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49화 (506/2,000)
  • 749화. 구현명옥담(九玄明玉潭)

    *

    궁장 여인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아래의 작은 나무가 왜곡 되더니 뜻밖에도 검은 장포를 입은 음산한 노인으로 변했다.

    “허어, 흑풍족의 요녀였다니. 수행이 노부보다 훨씬 고명한 듯 한데 상대가 의식을 함부로 내뿜었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 그런데 안원성에 흑풍족의 피가 흐르는 반요가 살고 있을 줄이야! 이거야 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연이 아닌가! 저 시체를 좀 이용해야겠다.”

    노인이 낮게 낄낄대더니 말라비틀어진 거한의 시체를 허공에 띄워놓고 두 팔을 펼쳤다.

    그러자 회색 기운이 시체를 감싸며 흡수되었는데 바짝 말랐던 육체가 울룩불룩하게 꿈틀거리더니 피와 살이 차오르며 잘려나간 팔이 멀쩡하게 자라났다.

    “이 시체를 이용해 한 발 앞서 아이를 찾아내면…….”

    “찾아내면 어쩌겠단 것이지?”

    검은 장포 노인은 히죽이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냉랭한 목소리에 안색이 급변했고 화들짝 놀라 회색빛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리고 검은 화염은 놀랍게도 새까만 윤기가 흐르는 한 장 크기의 괴조로 변했다. 괴조는 두 날개를 펼쳐 단 번에 서른 장을 건너뛰었고 바로 노인 뒤에서 그를 덮쳤다.

    그러나 검은 장포 노인도 평범한 인물은 아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고는 한쪽 소매를 뒤쪽으로 펄럭이며 다른 손으로 자신의 두개골을 내리쳤다.

    그러자 회색 작은 깃발과 청록색 옥으로 만든 부채가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나 회색과 녹색의 빛으로 응결해 그를 뒤덮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검은 괴조가 응결된 기운 속으로 파고들어 검은 화염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촤륵!

    두툼한 두 개의 보호막이 종잇장처럼 타들어갔고 노인이 법력으로 만든 보호막조차 불길에 닿자마자 타들어가 요기를 띠는 검은 빛으로 변했다. 검은 장포 노인은 그대로 원영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일을 마친 검은 화염은 휙 하고 공중에서 뭉쳐 다시 검은 괴조로 변하더니 방향을 틀어 되돌아갔다.

    보라색 장포 거한의 시체 옆에 순간 공간 파동이 일어나더니 호리호리한 인영이 나타나 괴조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괴조는 그대로 연기로 변해 인영의 소매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인영은 바로 이미 이곳을 떠났던 궁장 여인이었다. 그녀는 멀리 노인이 죽은 곳과 괴이하게 허공에 떠 있는 시체를 번갈아 보며 조소했다.

    “본 궁의 영수조차 당해내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명시곡(冥尸谷) 원영기 수사 따위가 뒤에서 일을 꾸미려 들어! 허나 명시곡의 화시술(化尸術)만은 쓸 만하구나.”

    궁장 여인은 입을 벌려 검은 빛을 보라색 거한의 육체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체의 겉을 맴돌던 검은 빛들은 점점 연해져갔고 거한의 몸이 꿈틀하며 여인 앞에 섰다. 그러나 두 눈은 멍하기만 했다.

    궁장 소녀가 손을 뒤집자 검붉은 구슬을 다시 꺼냈고 그것을 거한에게 튕겼다. 보라색 장포 거한은 멍하니 입을 벌려 구슬을 삼켰다.

    그것을 본 여인은 괴이한 빛을 띠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거한이 여인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됐구나. 원영 이상의 수사만 없다면 아무도 이상한 점을 모를 테지. 분신(分神)으로도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어.”

    여인은 나지막이 웃음을 흘리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제 보라색 장포 거한만이 제자리에 남았다. 얼마 후 거한이 눈을 빛내며 수풀 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방 부인 등이 머무는 목조 건물에서도 한립이 사정을 듣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부인의 말씀은 제가 진 선사 등을 따라 요수의 소굴로 가서 칠엽음혈지(七葉陰血芝)라는 영초를 구해오라는 것이군요. 그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요수가 금속 속성의 금제를 걸어놓아 몸이 튼튼하고 힘센 연체사가 먼저 들어가 금제를 제거해야하고요. 맞습니까?”

    “한 형제의 말씀 대로입니다. 수도자들이 강제로 금제를 부술 수 있지만 법력을 사용하면 그곳을 지키는 요수들이 미리 눈치 채고 영초를 먹어치울 수 있어서요. 어쩔 수 없이 법력을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금제를 제거할 수 있는 범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절대 한 형제께서 헛고생을 하는 일 없도록 일을 마치면 후하게 사례를 할 것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금포 사내가 진심 어린 어조로 부탁했다.

    “후한 사례요?”

    “예, 혹시 본 종의 구현명옥담(九玄明玉潭)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이 호수의 물은 기이한 효과가 있어서 수도자들은 몰라도 범인들이 수련하는 연체술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온 몸에 자극을 주어 수련의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해주지요. 비록 처음 몸을 담갔을 때 단 한 번뿐이지만 이를 위해 중, 고계 연체사들을 포함한 많은 연체사들이 본 종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답니다. 한 형제가 영약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저희 사형제들이 힘을 합쳐 호수에 몸담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내겠습니다.”

    금포 사내는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구현명옥담이라, 저는 처음 들어봅니다.”

    “이곳 출신이 아니시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금옥종이 거대 종문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인근 연체사들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사실이니 몇 사람에게만 물어보아도 사실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금행금제(金行禁制)만 제거하면 나머지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요. 다른 일은 저희 사형제들이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요수의 난 때문에 요수의 소굴 주변에 모인 짐승들의 수가 훨씬 줄어들었을 테니 이때 잠입한다면 훨씬 수월하겠지요. 안타까운 점은 안원성이 너무 일찍 함락돼 동굴 안을 지키는 요수들은 거의 나서지 않았을 거란 점입니다.”

    금포 사내는 한립이 관심을 보이자 신이 나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구현명옥담과 관련한 이야기만 듣지 않았어도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칠엽음혈지 따위는 그가 아무리 먹어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체사의 고비를 넘기게 해준다면 그는 10년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시바삐 금강결을 대성해야 했으니 꽤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거기다 금행금제라면 진법에 능통한 그가 법력을 이용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좋습니다. 여러분을 도와 칠엽음혈지를 얻은 후 제가 구현명옥담에 들어갈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이 일을 수락하겠습니다.”

    한립은 거침없는 말투로 결정을 내리고는 진 씨 사내를 지긋이 응시했다. 어차피 상대도 자신이 일반 연체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으니 숨길 것도 없었다.

    그의 기색이 달라지자 방 부인과 반청은 조금 의외였지만 그녀도 영민한 사람이라 곧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미소를 유지하며 더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한 형제께 확신을 드리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요. 사제들 그것을 내놓으시게.”

    진 씨 사내가 손목의 팔찌를 문질러 하얀 기운이 도는 옥패를 꺼냈다. 반청과 또 다른 젊은 남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포 사내는 옥패를 모아 한립에게 건넸다.

    “이것은…….”

    한립이 옥패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금옥종 제자들이라면 반드시 지니고 있는 영심패(靈心佩)입니다. 종문 어른들께서 술법을 걸어 각자의 혼백 한 줄기를 머금고 있지요. 본래 전부 한 쌍인데 제자들이 종문을 떠날 때만 한 개씩을 남겨두고 갑니다. 만일 위해를 당하거나 실종되면 바로 추적할 수 있게요. 물론 이 옥 장신구들이 망가지면 주인인 수사 또한 의식에 손상을 입어 이후의 수행이 어렵습니다. 이것들을 잠시 한 형제에게 맡긴다면 진심을 표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고요.”

    금포 사내가 신중히 설명했다.

    “진 형은 믿을만한 분 같으니 그리 합시다.”

    한립은 의식을 방출할 수 없었지만 명청령안으로 여러 번 옥패들을 살핀 끝에 미약한 혼백의 기운을 느끼고 미소 지었다.

    그는 옥패들을 품에 집어넣었다. 혹시 옥패에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더라도 그의 신통에 당할 리가 없었다.

    한립이 정말 이 일을 수락하자 금포 사내 등은 무척 기뻐했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내일 하루 푹 쉬고 모레 출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한립은 인근의 작은 목조 건물을 배정받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그날 밤이 지나고, 이틀째 밤이 깊어 가는데 임시 거주지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안원성 성주가 멀쩡하게 주둔지에 나타나 이목을 끈 것이다.

    심지어 방 부인은 즉시 방을 나서 직접 조 성주를 만나 인사하기도 했다. 한립은 소식을 듣고 대아라는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가족을 찾았으니 이제 아무 일도 없겠지.’

    얼마 후 누군가 한립을 부르러 왔다.

    조 성주는 수하들과 상의한 끝에 손녀를 데리고 천원성으로 벗에게 의탁하려 했다. 그런데 대아란 아이가 가기 전에 반드시 한립을 만나야겠다고 고집 부린다는 것이다.

    조 성주도 그 김에 손녀의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전해왔다. 잠시 고민을 하던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당신이 바로 대아를 구해주었다는 연체사 한립이군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시지요. 노부가 힘닿는데 까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보라색 장포 거한은 한립을 보자마 자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몇몇 연체사와 함께 대아를 데리고 있었는데 임시 주둔지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떠날 모양이었다.

    여자아이는 작은 손으로 거한을 붙들고 맑은 눈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를 보고 반가워하는 기색은 분명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그저 운이 좋아 구한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은인을 알고서도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럼 이렇게 하시죠! 듣기로는 금강결을 3성까지 익혔다고 하더군요. 내 친한 벗의 조상도 예전에 같은 공법을 6성까지 익혔습니다. 벗이 건네준 증표가 있으니 이것을 갖고 그 후인을 찾아가면 수련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서책을 빌려줄 것입니다.”

    장포 거한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품에서 평범하게 생긴 단검을 꺼내 한립에게 주며 지명과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금강결과 관련한 심득(心得)이라…….’

    잠시 주저하던 한립이 단검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조 성주는 방 부인, 진 씨 사내 등의 배응을 받으며 여자아이를 데리고 거대한 늑대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순간 고분고분하던 산랑수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발을 구르며 홍분해 날뛰었다.

    보라색 장포 거한이 놀라 허벅지에서 희미하게 검은 빛을 번뜩이며 힘껏 늑대를 옥죄자 산랑수가 낮게 끙끙거리며 순종했다.

    다들 놀랐지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짐승이다 보니 산랑수가 성질을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단번에 허벅지 힘으로 소란을 잠재운 조 성주에게 다들 찬사를 쏟아냈다.

    그저 한립만이 보라색 장포 거한의 허벅지가 검은 빛으로 빛나자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 돌아왔다.

    산랑수를 탄 거한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배웅 나왔던 사람들도 흩어졌는데 한립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조 성주 일행을 지켜보았다.

    ‘분명 시기(尸氣)였는데 어째서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거지……. 하아, 겨우 꼭두각시 한 마리일 뿐이니 한 번 더 도와줘야겠구나.’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놓지 못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린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주둔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간이 목조 건물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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