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화. 우양성(虞陽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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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풍족의 전승주가 어떤 능력을 지녔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폐단을 전부 제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침묵하던 한립이 다시 여자아이를 향해 물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면 완전히 인간의 신분을 잃고 앞으로 가솔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알고 있느냐?”
“할아버지 말고는 어차피 아무도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되셨는데 제가 이곳에 남아 뭘 하겠어요? 아버지를 찾아 함께 생활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나도 말리지 않으마. 저 분을 따라 가거라.”
아이의 분명한 의지를 들은 한립은 짧게 탄식하고는 멸선주 두 알을 들고 그대로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그가 깔끔하게 물러나자 궁장 여인은 멈칫했고 여자아이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차마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한립은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도가 대단해 잠시 후에는 검은 점으로 변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대아야, 얼른 가자! 저 자가 인근의 고계 수사에게 고한다면 우리의 행적이 드러나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야.”
여인이 흉흉한 눈길로 한립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그냥 보내기로 결정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그럴 분이 아니에요.”
“인간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서둘러 떠나자꾸나!”
말을 마친 궁장 여인이 대아가 있는 쪽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아이가 여인 곁으로 이동했고 보라색 장포 거한은 검은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어 사라졌다가 검은 점으로 응결해 여인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비단 손수건이 나타나 그들을 뒤덮었고 아이와 함께 푸른 연기로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백 리 밖 인간들의 주둔지에서 법기를 탄 몇 개의 빛덩이가 떠올라 어딘가로 날아갔다.
영약을 구하기 위해 떠난 금옥종 수사들과 한립이었다.
그들 일행은 이렇게 떠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방 부인과 장규 등은 모른 척하며 마치 한립이라는 천동상호 부대장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한립과 관련한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 *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40 년의 세월이면 갓난아이가 중년의 사내가 되고 막 영근을 발견한 아이가 중계 수도자가 될 수 있을 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시간은 백만 년 넘게 한 곳을 지켜온 고성(古城)에게는 순식간에 불과했다.
우양성(虞陽城)은 삼경이 처음 세워졌을 때 건립된 곳으로 천원경에 만들어진 최초의 상고 시대 성들 중 하나였다.
규모는 중급에 불과했지만 역대 성주들은 영역을 넓힐 궁리를 하지 않았고 수많은 요수의 난을 겪으면서도 위기에 봉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체사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성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천원경에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듣기로는 오늘날의 천원성황도 우양성에서 연체술을 대성한 후에야 이곳을 떠났다고 했다.
각종 연체 종문과 유파가 많았고 보기 드문 고계 연체사도 성 안에 다수 머물고 있는데다 우양성 중심에 전문적으로 연체법문과 깨달음을 보관하는 ‘성탑(聖塔)’이 있어 서책의 양으로는 천원경 내에서 두 손가락 안에 꼽혔다.
이런 이유로 매년 우양성을 찾는 저계나 중계 연체사의 수가 많았다. 그러니 겨우 요수의 난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밖에 우양성은 천원경에서 유명한 영구(靈具) 제련지로 매년 대량의 영구가 이곳에서 만들어져 연체사들이나 크고 작은 상인들에게 매매되었다.
그 중 전문적으로 진귀한 영구를 취급하는 몇몇 경매상들은 재력이 넘쳐났다.
그들은 각각 비범한 영구사(靈具師)들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연단사, 진법사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으로 영구를 제련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반드시 연체술을 익혀야 했고 진법에도 밝아야 했으며 태생적으로 강력한 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세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영구사가 될 수 있었는데 그 길로 대성하려면 재능도 필수지만 수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경매상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구상들은 각각이 걸출한 인재로 그들이 출품하는 영구들은 위력이 크고 불가사의한 신통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이런 영구는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해서 보통 몇 개월에서 반년까지 걸렸지만 일단 경매품으로 나오면 엄청난 가격으로 팔려나가곤 했다.
융흥경매상(隆興競賣商)도 우양성에서 가장 규모가 있는 경매상 중 하나였다 이곳은 업계의 선두에 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 다른 점포와도 뒤지지 않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융흥경매상의 주인도 성 안에서 꽤나 지위가 있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날 융홍경매상의 대청에서 화려한 장포를 입고 살집이 있는 사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시로 문가를 바라보며 초초한 기색을 보였다.
“풍이 어디 갔느냐? 다시 문 앞에 나가 한 대사께서 오셨는지 살펴 보거라.”
잠시 후 견디다 못한 뚱보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예, 어르신!”
젊은 청년의 목소리와 쿵쿵거리는 걸음소리가 멀어져갔다.
삐걱!
뚱보는 대청을 돌아다니다 힘이 들었는지 나무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서둘러 찻주전자를 들어 입에 쏟아 부었다. 차림과 달리 교양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범 아우, 몸이 불편한 겐가?”
밝은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며 누군가 걸어왔다.
“한 형! 드디어 오셨습니다. 풍이 이 자식은 어찌 먼저 고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던 뚱보가 사내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기쁘게 맞이했다.
“풍이를 탓할 것 없네. 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했으니.”
중년인은 얼굴에 주름이 좀 보였고 턱수염과 콧수염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는 기다란 보따리를 들고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뚱보에게 걸어갔다. 뚱보와 중년인의 어투로 보아 아주 친숙한 사이로 보였다.
“하하하! 한 형께서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으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만, 이번 일은 우양성 내에서 이곳의 입지가 달린 일이라 조금 조급했습니다. 그나저나 이것이 형님께서 직접 제련한 물건입니까?”
“맞네. 직접 확인해 보시게.”
중년인이 미소 지으며 그것을 뚱보에게 건네고는 태연히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범 씨 성의 뚱보도 거절하지 않고 보따리를 탁자에 놓고 허겁지겁 풀어보았다.
보따리를 풀자 금색 장검이 나왔는데 손잡이에 박힌 세 가지 색깔의 영석 때문에 한 눈에 봐도 평범한 영구로는 보이지 않았다. 뚱보가 조심스럽게 검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검을 뽑아냈다.
그러자 웅! 하는 맑은 울음소리가 울리고 금빛이 번뜩이며 작은 금색 교룡이 나타났다. 뚱보가 눈을 반짝이며 손잡이를 터니 금색 교룡이 순식간에 금빛 찬란한 검으로 변했다.
“대단합니다. 우양성에서 백 년 간 나오지 않은 최상급 영구예요! 영구가 형태를 갖추는 불가사의한 신통을 지녔다니! 이것만 있으면 주두안 녀석이 어떤 것을 내놓아도 지지 않을 겁니다. 형님, 또 한 번 이 아우를 크게 도와주십니다 그려!”
뚱보는 장검을 칼집에 꽂아 놓고 보물처럼 껴안더니 행복하다는 듯 크게 웃어댔다.
“아닐세. 자네가 충분한 재료를 구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안 그랬다면 최상급 영구는 만들어내기 어려웠을 것이야.”
중년인은 전혀 흥분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래도 형님이니 가능한 일이었지요! 다른 별 볼일 없는 자들은 아무리 재료를 가져다 바쳐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겁니다.”
“아첨할 것 없네. 이 검은 내가 자네에게 만들어주는 마지막 영구니까 말이야. 얼마 뒤 우양성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걸세.”
중년인이 미소 짓더니 뚱보가 놀랄 만한 말을 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양성을 떠난다고요? 대체 왜요? 설마 제가 보낸 하인들이 불편하게 해드린 것입니까? 그럼 말씀 하시지요! 내 그 놈들의 다리를 몽땅 분질러 버리고 새로운 아이들을 보내겠습니다.”
“예전에 수련 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범 아우가 나를 발견하고 도움을 주었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수련의 고비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야! 그래서 수십 년 간 영구를 만들어 전부 융흥경매상에 공급하며 은혜를 갚는 셈 쳤네. 그런데 이제 이곳도 성 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매상이 되었고, 이 검을 성주에게 바치면 다른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을 것이야. 자네가 내게 보낸 도제들이 영구 제련술을 전부 익히지는 못했지만 절반 정도는 따라할 걸세. 앞으로 경매상을 유지하는 데도 큰 문제가 없겠지. 알다시피 난 연체술을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영구 제련은 부차적인 일이었네. 그러니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뜻일세.”
“설마 한 형의 수련이 또 고비에 이른 것입니까?”
뚱보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기함했다. 중년인은 답이 없었지만 뚱보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눈 앞의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십년 전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불현듯 나타나 저택에 침입한 중계 연체사 열댓 명을 단숨에 죽이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었다. 그때 이미 성 안의 몇몇 고계 연체사들과 실력이 엇비슷했는데 또 고비를 만났다는 것은 수행이 대폭 늘어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한 형의 수행이 더욱 무서운 경지에 이르는 것 아닌가!’
“범 아우가 알아들었으니 되었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그간 내 존재를 발설하지 않고 나를 대신해 연체술에 도움이 되는 단약과 비술을 대량으로 구해줘 고마웠네. 허나 이제 인연이 다했으니 떠나야겠지.”
중년인은 그대로 일어나 포권을 하고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대청을 걸어 나갔다. 이에 뚱보는 입술을 벙긋 거렸지만 차마 말리지 못했다.
그저 중년인이 사라진 문가를 바라보며 막막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를 구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중년인의 도움으로 이름 없는 소상공인이었던 그가 일약 우양성의 거물로 성장했으니 은혜를 충분히 갚았다 여기고 떠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융흥경매상 대문을 나선 중년인이 순록처럼 생긴 거대한 짐승에 올라 타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몇 시진 후, 우양성을 떠나 이십 리 밖의 고갯길에 오른 그는 잠시 엄청난 규모의 성벽을 돌아보곤 탈 것에서 내려 소매로 얼굴을 스쳤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소매가 스치자 수염이 떨어져나가고 주름졌던 얼굴이 팽팽해지며 이십 대의 젊은 청년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수십 년 전 금옥종 수사들과 떠났던 한립이었다. 한립이 무덤덤한 시선으로 성을 둘러보고는 탈것에 오르지도 않은 채 성큼 성큼 어딘가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검은 점으로 변해 황야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 * *
우양성은 안원성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한립은 마치 나는 듯 걸어갔는데도 장장 반년이 지난 후에야 안원성의 폐허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 산 넘고 물을 건너며 인구가 밀집된 지역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먼 거리였다.
도중에 어쩔 수 없이 짐승들과 대여섯 마리의 저계 요수들을 죽였는데 그가 홀로 황무지를 걸어 다닌 탓이었다. 큰 상단 행렬이었다면 아마 저계 요수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안원성 폐허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서져 나간 성벽의 잔해가 끝없이 쌓여 있었고 그 위로 두껍게 흙먼지가 쌓여있었다.
한립은 미동도 없이 서서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금강결이 이미 7성에 이르렀으니 이번 고비만 넘기면 7성 최고봉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수련 속도가 그의 예상보다 빨랐는데 인계보다 영기가 짙은 탓도 있었지만 이전에 복용한 각종 영약 덕에 체질이 개선된 덕을 본 것 같았다.
예전에 진 씨 사내 등을 따라 요수 소굴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간 익힌 진법 지식과 신통을 이용해 간단히 칠엽음혈지라는 영약을 손에 넣었다.
금옥종 일행은 기뻐하며 그가 구현명옥담에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내용의 문서를 남겨 주었고 대신 옥패를 돌려받아 종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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