나갔다.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지만 쓴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충이 날개 4개에서 6개로 진화하며 이렇게 역천의 변화를 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만황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상고 영충은 일반 요수와는 다르게 화형(化形)기에 이르러 인간의 몸은 갖추지 못했지만 기본적인 지능이 발달한 듯했다.

    법력만 남아 있었어도 영충의 몸에 심어 놓은 금제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법력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천만 가지 비술을 알아도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변한 영충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네들은 알이었을 때부터 그가 정성을 다해 키웠고 그 세월이 몇 백 년이었다.

    또한 그동안 영충과 한립 사이의 의식 연계는 아주 견고해졌고 더욱이 12마리가 한 몸이 되면서 의식도 하나로 융합되어 쉽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육익상공이 한동안 고민하다 한립에게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버린 이유였다.

    그는 멀리 검은 구름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속으로 기가 막혔다.

    인계에서 신비한 병을 이용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영충이 이제는 성체가 되어 통제가 불가능하다니!

    울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비록 지금은 통제할 수 없어도 법력을 회복하면 다시 굴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일한 걱정은 영계가 이렇게 넓고 수사도 많으니 육익상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수도자에게 먼저 붙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립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문득 서금충과 제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두운 얼굴로 질주하듯 걸어가자 잠시 후 백여 장 밖에 어딘가에 도착했다.

    한립은 곧바로 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고 금빛이 번뜩인 순간 바닥을 향해 일격을 내리꽂았다.

    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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